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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9-24 20:04
조회
132
170930 동사서독 공지

1. 장자의 앎
[추수(秋水)]는 장자와 혜시의 이상한 문답으로 끝납니다. ‘내가 너를 모르는데 넌들 물고기를 알겠느냐’라고 말하는 혜시와 ‘네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물고기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알 수 없다’는 장자. 혜시가 장자의 큰 뜻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장자가 억지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는 문답입니다. 처음 볼 때는 혜시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거든요. 하지만 장자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혜시에게는 ‘서로 다르면 판단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는데 그 전제와 모순되게 혜시는 장자를 ‘판단’했으니까요. ‘장자는 물고기를 모른다’라고요. 어쩐지 말이 말을 낳는 것 같습니다만,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 언젠가 자기 전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바로 이 ‘말의 세계’이지요.
장자는 혜자에게 “나는 그것을 물가에서 알았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두고도 조별토론에서 고민이 많았지요. 장자는 농담을 한 것인가? 아니면 혜자를 물리치는 회심의 일격을 한 것인데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것인가? 채운쌤은 장자가 물을 거론함으로써 혜자가 ‘인식’ 할 때 늘 전제하는 것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앎을 성립시키는 것은 내가 있는 지금의 현재이며 흐름으로서의 세계인데, 혜자의 ‘인식’은 그 흘러가는 세계를 멈추고 잘라야 성립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것을 흐르는 물을 가리켜 지적한 것이라고 말이죠. 장자의 앎이란 세계를 고정시켜 ‘원본’으로 만들고 그것을 ‘떠올리는(재현하는)’ 앎(recognize)을 벗어나는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동양의 인식론은 원리와 구체적인 것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원리를 알더라도 구체적인 것에 통하지 않으면 원리에 통달한 것이 아닌 것이죠. 비근한 일상을 원리 속에서 보아야 감정의 진폭에 지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앎의 차원에서는 윤리도 다르게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규정을 짓는 것으로부터 윤리를 만듭니다. 혜시처럼 ‘나’와 ‘장자’와 ‘물고기’는 서로 다른 존재라고 먼저 전제하고 그 다음에 판단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절단하려고 하는, 무리하는 ‘인식’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전제가 흔들리면 당황하고 또 모순에 빠지게 되지요. 논리는 논리 안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장자는 모순에 빠진 혜자에게 어쩌면 가장 당연한 것을 말해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 멈추지 않고.

2. 時, 命
<장자>의 단골게스트 공자님께서 [추수]편에서는 時와 命을 말씀하셨지요. 역경을 피하려 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은 命, 영달을 추구해도 결과가 꼭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時勢 때문임을 아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아는 것 ’같습니다. 흔히 ‘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듯,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결과가 노력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時와 命을 아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태도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 시간을 들이면 어느새 그 노력한 시간에 의미를 부여해서 결과에 초연하기가 어렵게 되기도 하고, 또 내 노력이 결과를 좌우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애당초 포기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채운쌤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윤리적 결단의 태도를 공자님의 時中하는 태도, 혹은 장자의 ‘大知’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척도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늘 독립적이며 그 상황을 다 책임지겠다는 결단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時란 하늘(日)과 땅(土) 사이의 마디(寸)이라고 합니다. 천지의 작용 속에서 자기 존재성을 깨닫는 것을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때의 시간은 ‘인과’와는 다릅니다. ‘인과’는 인간이 상정한 틀인데, 인간은 자기의 인과관계 속에 자연을 구겨 넣으려고 합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천지의 작용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고 타원형이라 늘 오차를 두며 도는 것이지요. 자연은 매번 패턴을 그리는 것 같지만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회로가 돌지 않습니다. 어떤 여름은 비가 지긋지긋하게 오다가 어떤 여름은 너무나 가물지요. 이런 차이들을 인간도 겪는데, 인간은 그래도 여름은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고정하려고 하지요.
유교에서 말하는 ‘時中’이라는 말을 두고 ‘뭘 기준으로 그 時에 딱 맞는다고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時中은 그렇게 ‘기준’을 도입하려는 순간 풀리지 않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그건 또 다른 초월항을 소환하는 질문이고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옳음/그름을 판가름하려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채운쌤께선 비슷한 상황이라도 늘 같은 답이 정답일 수는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時中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최선의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며 초연할 수 있는 태도라고요. 왜냐하면 나는 이전과 같은 선택을 했더라도 時가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時中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강의 들으면서 주역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비근한 일상에서부터 이끌어난 고도의 추상적 원리, 易의 사고방식이 유가에도 장자에도, 동양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고 하는데 직접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치에 통달하여 자유롭게 결단하기 위해~ (하지만 우쌤의 주역 강의가 끝나버렸네요...ㅠㅠ 수시변역隨時變易 <중용> 강의 함께 들어요^0^)

-후기는 하동쌤
-다음 시간은 내편 [제물론], [대종사], 외편 [지락] 편 읽으시고 키워드를 잡아 공통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암송 있습니다. 멋진 구절 외워 옵시다. 하지만 모두의 운명은 쿤우쌤께 또 걸려 있다는 것-_-+
-[천하]편 보충수업 있습니다. <장자 4>, <중국인성론사> 프린트물 가지고 오시고요.
-간식은 은남쌤, 쿤우쌤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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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26 22:06
    채움 샘 강의 들으니까, 중도에 주역 때려친게 어찌 그리 후회가 되든지~ㅠ~. 쨋든, 부쩍 부지런해진 반장 덕분에 공부 도움이 많이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