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10월 10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10-06 16:12
조회
193
날이 점점 가을이 되고 있어요. 이러다 곧 겨울이 되겠죠. 겨울이 되면 또 봄이 될 테고 그때쯤이면 또 뭘 공부하고 있을까요? 그때도 문제의식 가지고 골을 싸맬 건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ㅎㅎ 참, 채운쌤이 에세이 제대로 완성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프로그램이 끝나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까지 계속 볼 수 있을까요? ㅋㅋㅋ 에세이도 최종적으로 잘 마무리될 테고, 더 오래 같이 공부할 테니 나름 해피엔딩이네요.

다음 주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숙제가 좀 많습니다.
  1.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9, 10장 읽기

  2. 이번에 나눠드린 논문 〈진실과 권력〉, 〈미셸 푸코에 있어서 역사·진실·픽션〉 2개 읽기

  3. 에세이 개요 써서 주말까지 올리기(늦어도 일요일까지!)

  4. 문제의식을 다듬어서 서론 쓰기


《철학 극장》도 가져오세요. 간식은 저와 호정쌤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이번 시간도 서로의 에세이 주제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많았죠. 사실 이번 시간에 완벽한 개요를 짜오라는 게 채운쌤의 요구사항이었지만, 제자들이란 존재는 항상 스승의 기대를 비트는 것을 목적으로 하죠! ㅎㅎ 그렇다 해도 이제 슬슬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만들어서 진행해야 하는데 제가 지금 쓰는 게 맞는 건지 도무지 확신이 서질 않아요. 서당개 몇 편 썼다고 금방 주제를 잡고 즐겁게 에세이를 쓸거란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동안 원고를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네요. 발로 썼었나... 크흡...! ㅠㅜ 나름대로 정리가 됐다고 생각하면서 서론을 쓰겠지만, 분명 어딘가 또 구멍이 있겠죠. 아낌없이 지적해주세요!

각자 에세이에 대해 코멘트가 길어진 탓에 강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죠. 이번 시간에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7, 8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채운쌤은 플로베르가 《부바르와 폐퀴셰》, 《성 앙투안의 유혹》을 통해 인간이 지식과 진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문제 삼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플로베르는 인간이 지식을 갈망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질문합니다. 그는 19세기 중~말에 살았던 사람으로 부르주아가 교양 차원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당시에 교양이란 모든 것에 대해 적정히 알고 얘기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알쓸신잡’ 같은 것도 부르주아적 교양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런 교양으로서의 지식은 어떤 특정한 상태, 의미를 내포하는 지식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플로베르는 그런 지식을 끝까지 추구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될지 두 개의 작품으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 작품은 《부바르와 폐퀴셰》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부바르’와 ‘페퀴셰’이고, 부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백과사전’입니다. 둘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음으로써 모든 지식을 섭렵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든 지식을 섭렵한 결과 그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어리석음에 도달합니다. 두 번째 작품은 《성 앙투안의 유혹》입니다. 이 책은 ‘사막의 안토니우스’, ‘은자 안토니우스’ 등으로 불리는 성 안토니우스가 사막을 순례했을 때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입니다. 작품에서 안토니우스는 극도의 고행과 기도를 하루도,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극단적 신실의 끝이 선사하는 것은 극도의 권태였습니다. 그리고 권태가 느껴지는 그때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악마가 등장합니다. 지식과 연결해서 얘기하면, 끝없이 지식을 추구한 결과 환영, 망상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죠.

푸코는 성 앙투안과 파우스트를 보여주면서 지식에 대한 갈망이 인간에게 내재된 본성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실에 가깝지만, 시대마다 지식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5, 6장만 봐도 진실은 일종의 시련과 시험의 형식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7, 8장을 보면 지식은 이전과 달리 보편적 정의와 관계를 맺습니다. 즉, 지식이 권력의 영역으로부터 정의의 영역으로 이동한 것이죠. 헤시오도스의 텍스트, 대표적으로 《일과 날》을 보면, 전통적 수장이자 심판하는 왕의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로 변하고 있는 게 나타납니다. 이는 지중해 동쪽의 유프랕스, 뤼디아, 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제국과 국가의 지식에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곳의 벽화를 보면 왕 옆에 항상 서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에 봉사하기 위한 관리, 서기, 회계원, 천문학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지식은 “모든 인간이 정의롭기 위해서, 저마다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지식”(164)입니다. 푸코는 지식이 관계 맺는 것이 바뀜을 역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처음부터 진리가 인식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인정받는 일련의 역사가 있었음을 밝힙니다.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읽을 수록 푸코가 정말 질문을 효과적(?)으로 던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그가 분석한 담론도 감히 따라할 수 없지만, 지식이 처음부터 어떤 상태로 주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각 시대 속에서 구체적으로 던지는 방식이 놀랍네요. 푸코처럼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동양 텍스트를 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또 푸코에게 반짝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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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9 11:05
    질문을 바꾸는 일의 어려움!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