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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함께 여름을~ 맺음&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8-08-27 00:18
조회
219
스피노자와 함께 여름을~

 

전례 없이 무더웠던 여름과 함께 스피노자와의 바캉스도 끝이 났군요~ 5주에 걸친 짧은 세미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참여한 세미나이기도하고, 아리송하지만 그래도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었구나라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피노자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스피노자에 대해 관심과 흥미가 생기는 것이 이 세미나의 목표라고 채운샘이 첫 시간부터 말하셨던 것처럼 함께 들으신 선생님들 모두에게 스피노자의 매력을 느끼셨던 기회가 되었을 거라 믿습니다!

 

완정함·불완전함 & 더 완전함·덜 완전함

공부를 함에 있어서 어떤 단어를 기존의 상식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걸림돌이 됩니다. 철학자들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단어가 사용되는 층위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피노자를 읽음에 있어서 완전, 불완전, 더 완전, 덜 완전의 개념은 자칫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스피노자는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불완전함은 언제나 완전한 것이 있다는 관념을 전제하고서만 성립합니다. 때문에 완전성은 늘 어떤 것을 결여로 느낄 때의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완전/불완전은 어떤 하나를 중심으로 놓지 않으면 성립될 수가 없는 관념입니다. 바로 이 논리를 깨려고 스피노자는 존재 자체의 완전함을 말합니다. 모든 걸 다 갖춘 것이라는 완전성에 대한 착각. 반대로 스피노자는 묻습니다. 모든 걸 다 갖춘 것은 자연 뿐인데 그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어떻게 불완전할 수가 있지? 개체 없이 자연을 생각 할 수 없고 자연 없이 개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부분과 전체 사이에 어떠한 간극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개체는 내재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덜/더 완전함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다른 층위입니다. 물론 모든 개체는 존재론적으로 어떠한 결여도 없다는 점에서 완전합니다. 하지만 개체의 역량의 차원에서는 신체의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관념을 형성한 채 그런 정서에 붙들려 살아가는 모습과, 비록 유한한 존재이지만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이해하고, 썩는 것이 있으면 자라는 것이 있다는 자연 전체의 법칙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 사이에는 적잖이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동일한 사건(병,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과, 정서, 행위가 다를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인식 역량, 실존 역량의 차이라고 하며 거기에서 더 완전하고 덜 완전함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더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앞에서의 목적론에서의 목적과는 결이 많이 다르지요. 그 척도가 외부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획일화 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실존을 부정하게 되는 귀결이 아니라, 자기 실존을 절절히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상상

스피노자는 인식의 단계를 말하면서 상상을 1종 인식으로 분류합니다. 상상(이미지)는 외부와의 마주침 속에서 내 신체에 남은 흔적입니다. 즉 상상은 외부적 대상을 통해 형성되는 때문에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부적합한 관념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스피노자의 동물우화>에서는 정서에 대한 치료제로서 이미지과의 동맹을 이야기 합니다. 자못 모순되어 보이는 지점이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네의 성당시리즈에서는 해의 각도와 시간에 따라 성당의 색이 매번 다르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여인의 얼굴이 앞에서 본 모습, 뒤에서, 옆, 위에서 본 모습들이 모두 겹쳐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본래 색은 없구나, 단지 매 순간의 조건 속에서 다른 것으로서 존재하는 변이 밖에 없구나라는 이해와, 어떤 사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형상이 되는 구나 하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즉 이미지는 단지 우리 감각에 남겨지는 흔적일 뿐이지만, 어떤 이미지는 우리의 부적합한 관념을 벗어나게 해주는, 우리의 존재조건의 한계성을 넘어가게 해주기도 합니다. 일차적인 단순한 인식일 뿐이지만, 그것의 어떤 마주침은 단편적 인식을 넘어 다른 차원의 이해를 선물해주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이미지, 예술이 가진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정서의 치료제로서의 이미지와의 동맹은 바로 이런 힘이겠지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둬두고 고정시키는 기호이지만, 어떤 언어는 그 고정성과 규정성을 일약 넘어가게 해줍니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 시적 언어가 그러하고, 경전, 문학과 같은 텍스트가 그러합니다. 언어를 사용해 언어의 한계를 넘어가고 상상을 이용해 상상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유한함이기에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한함으로부터 유한성을 넘어가 영원성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상 또한 역량이 될 수 있습니다.

 

통찰력

하지만 과연 상상을 역량으로 발휘하는 것이 쉬울까요? 우리는 보통 정서에의 예속을 벗어나는 치료제로서의 상상이 아닌 그 정서를 더 부추기는데 상상을 사용해 그것이 망상으로 이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미지와 동맹을 맺는 데에 있어서도, 텍스트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의 역량이 요구됩니다. 이 힘을 통찰력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정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정서를 파생시키지 않는 단계입니다. ‘나를 욕하고 미워해주는 사람 때문에 내가 오늘도 무사히 살고 있구나’라는 것을 어느 순간 사무치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모르지만, 이건 교환관계와 합리성의 사고방식이 익숙한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지요. 사실 논리와 이지의 관점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더 내밀히 이해해 갈 때 비로소 정서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단편적 관념들을 조금씩 조금씩 깨어가는 것, 매번 정서에 예속된 상태로만 살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화두로서 가까이 두고 살아간다면 저번에 겪었던 일을 보다 가볍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시대 철학자들은 공부한 것은 언제나 손아귀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조금씩 키워가며, 냉정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오래 걸리겠지만, 나의 무의식과 정서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정서와 이성의 일치를 이룰 수 있다면 그때야 말로 지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의식과 정서의 일치, 그것이 스피노자의 목표라고 합니다. 인식의 역량을 최대치까지 밀고 나가 일순간 도약, 보편적 필연성의 차원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을 향한 사랑,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는 나의 역량과 신의 역량 간의 동일시. 자연이란 전체에 나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에 스피노자는 나는 신처럼 사유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 것. 그렇기에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죽음도 있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나는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존재한다, 그것이 심지어 나에 파괴를 갖다 주더라도 내 삶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해 할 수 있는 경지. 스피노자는 이를 ‘인간이 인간에게 신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 전체가 나를 있게 함을 이해하는 것. 그게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때문에 살아있음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지복이며 생 자체가 감사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생은 죽음도 포함합니다.

 

정서의 모방과 국가

정서의 모방. 정서란 나 혼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코미디를 볼 때도 혼자서는 잘 웃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회사 사람들의 돈에 대한 욕망이 어느 순간 나의 욕망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축구를 보거나 할 때 함께 흥분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서는 타자를 매개로 증폭되거나 감소됩니다. 스피노자는 정서의 모방, 정서와 욕망의 비자발성에 주목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장에서, 어떤 관계 속에서 정서가 발생하고 추동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즉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는가와 직결됩니다.

욕망과 자연상태가 끝나고 이상으로 무장한 채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홉스와 달리 스피노자는 국가를 생각할 때 정서를 빼놓지 않습니다. 국가는 이성으로 무장한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연합체이기도 하지만, 이해관계와 욕망이라는 정서를 가진 사람들의 연합체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국가의 조건을 이성에서만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들로부터 끌어냅니다. 그 조건은 정서와 정념,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대중들은 이성으로 으쌰으쌰 나아가기도 하지만, 더빗 형제의 일화처럼, 자기의 이익을 반하는 독재자의 개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이성이나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정서의 문제가 공존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정서에 의해 추동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인간의 양가적인 속성을 스피노자는 꿰뚫어 봅니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동양의 ‘심복’ 개념과도 유사하게 연결 됩니다. 심복은 백성들을 마음으로 복종하게 하는, 교화시키는 것으로 짐 싸들고 찾아오게 하는 정치입니다. 국가에 대한 사고에 있어서, 국가니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 스피노자에게는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사회 조직을 구성할 때, 이성이 아니라 정서를 기반으로 해야한다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상 스피노자의 세계에 드디어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 (특히나 제가 그렇습니다만...) 지금까지 스피노자의 저작 한 권 제대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스피노자의 동물우화>라는 개론서를 하나 뗀 것이고 개념을 맛보기로 정리한 것일 뿐이지요! 어디 가서 스피노자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근질근질 하겠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하기엔 기초가 너무 부족합니다. (특히 제가) 그야말로 부적합한 관념일 것입니다. 강의 시간에 정리한 개념들을 찬찬히 되새겨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 단련의 과정이 필요하겠죠! 어찌되었든 한번 맺어진 인연, 어디서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니 그 관계를 더 핫하게 달궈갈 필요가 매우매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내년 1월에 본격 스피노자 프로그램이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무더웠던 여름, 스피노자 세미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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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8 15:31
    마지막 시간, 상상의 활용법과 정서에 대한 이야기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요. 스피노자 함께 해서 좋았어요! 다른 세미나에도 또 만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