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1031 예감 세미나 후기와 공지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5-10-26 15:02
조회
630
예감 두번째 시간에는 빌렘 플루서의 <피상성 예찬>을 읽었습니다. 읽긴 읽었는데 뭘 읽은건지 뒷머리를 긁적이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만, 네 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투하니 구멍이 숭숭 나있던 간격을 조금이나마 이어볼 수 있었습니다. 후기를 쓰려고하니 다시 구멍이 커지고 있지만요^^;

재미있게도 우리의 구멍 메우기 방식은 저자가 말하는 디지털 인간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디지털 인간은 ‘점들의 세계(입자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점과 점들 사이에는 간격(구멍)이 있고, 그 점과 점 사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종종 '공허와 반죽의 감정’을 느낍니다. (의식이 '선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보기에)새로운 세계의 범주들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이나 의식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점들 사이에서 어떤 실마리도 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손에 움켜쥐어지지도 않고, 한 줄로 꿰어지지 않는 지금의 시대는 아마 입자들이 끊임없이 반죽이 되고있는 시대일겁니다. 그래서 디지털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로운 코드의 사람들은 점의 세계를 틀 안에 넣어 파악하고 설명하려 하기보다 ‘센세이션'을 찾고, 진리를 발견하려 하기보다 '주위에서 난무하는 가능성' 사이를 배회합니다. 정보는 어디에든 손 닿을 곳에 있기 때문에 더이상 정보를 하나로 꿰거나 통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아니, 그 전에 점과 점을 정돈해주던 실마리(기준 혹은 진리)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한 줄로 정리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저번 시간에 읽은 <디지털 치매>의 저자가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특성을 ‘자기통제 능력의 퇴보'로 보았던 것에 비해, 빌렘 플루서는 이것을 '창조의 전환점'으로 본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창조의 전환점에 서있습니다. 기원전 6천년 경에 우가리트인이 그림으로 이루어진 쐐기문자를 창조한 것처럼, 디지털 인간은 이제 모니터 위에서 손가락 끝으로 창조합니다. 우리는 펜으로 꾹꾹 눌러쓰기보다 손 끝으로 톡톡 건드려 쓰고, 손으로 주물러 만들기보다 모니터 속에서 건진 입자들을 조합해 만듭니다. 디지털 인간은 이제  자신이 만지는 것을 믿지 않고, 자신이 보는 것을 믿지 않고, 자신이 든는 것을 믿지 않고, 자신의 손 끝으로 더듬어 찾아냅니다.

손에서 눈으로, 눈에서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손끝으로 옮겨가는 추상 능력은 점차 '실제적인 것을 생략하고 상상과 개념 속에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빌렘 플루서가 구분하는 추상 세계의 네 단계를 보고 있으면 추상 능력은 점차 우리의 신체를 떠나 가상의 공간에서 유영하는 듯 합니다.



입체

평면
손가락

손 끝

저자는 이러한 '추상 게임'이 실제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차라리 ‘춤’이라고 말합니다. 손에 움켜쥐려 하기보다, 차라리 점과 점 사이의 간격 위에서 춤을 추라는 것일까요? 어쨌든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조건이 역으로 창조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허무와 불안을 다른 가치로 재전환하는 발상이 아닌가 합니다. 주위에 난무하는 무수히 많은 입자들은 한 줄로 꿰어질 수 없는 혼돈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새로운 조합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인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피상성 예찬> 3장_새로운 매체 속의 그림을 읽고 나눠서 공통과제를 준비합니다.

2장은 구멍이 커서 다시 한 번 읽어오고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ㅎㅎ


- 공통과제 범위 -

◎ 크누 : 그림의 위상 / 새로운 매체 속의 그림 / 영화 생산과 영화 소비 / 묘사

◎ 이응 : 야성의 눈 / 텔레비전의 현상학을 위하여 / QUBE와 자유의 문제

◎ 혜원 : RTL plus 방송에서의 '토크쇼' / 텔레비전과 전철 'tele-'에 대하여 / 레바논과 비디오 / 민코프의 거울

◎ 덕순 : 비디오 탐구 / 기술적 형상 시대의 정치적인 것 / 그림 없는 이슬람


전체 3

  • 2015-10-26 15:17
    어훙~ 디지털을 두고 양극단을 짚어가는 게 꽤 흥미롭지요?^^ 이 팀은 반장만 잘하면 최강팀이 될 텐데... 책이 구멍이 아니라 반장이 구멍이야 반장이 ㅊㅊ 반장은 반장 노릇을 제대로 할 때까지 교체불가하다는 사실! 셈나 학인들께서 부디 보살심을 발휘하야, 못난 반장을 거듭나게 해주시길!

  • 2015-10-28 03:52
    깔끔한 후기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가 되네요! 다음 주에는 좀 더 성실히 준비해가겠습니다~!

  • 2015-10-30 15:11
    우왕 깔끔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ㅇ0ㅇ9 우리가 디지털치매 환자로 남을지, 아니면 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더듬거리며 다른 존재로 거듭날지 더 읽어봐야겠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