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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노자 하상공주 38장 ~ 47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9-05 15:30
조회
132
평소에도 해석을 명확히 하기 위해 비교했는데, 이번엔 더 많이 왔다갔다한 것 같습니다. 어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복습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읽으니까 재미도 있네요. (머리는 빠개지지만요!) 만약 외운다면 왕필과 하상공을 같이 외워야겠습니다.

 

38. 論德(논덕)

 

上德不德, 是以有德 ;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 前識者, 道之華而愚之始.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태고시대 이름과 호칭이 없는 군주는 덕으로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온전히 다스려진다. 이름과 호칭이 있는 군주는 덕을 잃지 않으려 해서, 이 때문에 덕이 없다. [상덕의 군주]는 무위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하는 것이 없고, [하덕의 군주]는 교령(交靈)을 베풀어서 자신의 이름과 호칭을 취하려 한다. ()을 행하는 군주는 행하는 바는 있지만 강요하는 건 없고, ()를 행하는 군주는 법으로써 의()를 실천해서 의도하는 바가 있다. ()가 높은 군주는 예()를 행하지만 아무도 따라가지 않으니, 상하가 팔을 걷어붙이고 다툰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고, 인을 잃은 후에 의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있게 된다. 무릇 예란 충()과 신()을 얇게 하는 것이고 혼란의 시작이다. 잘난 척 하는 사람은 도의 실질을 잃고 거짓을 얻을 뿐이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얻은 군주는 돈박(敦朴)함에 머무르지 박()에 머무르지 않고, ()과 신()에 머무르지 화려한 말을 숭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려함을 버리고 질박함을 취한다.

38장의 제목은 그대로 ‘덕에 대해 논하다’입니다. 왕필은 이 장을 도와 덕, 인, 의, 예의 관계로 풀었지만, 하상공은 이러한 가치들을 가진 사람들로 풀었습니다. 글자는 같은데 뜻이 확 달라질 수 있는 게 한문의 재밌는 점인 것 같습니다.

상덕(上德)은 군주라는 이름도 없는 태고시대의 군주를 말합니다. 이 군주는 덕으로 백성을 가르치지 않는데, 이때 부덕(不德)은 자신의 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덕(下德)의 군주는 덕을 잃지 않으려는 군주인데, 자신의 덕을 드러내는 군주를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이러한 군주의 정치를 교령(敎令)이라고 합니다. 왕필이 위지(爲之)를 유위(有爲)로 풀었지만, 하상공은 그보다 더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우쌤은 이 장에서 도와 덕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깔끔하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뉘앙스에 따르면, 상덕(上德)이 곧 도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도를 잃고 난 뒤에 덕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 괴리를 하상공을 몇 번 읽으면 알게 될까요?

전식자(前識子)를 그대로 풀면 ‘미리 아는 사람’인데, 스스로 그렇다고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잘난 척하는 사람’입니다.

화(華)는 ‘화려함’, ‘꽃’이지만 다르게 보면 그건 가장 나중에 오는 것, 끝에 달려있는 말(末)이기도 합니다. 우쌤은 화(華)가 말(末), 위(僞), ‘지엽적이다’가 다 통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장부(大丈夫)는 도를 얻은 군주를 말하는데, 그가 머무는 두터운 곳을 주석에서는 돈박(敦朴)이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돈박(敦朴)이 실(實), 박(朴=樸), 본(本)과 통한다고 하셨습니다.

39. 法本(법본)

 

昔之得一者 :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天下爲正. 其致之, 一也. 天無以淸將恐裂, 地無以寧將恐發, 神無以靈將恐歇, 谷無以盈將恐竭, 萬物無以生將恐滅, 侯王無以貴高將恐蹶. 故貴必以賤爲本, 高必以下爲基. 是以侯王自稱孤, , 不轂.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車無車. 不欲琭琭如玉, 落如落石.

 

옛날에 일()이 생겨났다. 하늘은 을 얻어서 맑아졌고, 땅은 을 얻어서 안정됐고, ()을 얻어서 영험하게 됐고, 계곡은 을 얻어서 가득 차게 됐고, 만물은 을 얻어서 생성됐고, 제후와 왕은 을 얻어서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걸 경계한다. 하늘이 맑지만 않는 것은 장차 갈라짐을 두려워해서이고, 땅이 안정되지만 않는 것은 장차 요동치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이 영험하지만 않는 것은 장차 비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계곡이 가득 차지만 않는 것은 장차 마르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만물이 살기만 하지 않는 것은 멸망(滅亡)할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제후와 왕이 귀하고 높은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은 장차 넘어져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므로 귀함은 반드시 천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높은 건 반드시 그 낮음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와 왕은 스스로 고(), (), 불곡(不轂)이라 칭했다. 이것이 천함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수레에 나아가 일일이 세면 [수레부품만 있을 뿐] 수레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옥처럼 귀하게 여겨지는 것도, 돌처럼 천하게 여겨지는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39장의 제목은 ‘근본을 법으로 삼다’입니다. 우쌤은 하상공만의 특징인 각 장의 제목이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죽간을 구별해주는 찌의 기능을 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 똑같이 둘둘 말려있으면 모르니까 그 장을 설명하는 제목을 찌로 달았다는 것이죠.

일(一)에 대해서 하상공은 무위(無爲)와 도의 자식이라고 풀었습니다. 우쌤은 일(一)은 도의 운동, 생성하는 에너지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신(神)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능히 변화하지만 일정한 형태가 없다.”고 했습니다.

치(致)는 경계할 계(誡)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6개의 구절은 음과 양, 두 개의 측면을 모두 가져가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孤)는 ‘외롭다’, 과(寡)는 ‘부족하다’를 뜻합니다. 곡(轂)은 왕필본과 달리 ‘수레바퀴’입니다. 11장의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인다는 것과 참고하면, 백성들이 자신이라는 바퀴통으로 모여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 불곡(不轂)입니다. 근데 우쌤은 선(善)과 통한다는 점에서 왕필본에 있는 곡식 곡(穀)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數 이 글자는 왕필본에서는 자주 삭(數)으로 읽었지만 하상공본에서는 계산할 수(數)로 읽습니다.

왕필본에서는 불욕(不欲)이 걸리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지만, 하상공은 명확하게 석(石)까지 걸었습니다. 록록(琭琭)은 ‘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얼마 없는 것’, ‘귀중한 것’이란 뜻입니다. 왕필본과 달리 락락(珞珞)을 쓰지 않고 락락(落落)을 썼습니다. 왕필본에서는 옥과 반대되는 의미의 돌이었다면, 여기서는 적은 것의 반대되는 나뭇잎이 떨어지듯 많은 것이란 의미의 돌입니다. 귀한 것, 흔한 것 둘 다가 아닌 중(中)에 처하는 것이 하상공의 해석입니다.

 

40. 去用(거용)

 

反者, 道之動 ;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도의 쓰임이다. 천하만물은 형체와 위치가 있으므로 유에서 태어났고, 무는 유에서 태어났다.

 

40장의 제목은 ‘쓰임에서 떠나라’입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붙였는지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하상공을 공부한 학자들도 하상공본의 모든 제목의 의미를 꿰뚫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상공은 반(反)을 본(本)으로 풀었습니다.

유(柔)와 약(弱)은 도가 항상 쓰는 것입니다.

 

41. 同異(동리)

 

上士聞道, 勤而行之 ; 中士聞道, 若存若亡 ; 下士聞道, 大笑之 ;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類,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夫唯道, 善貸且成.

 

상사(上士)가 도를 들으면 스스로 힘써서 노력하고, 중사(中士)는 도를 들으면 보존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고, 하사(下士)는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며 도라고 하기에 부족한다. 그러므로 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해본다.

밝은 도를 지닌 사람은 어두운 것 같고,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마치 물러나 미치지 못하는 것 같고, 넓은 도를 지닌 사람은 자신을 특별하다 여기지 않아 여러 사람과 함께 하고, 상덕을 지닌 사람은 계곡처럼 국가의 탁하고 치욕을 감당한다. 크게 깨끗한 사람은 탁하고 욕된 것 같아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넓은 덕을 가진 사람은 부족한 듯이 하며, 도와 덕에 뜻을 세운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질박한 사람은 이리저리 바뀌어 마치 카멜레온 같다. 크게 바른 사람은 모자거나 굽지 않고, 구정(九鼎)이나 호련(瑚璉) 같은 큰 그릇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고, 우레와 천둥 같은 큰 소리는 드물게 들리고, ()을 따르는 사람은 질박하여 특정한 성격이 없고, 도는 은밀하여 이름붙일 수 없다.

오직 도만이 사물에게 정기를 잘 빌려주고 성취하게 해준다.

 

41장의 제목은 ‘같음과 다름’인지, ‘다름을 같게 하라’인지 헷갈립니다. 일단은 ‘다름을 같게 하라’으로 읽지만 우쌤은 앞의 사(士) 얘기와 뒤의 얘기가 연결이 잘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상사(上士)는 도를 들으면 스스로 힘써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중사(中士)는 도를 듣고 자기 몸과 나라를 다스리다가도 갑자기 정욕(情欲)에 미혹되어 도를 잃어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쌤은 주석에 나오는 혹(或)이 미혹될 혹(惑)과 같은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건언(建言)은 설언(設言),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13개의 구절은 반대되는 가치를 같이 가져가는 도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夷)는 많은 경우 ‘평평하다’라는 의미에서 평(平)과 통합니다.

왕필본에서는 실매듭 뢰(纇)로 봤다면, 하상공본에서는 무리 류(類)를 썼습니다.

상덕(上德)은 도를 추구하는 군주로서 국가의 치욕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건덕(建德)은 도와 덕을 건설(建設)하는 것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투(偸)에 대해 왕필은 ‘짝하다’, 베필‘으로 봤지만 하상공은 자신의 내면을 비우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우쌤은 장자 인간세편의 길상(吉祥)이 머무는 허실상백(虛室生白)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질직약투(質直若渝)에서 직(直)은 진실될 진(眞)으로 보는 게 의미상 더 맞다고 하셨습니다. 투(渝)는 색이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카멜레온으로 설명해주신 게 기억에 남네요.

대기(大器)를 주석에서는 구정(九鼎)과 호련(瑚璉)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구정(九鼎)은 무왕이 주나라를 정벌하고 무기를 녹이고 만든 아홉 개의 솥단지로 천자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옥새가 천자를 상징하게 된 건 삼국지에서만 그렇다고 하네요. ㅎㅎ;; 호련(瑚璉)은 논어에도 나온 귀중한 제사용 그릇을 말합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대음(大音)은 뢰정(雷霆), 천둥소리입니다. 천둥이 드물게 나타나듯 기를 아끼고 말을 적게하는 것입니다.

선대차성(善貸且成)을 왕필은 무위(無爲)로 잘 베풀고, 완성시켜준다고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하상공은 도는 정기(精氣), 생명력을 빌려줘서 성취(成就)시켜준다고 했습니다.

 

42. 道化(도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 不轂,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음과 양을 낳으며, 음과 양은 화기(和氣), 청기(靑氣), 탁기(濁氣)를 낳는데 이들이 분화되어 하늘··인간이 되고, 하늘··인간이 함께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으로 향하며 만물 내면에 있는 원기(元氣)로써 조화롭고 부드럽게 한다.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오직 고(), (), 불곡(不轂)이지만 왕과 공은 자신의 칭호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물 중에는 덜어내려는 사람에게 더해지고, 더하려는 사람에게 더해진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가 있지만 나 또한 가르치는 바가 있다. 강한 사람은 제대로 죽지 못하니 나는 이로써 가르침의 출발로 삼을 것이다.

왕필은 42장의 도가 일을 낳고, 만물에 이르는 과정을 장자의 제물론으로 풀었습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도(道)가 있고, 그로부터 무(無)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무(無)에는 운동성이 있어서 그로부터 지칭할 수 있는 것, 유(有)가 나옵니다. 반면에 하상공은 일은 운동성이 있는 것으로 봤고, 이로부터 음(陰)과 양(陽)이 생기고, 음(陰)과 양(陽)으로부터 화기(和氣), 청기(靑氣), 탁기(濁氣)가 나온다고 해석했습니다. 청기(靑氣)는 맑고 가벼운 것으로 올라가 하늘을 이루고, 탁기(濁氣)는 무거운 것으로 내려가 땅을 이룹니다. 이 가운데에서 적절히 조화롭게 사는 것이 화기(和氣), 인간입니다. 전 왠지는 모르겠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있다는 걸 기운으로 푸는 이 부분이 감동스럽더군요.

충(沖)을 왕필은 비어있지만 꽉 찬 것으로 해석한 반면에 하상공은 원기(元氣), 앞서 말한 세 가지의 기운으로 풀었습니다.

인지소교, 아역교지(人之所敎, 我亦敎之.) 이 부분을 왕필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치겠다”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하상공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는 약함을 버리고 강함을 행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가르침은 강함을 버리고 약함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왕필은 교부(敎父)를 ‘가르침의 원칙’으로 풀었지만, 하상공은 ‘가르침의 시작’으로 풀었습니다.

43. 徧用(편용)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천하의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단단한 것을 뚫고, 알 수 없는 것이 틈 없는 것으로 들어가니, 나는 그렇기 때문에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말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 이러한 도를 능히 좇는 군주는 드물다.

 

43장의 제목은 ‘두루 쓰다’입니다.

왕필은 유(柔)가 견(堅)을 움직인다고 했지만, 하상공은 물처럼 부드러운 것이 돌처럼 단단한 것을 꿰뚫는다고 해석했습니다.

무유(無有)는 알 수 없는 것, 도를 말합니다.

왕필은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만들고 그 세계 속에서 이야기했다면, 하상공은 좋게 말하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나쁘게 말하면 통속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무위지유익(無爲之有益)에 대해 왕필은 유(柔)와 견(堅)의 관계로 풀었다면, 하상공은 말 그대로 무위(無爲)가 이익이 된다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근데 저는 하상공이 설명하는 기(氣), 정(精)과 신(神) 이런 통속적인 얘기가 더 쏙쏙 들어오네요. ㅋㅋㅋㅋ

주석에 “무위(無爲)로 몸을 다스리고 나라는 다스리는 것은 같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쌤은 이것이 하상공본 전반의 기본조건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하셨습니다.

 

44. 立戒(입계)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명예와 몸 중 무엇에 더 가까운가? 몸과 재화 중 무엇에 더 귀중한 것인가? 돈과 건강 중에 무엇에 더 심각한가? 여색과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반드시 크게 소모되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게 된다.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히 오래될 수 있다.

44장은 전반적으로 왕필의 해석과 비슷합니다. 다만 애(愛)에 대해서 왕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름’으로 풀었다면, 하상공은 색(色)과 재물에 깊이 빠지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그리되면 정(精)과 신(神)이 크게 소모된다고 합니다.

다장(多藏)에 대한 해석도 다릅니다. 왕필은 그냥 창고에 많이 쌓아두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하상공은 살아서 쌓는 것과 죽어서 무덤에 가져가는 것 둘 다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살아서 쌓는 것은 강도당할까 걱정하게 되고, 죽어서는 도굴당할까 걱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주석에서는 이를 굴총탐구(掘冢探柩), ‘무덤을 파고 시신을 더듬는다’라고 합니다.

 

45. 洪德(홍덕)

 

大成若缺, 其用不弊 ;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도와 덕을 크게 이룬 군주는 모자란 듯하지만 그 쓰임은 고갈되지 않는다. 도와 덕이 가득한 군주는 비어있는 것 같지만 그 쓰임은 무궁하다. 크게 곧은 사람은 굽은 듯하고, 큰 재주는 서투른 것 같고, 말 잘하는 사람은 어눌한 것 같다. 봄과 여름의 양기가 극에 이르면 추워지게 되고, 가을과 겨울의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따뜻해지니, 맑고 고요할 수 있으면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다.

 

45장의 제목은 ‘위대한 덕’입니다. 여기서 홍(洪)은 대(大)와 같은 의미입니다.

45장도 38장과 41장처럼 도와 덕을 가진 사람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충(沖)은 존귀해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부유해도 사치하지 않게 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우쌤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비어있기 때문이고, 꽉 차 있으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을 덧붙여주셨습니다.

대직(大直)은 도를 닦고 법을 본받아서 정직함으로 일관되게 유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대나무처럼 꼿꼿한 게 아니라 다투지 않고 부드럽게 해결해서 마치 굴(屈)한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정직함은 굽히지 않는 것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네요.

조승한, 정승열(躁勝寒, 靜勝熱)은 기(氣)에 대한 하상공의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일단 승(勝)은 다할 극(極)의 의미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봄과 여름의 양기가 다하면 겨울이 와서 초목의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사람 역시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6. 儉欲(검욕)

 

天下有道, 卻走馬以糞 ;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罪莫大於可欲,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 常足.

 

군주가 도가 있으면 말을 돌려보냄으로써 농사를 짓게 하고, 군주가 도가 없으면 전쟁용 말이 교외에서 태어난다. 여색에 빠지는 것보다 큰 죄는 없고,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것보다 큰 화는 없고, 탐욕을 부리는 것보다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참된 뿌리를 지켜야만 항상 욕심이 없다.

 

46장의 제목은 ‘욕망을 끊어라’입니다. 제목으로 검(儉)자가 많이 나오는데, 같이 있는 글자에 따라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각(却)은 ‘물리치다’의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돌려보내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죄막대어가욕(罪莫大於可欲) 이 부분은 왕필본에는 없습니다. 가욕(可欲)은 욕심내는 것으로 역시 여색에 빠지는 것입니다.

지족지족(知足之足)을 왕필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만족할 줄 아는 것으로 풀었지만, 하상공은 자신의 참된 뿌리는 지키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상족(常足)은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 안심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쌤은 ‘상족’의 상태가 절대로 풍족함과는 관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부귀(富貴)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극복할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47. 鑒遠(감원)

 

不出戶, 知天下 ; 不窺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들창으로 엿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은 적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움직이지 않고도 현명하고, 보지 않고도 그 이름을 알고,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만물이 스스로 이루어진다.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는 것은, 주석을 참고하면, 자신의 몸으로 타인의 몸을 알고, 자기 집안을 통해 남의 집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쌤은 이게 대학(大學)에서 얘기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의 확장과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47장은 동중서의 천인상감론과 통합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천도와 인도는 같은 것이니, 자연과 인간은 서로 통하고 정기는 서로 연결돼있다. 군주가 청정하면 하늘의 기운도 스스로 바르게 되고, 군주가 욕망이 많으면 하늘의 기운도 혼탁해진다. 모두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늘과 인간이 서로 통하듯, 지배자의 태도에 따라 백성들의 생활도 결정됩니다. 지배자가 무위(無爲)를 행하면 백성들도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쌤은 화취(化就)가 성(成)의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읽다보니까 확실히 저번 시간에 우쌤이 지적하신 백성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가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배자가 욕망에 미치면 같이 미쳐 날뛰는 게 백성이지만, 지배자가 욕망에 미치지 않아도 미쳐 날뛰는 게 백성이죠. 우쌤은 두태후 때 노자를 정치 교과서로 만들다가 하상공본이 나온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하상공이라고 해서 단순히 치신, 양생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계속 정치에 대한 얘기도 같이 가져갔죠. 지금 왕필을 본다면, 왕필의 얘기도 정치가 아닌 다른 얘기들이 더 잘 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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