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109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1-05 15:53
조회
336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내게 지금 이토록 절실한 이 욕망, 감정, 경험의 더미가 내가 존재하기 이전과 이후 영원히 이어질 출생과 죽음 가운데 단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기억 안에도 남지 못하고 사라지리라는 것… 이에 대해 인간이 갖기 마련인 끔찍한 공포가 올림포스의 신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기독교 형이상학을 낳았다고 니체는 말했었지요.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죽음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게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이라고요.
지난 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엘리아데의 짧은 글 <이미지와 상징>은 ‘大시간’이 주는 허망함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도인들이 고안해낸 브라흐만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신체적, 물리적 한계 안에서 세계를 경험하다 다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개체와 달리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인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생과 멸은 결코 대립하지 않습니다.
멸은 생의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차라리 생과 동시적인 것, 늘 생과 더불어 있는 것, 생을 가능케 하는 것이지요.
유한성의 시간 안에서는 생의 중단이 멸이지만, 무한한 시간 속에서 두 시간은 늘 동시에 존재합니다. 혹은 생이라 할 것도, 또 멸이라 할 것도 없는 셈이 되지요.
그야말로 불생불멸의 시간, 그것이 무한의 시간, 신의 시간!


이와 같은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힌두 사상의 ‘브라흐만’입니다.
신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의 창조 원리이기도 한 브라흐만을 통해 모든 개체들이 존재하지요.
개체에 구현된 브라흐만, 이를 아트만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브라흐만으로부터 분화된 것, 불생불멸의 존재와 연결된 것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체들이, 자신이 브라흐만과 연결되어 있음을 모른다는 데서 생긴다고 하지요.
브라흐만/무한/불생불멸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모르는 개체들은 매번 현상 세계 안에서 자신의 감각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탐하고 집착하면서 살아가는데, 이렇게 해서 쌓이는 업들이 그로 하여금 언제까지고 현상계 안에 머물게 만듭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 개념이 바로 이것. 무지한 인간이 현상들에 현혹되어 그곳에 머무는 것!


자, 그럼 도저히 이 고리를 끊고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이에 바라문들이 택한 것이 고행이었습니다.
집에서 집 아닌 곳으로, 수풀로 나가기. 내 눈코입이 탐하던 것들을 끊어내기. 바람이 되고 물이 되기 위해 신체를 단련하기.
이 같은 각고의 노력 끝에 감각의 배치가 달라지면 고행자는 드디어 자신의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합일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유한성의 존재가, 자신이 실은 무한한 존재 안에 있는 것임을, 그것과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이죠.
그건 생과 멸이 하나가 되는 순간,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인간이란 참 비슷하지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고 죽음의 의미를 묻고, 그러면서 내 존재가 한낱 無는 아니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에 자신을 의탁하고 싶어지는.
니체는 이런 자들이 곧 허무주의자이고 약자라 했었지요.
기댈 만한 모든 것을 쳐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던 불교의 가르침은, 그런 면에서 힌두와 닿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지대로 나아간 혁신적 철학이라 할 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도 있는 비교를 위해서는 우파니샤드를 한참 더 많이 공부해야 할 듯. 비교는 잠시 접어두고 경전에 더 주의집중하는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못다 한 우파니샤드 1권, 2권 모두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공통과제 필수!
담 시간 간식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그때까지 건강하게, 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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