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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언, 양왕 편 후기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7-12-19 00:35
조회
163

인간의 언어만큼 인간의 인간됨을 말해주는 뭔가가 또 있을까요?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의식을 표현하고 사물을 재현하고, 나아가 그 언어에 바탕해 삶과 세계의 질서를 건립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향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채운샘께서는 서양 문명은 바로 이같은 욕구에 전적으로 부응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다시 말해 언어가 투명하게 대상 및 의식과 일치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로고스일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유지되어온 거라고 하시네요. 언어적인 논리나 이성적인 사고에 기반한 철학이나 정치, 법률 같은 영역이 발달한 걸 보면 확실히 그렇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네들은 ‘신’조차도 언어를 통해 명징하게 대상화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군요.


동양이라고 왜 언어에 대한 믿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서양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불교나 장자의 철학이라는 겁니다. 언어가 결코 세계 그 자체이거나 진리일 수 없다는 건데, 언어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의심이나 회의의 태도가, 서양에서는 19세기 철학이나 언어학, 그리고 (근대) 문학에 와서야 가능해지는데 반해, 동양에선 애초부터 문명의 베이스에 기본으로 깔려 있다는 게 참 재미있는 지점인 것 같네요. 결국은 이 세계의 존재나 운행방식을 바라보는 차이일텐데요, 동양에선 아무래도 생성과 변화를 중심에 놓고 사유하고, 인간의 관점이나 의식보다는 자연 전체의 질서를 우선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라는 게 분명히 지시할 수 있는 대상성이라는 걸 갖지 않는데, 언어 아닌 언어 할아비라도 그걸 무슨 재주로 붙잡아 둘 수 있냐는 거죠. 항상적으로 유행 작동하는 세계를 기껏해야 임시방편으로, 그것도 미끄러지는 방식으로만 담아낼 수 있는 게 언어라는 생각은, 많은 동양의 사유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같은 언어 철학을 전국 시대라는 미증유의 혼란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는 건 정말 장자의 특별함인 것 같습니다. 아다시피 그는 당시의 유가나 묵가들처럼 공동체의 질서나 윤리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당면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또 다른 목소리를 보태고 함께 얽혀 싸우는 방식을 택하지 않습니다. 대신, ‘제물론’을 비롯한 여러 텍스트들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주류적 사상의 언어들이 사용되는 방식이나 언어의 근본적인 토대나 존재방식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그같은 상황에서 얼핏 보기에 뜬구름 잡는 얘기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이야말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가장 래디컬한 비판이자 강력한 개입이 아닐 수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성찰없이 써대는 무수한 분별의 말들이 그 뜻과 무관하게 이 세계를 어떻게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고, 그 말싸움으로는 결코 세계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버려야 할 터에 언어 따위로 뭘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라고 말하는 듯하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장자가 언어를 부정했다고 볼 순 없을 겁니다. 그에게 언어는 자연의 질서에 온전히 부응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끊임없는 회의의 대상이긴 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렬히 그 많은 언어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으니까 뭐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세속의 삶과 언어를 부정하고서 성립하는 철학이란 어이에도 없을 테니까요. 대신 그는 이 말로 붙들 수 없는 세계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 다르게 말하기를 고민하고 시도하는데, 이게 ‘우언’, ‘중언’, ‘치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채운 샘께선, 규정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선 상식적이지 않은, 탈코드화된 언어들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데, 장자의 이 언어들이 보여주는 비유나 상징, 역설 등은 이런 요구에 부합하는 게 아니겠냐고 하셨지요. 그리고 또 생각해 보면, 장자 자신이 구사했다고 하는 이 언어들은 단순히 표현법의 차원으로 국한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귀속 환원되지 않는, 탈주체·탈중심의 언어라는 공통점을 갖는 것 같습니다. 발화자의 의도나 의지를 넘어서 매 순간의 상황과 새로운 만남 가운데서 다른 의미들을 생성해낼 수 있는 언어들이라는 것이지요. 이 중에서도, 우리가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치언’은 가장 도에 부합하는 언어로, 인간의 언어가 지향해야 할 최고치의 언어로 장자가 보고 있는 듯합니다. 스피노자에게 3종지가 있다면, 장자에겐 ‘치언’이 있다?! 그런데 이 자유인의 언어인 치언이 매일 나온다고 장자는 말하는데, 그건 어디에서 어떻게 나와 떠돌고 있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언어가 치언이라면, 당연히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아닐테고, 우리의 고정되고 분별된 의식 밑바닥에 잠재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까요?


굳이 초료샘 말이 아니라도, 늘 진부하고 상식적인 언어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삶이란 결국 통념과 관습에 매인 노예의 삶일 수밖에 없다는 것, 언어야 말로 세계 인식의 종국적인 귀결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뼈아프게 해보게 됩니다. 나의 언어는 얼마나 빈약하고 습관적이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없이 세상 속으로 내던져지는지. 채움샘께선, 장자의 언어관을 의지처 삼아서라도 우리는 언어에 대한 민감성을 갖고서 우리의 언어를 의심하고 또 의심해보라고(제발~~퉁쳐버리지 말고), 그래야만 뭔가를 새롭게 해석하는 힘이 나온다고 하셨으니, 함 해 보지요!!!


왠지 장자스럽지 못하고 이것저것 섞인 혼합물 같다는 인상이 강했던 ‘양왕’편이었지만, 역시 좋았습니다. 장자 같기도 해서 좋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서 좋았고~~~.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와 닿는 삶의 지혜나 통찰에 쉽게 이끌리는 저로선 새길 만한 멋진 구절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두어 구절만 인용해 볼게요. 장자의 생 철학의 깊이와 역사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글이라 생각해서요. 채운 샘께서 멋진 설명을 덧붙이셨는데 그거 없이도 확 육박해 오는 글이라 따로 정리는 안 하는 걸로~~^^.


옛날의 득도자는 곤궁하더라도 즐거워했으며 영달하더라도 또 즐거워했으니 그들이 즐거워한 것은 곤궁과 영달과 같은 것이 아니다. 도가 나에게 얻어지면 곧 窮이니 通이니 하는 것은 寒暑風雨와 같은 자연의 추이와 같은 정도의 일이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은자 허유는 영수의 북쪽에 숨어 살면서 즐거워하였으며, 주의 왕족 공백은 공수산 기슭에 숨어 지내면서 자득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양왕’ 14장.


그런데 지금 주나라는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보고서 갑자기 선정을 행하여 모략을 숭상하고 뇌물을 바치고, 군대를 믿고 무력으로 지키며, 희생을 갈라 그 피로 맹세하여 사람들이 신의를 지키도록 하며, 자기의 행동을 선전하여 민중을 기쁘게 하며,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정벌하여 이익을 요구하니, 이것은 난정을 미루어 폭정과 바꾸는 것일 뿐이다. -‘양왕’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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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20 10:26
    말싸움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ㅎㅎ 분별을 계속 하다보면 정말 세상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이 비대해지는 덧 같습니다. 장자의 말은 그런 분별을 다 덜어내고 보는 것일까요? 잠재태란 무엇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