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1-22 20:10
조회
311
이번 주에는 <감각의 논리>를 중심으로 들뢰즈의 예술론(회화론?)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채운쌤은 들뢰즈 회화론의 핵심이 ‘재현의 사유 벗어나기’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뢰즈는 대상 세계를 고스란히 옮겨오는 것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대상 세계’란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감각하고 바라보는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세계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예술은 우리의 감정을 유발합니다. 가령 익숙한 리듬과 익숙한 코드진행을 갖고 있는 음악, 관습적인 플롯을 반복하는 영화나 드라마 등은 우리의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이리저리 끌고 가죠. 그러나 들뢰즈가 주목하는, 우리의 익숙한 코드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을 목도할 때 우리는 affect(변용?)를 겪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당신의 심리 속에서 메아리를 내고 생명의 순환계를 괴롭힙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을 둘러싼 대기 자체를 변화시키죠.”

감정이 유기체로서의 우리 신체가 겪는 것이라면, affect는 그러한 코드화된 신체에 균열을 내고 교란시킵니다. 가령 르네상스 종교화는 투시도법을 통해 대상을 관찰하는 우리 눈의 기능을 극대화시켰다면, 타일들로 이루어진 비잔틴 종교화는 우리의 시각을 손처럼 바꾸어버립니다. 수많은 타일들로 이루어진 비잔틴 종교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눈으로 더듬으며 새롭게 구성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채운쌤은 이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일이라고 하셨죠. 기관화된 감각을 해방시키는 것. 들뢰즈는 이것이 예술의 본래적 기능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들뢰즈는 르네상스 이후의 과도기적 시기인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을 르네상스로부터의 도주선으로 이해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이 조화나 균형을 중시했다면 미켈란젤로나 엘 그레코의 과장되고 모호한 선들은 그러한 조화, 균형, 절제로부터의 도주를 나타냅니다. 이들은 이미 대상세계의 완벽한 재현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않기 시작한 것이겠죠. 미켈란젤로의 경우 규정된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깃들어 있는 힘을 그렸다고 합니다. 즉 미켈란젤로가 ‘남자’나 ‘여자’라는 대상을 그릴 때조차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이 갖는 규정성보다는 그의 근육과 힘줄이 만들어내고 있는 어떤 힘의 차원이었을 것입니다. 엘 그레코의 모호한 선에 대해서 채운쌤은 그가 어떤 명확히 구분되는 대상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발생의 조건을 그려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발생의 조건에서 솟아오르는 하나의 형상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발생의 조건을 그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재현의 세계를 벗어난 예술이 꼭 추상의 세계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추상의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된, 견고한 뿌리를 숨기고 있는 세계일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잭슨 폴록이나 칸딘스키같은 작가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런 것이겠죠. 들뢰즈는 단순히 코드를 부정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탈영토화된 것이 항상 가장 쉽게 재영토화되는 것처럼, 단순히 우연에만 내맡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우연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들뢰즈의 예술론이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비판받는 것에 비해, 본인은 오히려 예술이 “일상적 삶에 밀착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일상에 밀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는 이미 우리의 기호계에 작용하며, 우리의 일상과 감각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일상과 감각을 포획하기 쉬운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들죠. 그렇다면 고급예술이건 저급예술이건, 친정부 예술이건 반정부 예술이건 우리의 납작해진 일상과 감각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한다면 일상에 밀착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들뢰즈는 일상에서 가장 먼, 동시에 일상에 가장 밀착해 있는 예술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한 스토리, 익숙한 내러티브를 붕괴시키고 새롭게 사유하고 새롭게 감각하게 만드는 예술.

<감각의 논리>는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에 관해 쓴 책입니다. 앞서 인용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베이컨에게 예술은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예술은 고통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작의 고통’과 같은 차원의 것을 말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이때 베이컨이 말하고자 하는 고통은 예기치 못한 것을 마주친 당혹스러움 같은 것이겠죠. 아르토가 ‘잔혹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예술이었습니다.

베이컨과 아르토에 따르면 예술은 폭력적인 것 이지만, ‘폭력적인 것’의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예술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은 기쁨을 생산합니다. 무언가의 재현이 아닌, 그 자체로 생성을 담고 있는 예술은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세계를 만나게 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존재 역량을 키웁니다. 세계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이전과 다른 것이 되게 하는 거죠. 채운쌤은 예술에는 이중의 되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가와 대상 사이의 되기와 작품과 관객 사이의 되기.

그러고 보면 저는 정말 들뢰즈가 말하는 예술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봐도 ‘문화생활’을 넓게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정말 ‘문화생활’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익숙한 코드들을 소비하는. 영화관에 예술영화 전용관은 늘어나고, 사람들이 문화생활에 쓰는 돈도 늘어나고, 사람들의 취향은 세분화되는 것 같은데 희한하게 감각과 일상은 그저 납작하기만 한 것 같은... 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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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2 20:15
    호오...왜소하고 납작해진 감각... 왜 그런 것인지 지가 좀더 생각해서 써주면 좀 좋아? 버럭!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