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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화의 독서노트] 적절함을 안다는 것 ―《히포크라테스 선집》[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10-27 14:15
조회
388

‘적절함’을 안다는 것
-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선집》(나남) (2)



“포식에서 생기는 것들과는 다르지만 이것들 못지않게 위험한 많은 해악이 비움에서 생긴다. 따라서 의사의 할 일은 한결 더 다양하고 더 크게 정확성을 요한다. 적도를 목표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정확한 것을 알기 위해 기준으로 삼을 어떤 적도도―그 밖에 무게도―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몸의 감각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146~147쪽)

정확한 것을 알기 위한 유일한 기준은 몸의 감각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이 구절을 읽다보니 내 경험을 반추하게 된다. 최근 나는 오늘날의 의학이 얼마나 ‘감각’에 무관심한지를 몸소 체험했다. 나의 모친께서는 얼마 전 백신 후유증을 심하게 겪은 뒤 지금은 결국 휴직을 하고 집에서 요양 중이시다. 그 과정에서 몇 번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병원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응급실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본 결과 대부분의 수치가 정상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고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는데도 엘리트 과정을 밟은 유능한 의사들은 손 놓고 바라 볼 뿐이었다. 동의보감 세미나에 고작 한 시즌 참여한 나조차도 간단한 조치로 엄마의 증상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킬 수 있었는데 말이다. 병원의, 의사들의 앎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병에 걸리는 건 당신 자유지만, 우리의 지식과 장비가 포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도움도 제공할 수 없으니.’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또 한 번 현대의학의 대척점에 선다. 히포크라테스는 ‘본질’이나 ‘기원’ 같은 것을 탐구하는 건 철학의 영역이라며 선을 긋는다. “어떤 의사들과 지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 의술을 알 수 없고, 사람들을 제대로 치료하고자 하는 이들로서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철학에 속하는 것”(164~165쪽)이라는 말이다. 마치 고대의 철학자들이 세계의 근원은 물이라고, 불이라고, 물, 불, 공기, 흙이라고 각기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것처럼,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의사들은 사람이 피라거나 점액이라거나 담즙이라고 주장하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가 보기에 인간은 결코 그렇게 단일한 본질로 환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요인은 언제나 복수적이며 다층적이다. “한 가지 것(hen)으로부터는 생성(genesis)이 이루어지지 못한다.”(191쪽) 인간이 건강을 누리고 질병을 겪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그가 단일한 본질로 환원될 수 없는, 생성 중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히포크라테스는 말한다. 의사는 일반적 가정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항상 구체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의술에 공허한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137쪽)

의사로서 히포크라테스는 독단론과 본질주의에 반(反)한다. 물론 의사는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하지만, 보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구체적 인간‘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의사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과 관련해서 인간이 무엇인지, 여타 생활방식과 관련해서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 각각으로부터 각자에게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지를”(165~166쪽) 알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히포크라테스와 더불어 우리는 보편이나 절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초월적 기준 같은 건 없다. (최첨단의 기술과 최고의 과학성을 자부하는 현대의학이 얼마나 많은 구체적 몸들과 느낌들을 무시해버리고 있는지 보라!) 그런데 초월적 기준의 부재는 우리를 불가지론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절대적 척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것들에 항구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히포크라테스는 “치즈는 해로운 음식물이다. 그것을 포식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166쪽)라는 식의 1차원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서고자 한다. 왜냐하면 치즈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치즈가 어떤 고통을 왜 유발하며 사람 속에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에 부적합한지를 알 필요가 있다.”(166쪽) 그래야만 우리는 그것과 적절하게 관계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모든 일반론은 건강에 적대적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신체는 복합적인 힘들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화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포식에 의해 해를 입게 되지만, 건강한 사람은 때에 맞지 않는(akairos) 단식에 의해 그에 필적하는 고통을 겪을 수 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것이 몸에 맞는 사람이 같은 양의 음식을 두 차례에 나누어 먹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건강을 잃게 될 수 있다. 우리가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더 많은 요인들을 고려 하에 두고자 할수록, 건강과 질병이란 적절한 관계와 알맞은 때에 달려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우리의 삶 일반으로 확장시켜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건강과 병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도대체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알기 위해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의 감각뿐이다. 동일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놓여 있는 구체적 조건에 따라서 적절한 것이 될 수도,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가로지르는 구체적 순간들은 환원불가능한 차이로 진동하고 있기 때문에, 제도나 지식이나 전문가나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대신 판단해줄 수는 없다. 물론 그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도움을 받을 수 있겠으나 자기 자신의 적절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종종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알려주는 어려운 양생술보다는 병원에 내 몸을 내어주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 간편해 보이기도 한다. 분명 자신의 감각에 의지한다는 건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판단하고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적절함을 찾아가는 이러한 과정은 세계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확장하고 자신의 해석을 입체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타인의 명령에 대한 일방적 복종으로는 이러한 역량의 확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역량의 증대 없이는 자유도 구원도 모두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글 : 건화

전체 2

  • 2021-10-27 16:12
    '자신의 적절함을 찾아가기'란 말이 맘에 확 꽂히네요. 그건 '환원불가능한 차이'로 다가오는 매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은 결국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해석을 입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 마음에 담아 갑니다!

  • 2021-10-30 12:28
    때에 맞지 않는 단식과 적절하지 않은 섭취량은 모두 몸에 안 좋군요. 한 끼에 먹는 양을 두 번에 나눠 먹으면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은 결국 습관과 연관되는 것 같군요. 때에 맞는 섭취량도 습관과 연관이 있겠고요. 흠... 그런데 감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모르겠군요. 판단 기준으로서의 자신의 감각이 단순히 그 자체로 옳음을 담지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다음 글에서 풀리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