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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2-18 00:16
조회
187
171223 동사서독 공지

1. 장자의 언어

 

이번 시간에는 장자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희 조는 ‘도대체 치언(巵言)이란 무엇인가?’만 두고 계속해서 얘기했던 것 같은데, 기존의 문법을 뒤트는 방식의 말하기다, 정도에서 그쳤던 것 같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세 가지 말하기 방식 중에 치언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아리송하네요.

19세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말이 곧 로고스였습니다. 말을 잘 사용하면 그것은 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언어를 최대한 이성과 부합하게 할 것인가?를 질문했지, 언어 자체에 대한 의문은 19세기에 들어서 생겨납니다. 바로 ‘언어학’이 탄생하면서요. 언어학은 말의 순서를 분석하여 사유의 순서를 알아내는 문법 연구와 다릅니다. 언어 자체를 실체화하여 연구하는 것에는 이제 언어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는 인식이 들어가 있지요. 그리고 언어가 투명하지 않은 세계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이전까지는 언어가 곧 로고스였다면 문학의 탄생 이후 언어는 상징, 비유와 같은 불투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철학의 경우, 모든 것은 언어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가령 베르그손은 시간에 대한 고착된 이미지를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 찾아냅니다. ‘시간이 흐른다’라고 할 때, 이것은 사실 시간이 아닌 공간에 대한 사유를 하는 것이지요. 공간적 표상을 하기에 어제 없던 주름이 오늘 내 얼굴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과거는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이죠.

장자는 말에 대해 의심하지만 계속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장자는 도에 따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말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도에 대해 말을 할라 치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가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으므로 도를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선(禪)어록에서도 보이지요. ‘부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부처가 똥막대기다’라고 할 때, 잘 알아듣는다면 질문자는 부처를 말로 규정하려는 질문 자체를 의심하고 깨달음을 얻을 것이지만,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질문자는 계속해서 ‘똥막대기=부처’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상식으로 세계를 고정시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질문자의 전제를 깨 주는 것이 바로 선어록이죠. 그리고 <장자>도 세계란 규정할 수 없으며, 우리는 언어를 빌어 임시로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시험 삼아 말해보겠다’라고 합니다. 모든 언어는 그저 해보는 것, 시도하는 것이지 세계를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자연을 따르는 언어를 구사하고, 그것을 치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치언이란 일상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사실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주고받는 것인데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장자는 ‘일상의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요? 장자는 구리지언(丘里之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각각 다른 성씨가 모인 마을의 소문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함을 띠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소문이라는 것이, 분명 있는 듯 하지만 정작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그것의 추이만 감지할 수 있을 뿐. 치언은 그 추이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없다는 것을 포착한 말이랄까요?

2. 安命

 

<장자> [내편]은 전국시대 말기에, [외편]/[잡편]은 선진시대~한나라 초기에 성립된 것이라고 합니다만,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 여러 파편들을 모아 곽상이 편집한 버전이지요. 그래서 내편 내용이 외편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잡편을 보면 내편과 모순되고 어쩐지 유가나 도가에 가까워 보이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읽은 [양왕]편을 보아도, 우리가 생각하는 ‘장자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이 종종 보이지요. 특히 세속적인 것이 싫다고 죽는 사람들 이야기는 바로 <장자> 이야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을 문자 그대로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사라짐’에 초점을 맞춰보면 <장자>의 맥락을 아주 벗어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임금 자리를 준다는 말에 도망을 가든 죽든 결국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과는 맥이 통하는 이야기죠.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우리는 安命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뭔가를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떠나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힘든 결단임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건 외부의 구원, 혹은 자신이 세상을 구한다는 구세(救世)의 환상을 믿지도 않으며 거기에 휘둘리지도 않겠다는 결심임에 동시에 그 환상은 너무 쉽게 사람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 安命은 그 환상/외물에 따르느냐 마느냐의 선택지가 아닌, 다른 사유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고요.

 

 

다음 시간은 [도척] 편 읽어옵니다.

후기는 하동쌤

간식은 건화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7-12-18 14:07
    논어 “말은 뜻만 전하면 된다.”(子曰 辭達而已矣)(위령공 15:41) 공자나 장자도 언어를 뜻을 전하는 수단으로 본 것 같은데 한 사람은 명과 실을 일치하려고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명은 실재의 손님이라고 하였다(소요유). ~~~~생각 생각 생각
    <문장을 훔치다> 11.30. 한병철편이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 ... 정확한 촛점을 허용하지 않는 언어 ... 오늘날에는 소통 또한 매끄러워진다. .. 매끄러운 소통에는 타자와 낯선 자의 부정성이 일절 끼어들 수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