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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화의 독서노트] 히포크라테스적 의술 : 징후를 읽어내기 ― 《히포크라테스 선집》[1]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10-13 14:25
조회
474

히포크라테스적 의술 : 징후를 읽어내기


-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선집》(나남) (1)




“어떤 의사가 낯선 나라에 도착하면, 그는 그 곳의 위치에, 다시 말해 그 곳이 바람과 태양의 떠오름에 대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이런 점들과 아울러 가능한 한 물과 관련해 사정이 어떤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그리고 사람들이 누리는 섭생법이 어떤지, 즉 음주를 좋아하고 낮에 식사를 하며 힘든 일을 하지 않는지, 아니면 운동과 노고를 좋아하며 많이 먹고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지 고려해야 한다.”(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선집》 , 나남, 21~22쪽)


히포크라테스(B.C. 460? ~ B.C. 377?)는 의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이해한 ‘의학’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과 사뭇 달랐던 것 같다. 히포크라테스 스타일의 의사는 환자의 증상뿐만 아니라 환자가 사는 지역의 전반적인 환경을 진찰한다. “어떤 질병도 자연적 기원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77쪽) 이것이 히포크라테스의 통찰이다. 따라서 환자의 병을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려면 우선 병이 발생하게 된 필연적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조건에는 우선 환자가 사는 고장의 자연적 요소들이 속할 것이다. 그 도시는 해가 뜨고 지는 방향과 어떻게 면하여 있는지, 어떤 성질의 바람이 어떤 강도로 부는지, 사람들이 마시는 물의 상태는 어떤지. 자연환경에 대한 분석을 마쳤다면 이제 그 지역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무엇을 주로 먹는지, 어떠한 강도로 얼마나 일하는지, 사람들의 건강상태에 영향을 줄만한 특별한 풍습은 없는지 탐구해야 한다. 환자의 “뱃속 상태”(24쪽)를 알고자 하는 자, 먼저 바람의 방향을 읽어라! 이것이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이다.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아주 실질적이고 분명한 설명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있는 나라에는 물이 풍부하며 이로 인해 그 지역 사람들의 체질은 습하고 머리는 점액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습한 체질로 인해 그들은 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이 지역 여성들은 흔히 유산과 불임을 겪게 되고 어린 아이들에게서는 간질과 호흡곤란이 자주 나타난다. 이런 식의 설명이 과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그리고 여러 모로 삶의 환경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의 분석틀이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해석과 진단의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히포크라테스적 관점에서는 어떤 현상도 그것을 이루는 조건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 불임이나 간질 같은 표면적 증상은 환자의 신체가 그 고장의 풍토와 맺고 있는 관계를 함축한다. 그러니 약이나 수술을 통해 증상을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 히포크라테스가 현대에 온다면, 암을 발생시킨 조건은 나몰라라 하고 암세포를 제거하는 데에만 첨단의 지식과 기술을 동원하는 현대 의료제도의 면면에 기함하지 않았을지?




히포크라테스에게 병이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징후다. 물론 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침착하고 신중하게 그것을 읽어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병을 스스로의 관점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병을 안고 살아간다. 병원에서 진단받는 병 외에도 각자가 앓고 있는 고유한 병들이 있을 것이다. 동일한 행동 패턴을 반복하며 관계를 어그러뜨리기도 하고, 치우친 성향에 의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한 사회나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들도 존재한다. 분명한 건 아무런 병도 없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히포크라테스가 보여주듯 우리는 무수한 외부적 요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러한 한 어떤 어긋남들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병이 야기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오히려 병적인 상태에 더욱 강하게 고착되어버린다. 고통을 유발한 조건은 그대로인데 증상을 약화시키거나 일시적으로 제거해주는 것들을 취해봐야 병은 만성이 될 뿐인 것이다. 자포자기 하고 자신을 병적인 상태에 내어준 채로 살아가거나 병을 없애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우상을 찾아 헤매거나.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결국 둘 중 하나의 결말이지만, 어느 쪽이든 무지하고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히포크라테스라면, 고통이 의식되기 시작하면 먼저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말할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의 질병과 고통에 대한 각자 나름의 서사와 해석방식들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정작 질병이 발생하게 된 조건을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떤 외재적 원인을 찾는다. ‘저것만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었을 그 어떤 실체적 원인(우리는 그것을 죄, 악, 잘못 같은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가 파악하는 원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쉽사리 어찌해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태양과 바람과 물. 이것들은 인간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통제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또 우리는 이미 이러한 요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들은 이미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도 좋은 ‘외부적’ 요소가 아니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하는 원인들, 조건들은 우리의 존재 안에 깊이 스며있으며 우주적 필연성에 의해 우리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시야를 확장하여 자신의 병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필연적 조건들을 동시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스스로의 병을 좀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겪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진단과 치료는 매우 실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차원에만 국한되는 작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병을 이루는 조건들을 단지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르게 관계 맺기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단이 얼마나 적합한 것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실천 또한 적절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가 일단 한 고장의 계절, 물, 바람, 장소, 사람들의 생활방식들에 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면 그는 “치료의 수단이 없어 당황하지도, 완전히 실패하지도 않을 것”(24~25쪽)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조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때, 다시 말해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꿈꾸거나 책임을 전가할 악을 찾으려하지 않고 자연적 필연성 속에서 그것을 이해할 때, 다른 방식으로 그것과 관계하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계기와 수단을 우리는 도처에서 발견하고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건화

전체 4

  • 2021-10-14 08:17
    히포크라테스의 치료는 왠지 우리가 배우는 철학의 방법과도 닮은 것 같아요. 편견과 집착에서의 치료는 적합한 진단, 자연적 필연성 속에서의 진단에서 시작해서 적합한 이해들을 시도하는 일인듯 해서요. 히포크라테스형님처럼 물, 공기, 바람과 함께 우리의 몸과 생각을 읽으면 좋겠네요!

  • 2021-10-14 12:57
    어쩌다 검색해서 본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꽤나 감동적이었는데, 이런 철학이 담겨 있어서 그랬군요! 또, 병을 진단하려는 히포크라테스의 모습이 어쩐지 탐정처럼 보입니다. 환자의 생활 습관부터 그가 거주하는 공간의 특징,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 등을 차근차근 살피는? ㅋㅋ 그리고 치료란 결국 스스로의 삶을 진단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철학적 능력과 분리될 수도 없다는 얘기는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는 진리인 것 같네요.

  • 2021-10-15 16:22
    (당당히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고구마 구간이 없어 읽는 내내 속이 후련했습니다~다음편이 기대됩니다^^

  • 2021-10-23 11:12
    오 건화샘! 마치 제게 도움을 주시려고 쓰신 듯한 이 글은 뭔가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복 받으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