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215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2-09 21:02
조회
334

지난 수업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진행됐지요.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처음부터 4장까지는 ‘소수문학’이라는 테마로, 그 뒤부터는 ‘욕망’ ‘배치’ 등의 테마로 읽을 수 있답니다.
소수문학은 아직 낯설 수도 있겠지만, <앙띠>와 <고원>을 차례로 읽은 우리로서는 그래도 욕망이나 배치 같은 단어는 적어도 눈과 귀에 익지요ㅎㅎ 저로선 앞서 읽은 책들 때문인지 <카프카>는 그래도 읽을 때 아주 약간 수월한 감이 있었어요. 예전에 읽었을 때는 너무 서걱댔었는데, 지난 네 학기 공부한 게 아주 헛된 건 아닌 것 같아 자족 중입니다 냐하하하~


건화가 먼저 후기를 올려주었으니 저는 그냥 제가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만 아주아주 간략하게 복기해볼게요.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잔의 사과에 대한 D.H.로렌스의 코멘트였어요. 세잔의 그림들은 상처투성이다. 실패다. 미완이다. 아니 어째서?!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이 진실한 것이라면 실패일 수밖에 없다는 게 채운 쌤 설명이었지요.
세잔이 본 것은 우리가 아는 ‘그’ 사과, 달고 시고 빨갛고 동그랗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전한 어떤 강렬도에 다름 아닙니다.
나의 모든 선판단을 이루는 모든 기억과 관념을 내려놓고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그것의 독특한 힘, 세잔이 포착한 것은 그것인 거지요.
그게 비록 사과가 있는 정물이라 불려도 사실 그것은 ‘사과’가 ‘있는’ ‘정물’이 아니라는 것.


자, 그러므로 모든 세잔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붓으로, 펜으로 포착해서 가둘 수 없는 것, 캔버스나 원고지 안에 붙잡아둘 수 없는 것을 맹렬하게 좇고 있는 셈이니까요.
말하자면 세잔의 캔버스에 남는 것은 결국 그 추격과 미끄러짐의 흔적들입니다. 작가의 악전고투, 우리가 아는 ‘사과’와 싸우면서(채운 쌤 왈, [진정한/진지한]작가는 클리셰들과 싸운다!)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것을 좇는 과정, 그게 캔버스에 그가 남긴 색채들인 셈이지요.
애초 불가능한 일에 뛰어든 사람들인만큼, 그들의 성과는 언제나 미완이고 실패.
아마도 이게, 들뢰즈도 한 말이지만 카프카의 장편들이 모두 미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겁니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은 필연적으로 미완이다… 그들은 언제나 실패한다…
이를 알면서도 뛰어드는 게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들의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됩니다. 전 이런 건 어느 정도 타고나는 거라고 보는 입장인지라 ^^;


암튼.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이런 게 소수적인 문학, 소수적인 예술이랍니다.
이미 표현된 것, 충분히 표현되고도 남은 것, 그러니까 수없이 재현되었고 관습으로 자리 잡았고 사람들이 다 알만 한 것들을 또 노래하고 또 그린다면, 글쎄요, 그건 대중을 위한 딴따라죠.(연예인이 딴따라라는 생각은 완전 편견!)
딴따라는 딴따라로서 살 자유가 있고 또 그들의 존재 이유도 충분히 있습니다만, 아무튼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혁명적으로 살고 사유하는 이들은 따로 있으니 그들이 소수적인 문학을 끊임없이 발명하는 예술가들이라는 거죠.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 재현을 거부하는 사람들, 채운 쌤 말씀대로 “규격화되고 체계화되고 제도화된 것”에 대한 의혹을 표명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예술가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프카의 혁명성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카프카는 절대 소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나 디아스포라 문학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으로는 혁명적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작품이 혁명적이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혁명은 지금까지 당위적으로 혁명과 자유와 평등과 해방을 외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언어로부터 도주하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당위로 가득 찬 언어, 실존과 생성을 허위로 덮는 언어로부터 달아나, 지금까지 한 번도 언어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을 들여다보려는 노력, 찰나의 시도, 거기에 혁명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
채운 쌤께서 언급하신 까르멜로 베네의 생각이 이와 맞닿아 있지요. 그는 민중극을 불신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민중의 갈등이 “재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서 김기덕 영화가 흥미롭습니다. 자주 함께 언급되곤 하는 박찬욱, 홍상수, 봉준호보다 훨씬 유치하고 설익은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느끼기에 김기덕의 영화는 식상하고 납작한 말(인물의 대사)과, 무서울 정도로 비릿하고 날선 이미지들이 함께 있어서, 그것들이 충돌할 때 아주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곤 하지요.
모던한 감각, 미장센에 대한 애착, 완벽하게 짜인 와꾸(^^;) 같은 게 없는 김기덕의 강점은 바로 이 충돌 자체에 있다고… 믿습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는 여태껏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실험을 스크린 위에서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채운 쌤께서 모름지기 작가라면 항시 소수자와 함께 한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작가가 실제로 무슨 시위현장에 나가고, 노조나 단체와 연대하고, 시국연설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닐 테지요.
카프카를 보세요. 그가 쓴 것은 생쥐, 광대, 원숭이, 갑충입니다. 이런 카프카가 현재 활동 중인 21세기 작가 중 그 누구보다 소수적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우리가 생각하는 말[言]/문장/문단/이야기/메시지/문학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는 말이 되기 전의 말, 말로부터 벗어나는 말,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따라가는 이상한 작가니까요.
그러니까 이미 재현된 전달 가능한 지배적인 다수적인 말과 사유로부터 비껴선 채 슬금슬금 굼실굼실 움직이는 말들.


…어쩌면 예루살렘 상을 수상했을 때 하루키가 했던 연설도 이와 연관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벽과 알>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그는,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프롤레타리아나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라, 모든 벽에 맞서는, 견고한 벽보다 훨씬 약해 언제나 깨질 수밖에 없는 알의 편에 서는 것이라 했습니다.
누가 더 옳아서, 더 정당해서, 더 불쌍해서 지지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소수자라면, 견고한 벽에 맞서 싸우는 알이라면 그의 편에서 글을 쓰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인 거지요.


지난 수업은 멋진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 저로선 정말 정신이 없었네요. 멋진 로렌스, 멋진 세잔, 멋진 헨리 밀러, 멋진 카프카… >.<
자, 다음 시간에는 욕망과 배치를 주제로 나머지 부분 진행됩니다. 바쁘셔도 웬만하면 책 읽고 오시고요^^;


간식은 래미쌤+아라쌤께 부탁드렸습니다. 맛난 간식 보증수표시죠 캬캬.


그럼 저는 이만.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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