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 절차탁마 10월 17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0-16 09:59
조회
174
공지가 매번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엔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푸코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인식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모델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에의 의지를 인식에 복종시키고 인식을 진리로 향하게 했죠. 이에 대해서 푸코는 인식과 진리의 고리를 끊어낸 니체의 사유를 빌려와 지식, 인식, 진리란 하나의 환영이며 놀이의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식이란 발명된 것이고, 진리는 그보다도 더 나중에 발명된 것이라는 생각. 진리를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산출된 것으로 보는 관점 속에서, ‘전제된 진리·선험적 인식 주체’로 귀결되지 않는 인식의 의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해진 것을 사건(기념비)화해야 한다고 말할 때, 푸코가 시도하는 것도 주체와 진리로 귀결되지 않는 지식에의 의지를 사유하는 일이겠죠.

너무 거칠지만 이것이 우리가 《지식의 고고학》과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배운 인식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세이에 이런 관점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푸코와 니체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푸코적이고 니체적인 방식으로 사유를 구성하는 것은 더더더욱 어렵네요. 새삼 지금까지 쓴 에세이들이 왜 그토록 공허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읽든 문제화의 방법을 빌려오기보다는 뻔한 답으로만 텍스트를 가져왔던 것이죠. 채운샘께서는 우리 사회의 언표들을 분석해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표의 장 안에서 ‘옳다/그르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이러한 장 안에서 옳고 그름이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왜 이것은 이것이 아닌 것이 아닌지’를 질문하는 일.

정말로 문서를 기념비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연애’라는 추상적 대상을 그냥 전제해버리고, 그로부터 연애가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를 무턱대고 진단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구성되지 않고 자꾸 그 주변만 맴돌게 되었고, 지금도 맴돌고 있는 거겠죠... 채운샘께서는 특정한 문제에 이웃한 단어들이나 담론들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대상도 개념도 문제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은 독특한 이웃관계들, 계열들 속에서 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구성한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가 사회 속에서 담론화되는 독특한 방식을 살펴보고 그러한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기를 시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담론들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그러한 담론적-비담론적 실천들의 효과로서 나(주체)는 어떻게 출현하고 있는지. 제 느낌으로 이를 살펴보는 일은 문제를 단순화하고, 대상화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힘든 거겠죠...

이번 주에는 〈니체에 관한 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니체는 인식이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인식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전제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실체화하고 이들의 관계를 보장하는 초월자로서의 신을 요청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식을 인간의 본성에 새겨 넣음으로써 전도된 인식의 메커니즘을 은폐하는 것이죠. 니체는 이러한 전제를 부정합니다. 니체는 인식이 인식과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힘들이 문제가 되는 게임의 공간 속에서 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성은 진리를 향한 인식이 아닌 다양한 본능들에 봉사한다는 것. 인식 뒤에는 비인식이 있으며 이것들이 인식을 출현시킨다는 것.

인식은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식되기를 기다리는 대상과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정되어 있는 외부 세계와 관계하는 중립적 인식을 상상합니다. 인식을 주체와 대상의 실체화된 관계 속에 가둠으로써 다른 모든 힘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죠. 그러나 인지과학자들에 따르면 인식과 외부세계와 행위는 항상 동시적으로 구성됩니다. 박테리아는 번식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에 대한 중립적 인식으로부터 행위를 사후적으로 구성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게 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생명의 작용과 더불어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이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의 활동 속에서 박테리아의 실천 인지가 구성되는 만큼이 박테리아의 세계인 것이겠죠. 인식은 늘 실천과 더불어 구성됩니다. 때문에 실험하는 자만이 다르게 인식할 수 있고, 인식의 균열을 겪고 있는 자만이 다른 행위들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에세이에 대한 교훈(?)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제까지 해오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이 깨지는 경험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11, 12강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에세이는 각자의 진행과정에 따라서 써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봉선샘과 윤순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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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16 10:13
    실천하는 자만이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 이 한 문장을 마음에 담고 한 걸음을 내딛기. 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