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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화의 독서노트] 마음 돌봄의 기술 ―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1]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11-09 23:03
조회
451

마음 돌봄의 기술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까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덕의 자연적이고 고유한 속성입니다.”(세네카,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 까치, 89쪽)


최근에 어떤 계기로 정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한동안 마음이 편한 날이 별로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야 찾자면 여럿이었겠지만, 문제는 내가 내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고 그것을 돌보는 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늘상 불편하고 얼굴이 항상 찌푸려져 있고 어깨근육이 잔뜩 뭉쳐 뻣뻣해져 있다면 내가 하는 공부란 대체 무슨 쓸모일까? 공부 따로 마음 따로인가?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살고자 공부를 한다면서, 그간 이런저런 슬픈 정념들에 지배당하고 있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니. 어쩌면 그런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세네카에 따르면 덕의 고유한 속성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서 외에 덕의 다른 토대는 없다. 예를 들어 세상의 불의에 일일이 분노하고 그러다 지쳐 좌절에 빠진 정의로운 영혼이 있다면, 그에게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 너무 착한 나머지 자신의 미세한 흠결에도 가책에 사로잡히고 타인의 고통을 볼 때마다 연민에 잠겨 스스로를 괴롭히는 선한 자가 있다면, 그에게 선량함이란 무엇일까? 앎을 추구하는 자가 세상의 모순과 기만에 분개하여 자신이 쌓아올린 지식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그를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그 대가로 우리의 기쁨과 역량을 희생시켜야 하는 덕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반(反)생명적일 것이다. 정서는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이며 삶을 살아내는 우리의 힘이 표현되는 가장 확실한 징후다. 니체가 말하듯 비장하고 심각하고 우울한 철학자에게는 분명 어딘가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돌본다는 건 뭘까? 이상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쁨을 추구하면서도 그 결과 슬픔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점이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살아가면서도,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우리는 우리가 기쁨을 느끼고 슬픔에 빠지는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외부 대상에 집착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외부 대상을 혐오한다. 집을 소유하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사라지면 나의 불행도 끝이 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완벽한 조건 같은 건 없다. 세계도,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외부 대상으로부터 기쁨을 구하는 한 우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분개하고 새로운 갈망의 대상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게 될 뿐이다.

세네카가 말하는 현자, 철학자의 지혜는 무엇일까? 기쁨의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세네카는 기쁨과 슬픔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음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현자에게 불의란 없다. 운명은 현자를 고통에 처하게 할 수 있고, 그의 재산을 빼앗고 신체를 훼손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자로 하여금 분노나 슬픔에 사로잡히도록 강제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념들은 “의지에 따르는 마음의 악덕이지,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나왔기에 현자까지도 겪게 되는 그런 것은”(85쪽)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것들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그것에 반응한다. 예를 들어 찬물을 맞고 한기를 느끼고, 불시에 어떤 것이 몸에 닿으면 움찔하며, 나쁜 소식을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선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응이 우리를 사로잡는 정념으로 변화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외부 대상이 유발한 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고 거기에 우리의 해석을 덧씌울 때 비로소 우리는 정념에 지배권을 내어주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정을 해부해보자. 불쾌한 감각의 발생이 반드시 분노에 사로잡힌 예속적 상태를 조건짓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과 판단이 개입한다. 타인이 지니고 있을 악의에 대한 상상, 해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러한 상황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너무도 정당하다는 판단. 불의가 행해졌기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을 불의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념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것이다. “대부분 각자는 자신의 감정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71쪽)에 정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정념은 정념일 뿐 옳고 그름 따위는 없다. 결국 분노하는 자가 스스로의 판단과 더불어 만들어낸 정념은 마음의 평정을 해치고 외적 대상에 지배권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분노에 사로잡힌 자 자신에게 가장 해가 된다. 정서는 외부 대상에 의해 촉발되지만, 우리가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해석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해석과 판단을 바꾸는 것으로 우리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세네카는 오직 자기 자신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으며 외부적 조건에 자기 존재를 내어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단단한 자유로움의 비전을 제시한다. 이것은 만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거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식의 무책임한 정신승리법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세네카는 현자의 자유로움이 해석을 바꾸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매우 실질적인 기술의 연마를 수반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약속해줄 무언가를 손에 넣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겪든 거기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무장하는 일이다. 마음 돌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기예를 갖추기 위해 우리는 어떤 훈련부터 시작해야 할까? 바로 관찰이다. 우리로 하여금 외부 대상에 대해 정념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고착된 해석, 자기중심적인 해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이 반응을 일으키고 우리의 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을 미세하게 해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불편한 마음을 겪으며, 나는 그러한 마음 상태에 사로잡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내가 거기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물론 그렇다. 나는 무엇을 겪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현자가 아닌 이상 외부의 조건에 의해 휘청거리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성이 예속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기쁨과 슬픔이 외적 대상들에 달려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내 마음의 작동방식을 관찰하기를, 그러니까 해석을 바꾸기를 시도한다면 조금이라도 내가 더 큰 원인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그 순간들을 겪어낼 수 있다. 그리고 아마 세네카가 말하는 그 굳건한 기쁨이란 것도 여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자가 느끼는 기쁨이란 쾌한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원인이 되어 존재하는 어떤 충만함과 자유로움을 뜻하는 것일 터이니.

글 : 건화

전체 5

  • 2021-11-09 23:25
    건화샘의 기쁨이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랍니다_()_

  • 2021-11-10 19:44
    공부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해석이라.. 자기합리화랑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 ^^

  • 2021-11-11 09:59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약속해줄 무언가를 손에 넣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겪든 거기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무장하는 일이다. 마음 돌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요 문장이 탁 와서 박히네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엇을 겪든 거기에 지배당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마음돌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심란한 아침에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할지 한방 먹은 기분입니다. 감사^^

  • 2021-11-11 20:05
    정신승리 제가 완전 좋아하는데... ㅋㅋㅋ 정신승리라는걸 아는 것이 필요할거 같네요.. 그 부분이 늘 저를 어렵게 만드는거 같습니다~.마음돌봄 기술 훈련의 시작은 관찰... 미세하게 관찰하여 해부하는 훈련.. 그리고 불편함을 기꺼이 겪을 수 있는 마음..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

  • 2021-11-15 07:16
    기쁨을 추구하면서도 슬픔에 사로잡히고 마는 원인이 외부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을 크게 내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건화샘의 마음 공부를 응원하며 저도 옆에서 동참!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