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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전 역사의 탄생 4강 <사기>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8-14 14:36
조회
149
 

사마천하면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건 고ㅈ.... 아니, 궁형이었습니다. 다행히 일을 당하기 전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사마천의 손자인 양운이 한 선제에게 《태사공자서》를 바쳤고 이게 《사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를 들어보니 궁형이 심각한 사건이긴 하지만 단순히 잘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마천의 인생 전체에서 본다면 다르게 읽힙니다. 궁형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역사학자로서의 소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태사공이 이릉의 화를 당해 감옥에 갇히자 이에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란 말이냐, 이것이 내 죄란 말이냐! 몸은 궁형을 당해 쓸모없이 되었구나.” 그리고 물러가 깊이 생각한 뒤 말하기를, “무릇 《시경》과 《서경》이 간략하나 뜻이 깊은 것은 그 마음속의 뜻을 실현하고자 해서였다. 옛날에 서백은 유리에 갇힌 몸이 되어 《주역》을 풀이하셨고, 공자께서는 진과 채에서 고생하시고 《춘추》를 지으셨으며, 굴원은 추방당하고 나서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실명하고 나서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리고서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가 촉나라로 쫓겨나고서 《여씨춘추》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히고 나서 《세난》과 《고분》편을 지었다. 《시경》 삼백 편도 성현께서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 이러한 분들은 모두 마음에 울분이 쌓였으나 그의 도리를 표출해낼 수 없어서 지난 옛일들을 서술하여 후진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긁어왔습니다. ^^;;)

 

사마천은 이전의 성현들도 어려움을 겪은 뒤에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뚱아리가 쓸모없게 되어도 그걸 계기로 자신의 작업에 더 집중하겠다는 것이죠. 이러한 태도를 발분저서(發憤著書)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궁형을 당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마천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겠죠. 이런 마음으로 어떤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학자로서 훈련받았습니다. 20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인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전국을 돌아보고 오라고 합니다. 사마천은 2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자신의 저서에 집어넣습니다. 우쌤은 이때 사마천이 들은 대부분의 이야기의 출처는 하층민들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었던 사마천이 그 지방의 관리로부터 대접받았을리는 무방하고, 기껏해야 동네 노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게 다였겠죠. 근데 하층민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아주 고급진 정보라고 합니다. 사마천이 유방이 태어난 패현 땅에 갔을 때도, 그곳에는 여전히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창업자가 아니라 동네건달, 술주정뱅이의 이미지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 술주정뱅이가 황제가 될 줄 몰랐다.” 믿거나 말거나~) 자객열전 같은 이야기를 쓴 적은 없었고, 사마천 이후로도 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게 하층민들로부터 듣고 사마천이 정리한 대표적인 작품인 것 같습니다. 사마천 이후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속인들의 잡언(雜言)을 기록한 것에 대해서 분분합니다. 유지기 같은 사람은 이전의 기록을 많이 모으긴 했지만 당시의 잡언(雜言)까지 채록한 것과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대단한 텍스트일수록 극찬도 받지만 비판도 격하게 받는 것 같습니다.

사마천을 이야기할 때 한 무제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한 무제는 중국의 역대황제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주 걸출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54년 정도 재위에 머무르면서 수차례 흉노를 토벌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등 아주 굵직한 업적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흉노를 완전히 토벌하지 못한 것은 당시 흉노의 지도자 역시 매우 걸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크~ 왠지 하늘이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았다는 얘기가 떠오르네요. 어쨌든 사마천은 한 무제를 미워하면서도 좋아합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무제가 자신을 궁형시켰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한 무제가 걸출하기 때문입니다. 한 무제 때 사마천을 포함해서 정말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재들 모두 한 무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정도로 매우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고 합니다. 궁형을 받은 뒤에도 사마천은 임금에게 직접 아뢰는 중서알자령이 되고, 한 무제가 후궁들과 노는 곳에 드나들 정도의 최측근이 됩니다. 물론 황제의 여자들이 있는 곳에 다닐 수 있는 것은 환관만 가능합니다........ ㅠㅜ 궁형을 받았지만 또한 자신을 불러서 최측근으로 부리는 군주를 어떤 마음으로 봤을지 도저히 상상이 안갑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뒤에 외출을 삼가고 거의 모든 관계를 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임금이 부른다고 다시 가는 마음은 뭘까요?

우쌤은 《사기》를 부추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무리 강의를 하면서 뜯어 먹었는데도 여전히 다 뜯어먹지 못했고, 앞으로도 다 뜯어먹지 못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ㅋㅋ 《사기》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사기》를 반고의 《한서》와 같이 다른 텍스트와 묶어서 읽는 것입니다. 잠시 딴 이야기로 새보자면, 《사기》와 《한서》를 같이 묶어서 흔히 사(史)·한(漢)이라고 합니다. 반고의 《한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많이 비교됩니다. 당나라 한유 이전까지만 해도 반고의 《한서》에 대한 평가가 우세한데, 그 이후에는 사마천의 《사기》가 더 높이 평가됐다고 합니다. 우쌤은 이를 시대적인 맥락에서 풀어주셨는데, 당나라에서 《한서》가 더 높게 평가된 것은 그때 텍스트를 귀족계층이 많이 읽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서》의 깔끔한 문장과 이야기가 귀족들의 정서와 잘 맞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당나라 한유부터 점점 《사기》가 높게 평가되고 송나라에 이르러 아예 다르게 평가가 된 것은 주로 선비계층이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의 정초, 주희, 사마광 같은 사람들은 뭔가 울분이 맺혀있었고 딱 사마천의 발분저서와 맥이 통했다는 것이죠.

돌아와서, 《사기》를 읽는 또 다른 방법은 내부의 여러 편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무제 본기는 일부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것은 온통 제사에 대한 얘기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한 무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야기들 곳곳에 한 무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 텍스트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으며 읽는 것을 호견(互見)이라고 합니다. 우쌤의 표현을 빌리자면 cross-checking이죠. ㅎ 그래서 한 무제라는 인물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본기 말고도 외척열전, 흉노,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위장군표기열전을 같이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밖으로도 cross-checking, 안으로도 cross-checking하니까 부추밭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

 

다음 시간에는 《전국책》 읽습니다. 한 글자도 들여다보지 않은 책들이 이리도 재밌는 건 우쌤 강의도 재밌고, 텍스트도 재밌기 때문이겠죠? 언젠가 읽을 날을 기다리면서 이번에도 두근두근 수요일을 기대해봅니다. 그럼 수요일에 봬요~!
전체 2

  • 2017-08-14 16:50
    규문의 부추밭 프로젝트! 머지 않아 시작합니다. 개봉박두!!^^

  • 2017-08-14 16:58
    사마천 하면 떠오르는 곶...ㅋㅋㅋㅋㅋㅋㅋ 사마천이 궁형을 받아서 주변환경이 정리되고 역사 연구에 최적화 되었다는 게 재밌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