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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노자 (도의 논쟁자들) 09.24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09-28 13:27
조회
746
안녕하세요. 건빵 윤몽입니다. 이번 주엔 유난히 바쁜 건화의 짐을 덜어주고자 반강제적(?)으로 도움(건화야, 후기 중에 하나를 도와줄까?)을 제안했는데, 웬걸요. 동사서독 후기 밖에 없다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요즘 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 수업, 특히나 더 어려웠던 이번 주의 수업에서 앤거스 그레이엄은 재미가 있으면서도 그 재미보다 힘든 게 훨씬 컸는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를 해볼게요.

 

먼저 망명길에 오른 브레히트가 노자에 대해 쓴 시를 읽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죠. 무도한 세상에서 패배감을 지닌 채로 망명길에 오른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대와 지역에서 엄청나게 먼 곳에서 자신의 처지와 겹쳐있다고 여겼던 노자를 떠올립니다. 서양인이 그 옛날, 그 멀리의 동양인을 떠올린 것이 재미있죠. 그레이엄의 표현대로 노자는 소인들의 생존전략을 남긴 사람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 노자는 무도한 시대에 빈자(세리 같은)들을 위한, 약한 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를 남긴 자였죠. 그는 이 시에서 현인 자체보다 현인인 노자에게 겸손하게 배움을 청한 세리의 자세를 언급합니다. 민중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브레히트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지혜가 있더라도 그것은 저절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민중이 지혜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혜는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지혜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 가난하고 못 배운 세리가 있었기에 진리가 전해질 수 있었다고 본 겁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 서양 철학은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등의 자연철학적 질문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인간 중심의 질문으로 바뀌게 돼요. 이 때 민주정치가 발전하고 잦은 전쟁이 일어나면서 자기 실존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가 생겨났다죠. 철학은 행복하고 너무 좋으면 발전하지 않아요. 고민할 게 생기니 일어납니다. 이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시대처럼 동양의 전국시대(공자, 노자, 장자, 법가의 시대) 역시 실존이 위협 당하던 시대였어요. 공자의 표현대로 백성들이 손발을 어디다 둘지 몰랐던 시대죠.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시대에서 문자(지식)를 소유한 지식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들은 이전의 역사 속에서 한때 도가 있었던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알게 되죠. 기존의 하늘과 인간이 연결되고 통치질서가 잘 꾸려지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그 질서가 흔들리고 통치자의 권력이 의심받는 시대가 왔다는 것. 과거에 하늘이 인격적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내려준다는 걸 믿었다면 이젠(공자의 시대엔) 지식인 계급이 확장되고 문자와 지식을 통해 사유를 하는 사들이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거죠. 요 시기와 비슷한 분위기의 서양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보편적 가치를 의심하던 사람들인 ‘소피스트’들이 나타나는데, 소크라테스도 그 중의 하나였대요. 제우스(하늘)의 정의가 인간 시대에 적용되고 그 질서를 아는 영웅에 의해 세계가 지배되던 시대가 서사시의 시대였다면, 이제 그 제우스의 정의가 의심되고, 인간사회의 법과 전통적인 제우스의 정의가 충돌하는 비극의 시대가 온 거죠. 소피스트들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된다고 믿었던 제우스의 정의가 더 이상 인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 인간이 계속 현실 속에서 패배하고 쓰러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보편적 제우스의 정의를 지키려는 안티고네는 현실법의 논리를 적용하려는 당시의 왕과 투쟁하여 패배하는데, 이건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충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제우스의 정의를 어떻게 개인의 실존으로부터 실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다른 소피스트들과 노선을 달리합니다. 그는 후에 당시 사람들처럼 미신화된 신이 아니라 내면의 신, 신성, 잘 존재하는 것, 웰빙(eudaimonia)을 믿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요. 그는 아테네의 질서를 회복하려면 우리 안에서 신성(잘 존재함)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바로 내적인 완성이 잘 존재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이와 비슷한 분위기로 동양에서는 공자가 고대질서 - 주공의 시대-의 회복을 얘기하고요.) 그는 “너의 존재와 상관없는 것에 왜 신경을 쓰고 사느냐”, “부와 명예와 외모 같은 것들이 어떻게 너의 존재를 구원할 수 있는가”의 질문을 했다고 하는데, 이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절실한 질문들이죠.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질문들을 던지면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왜 외적인 가치에 휘둘리는가. 무언가가 있고 없고에 영향 받지 않고 자기 안의 신성과 대화하는 것, 그것이 소크라테스를 덕이 있는 인간으로 칭송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던 플라톤이 얘기한 철인통치(35년의 철학 교육을 통해 통치자가 될 자격을 얻은 자가 다스리는)는 공자가 꿈꿨던 군자의 정치, 즉 자연의 질서인 천명에 따라 완벽한 도덕적 완성체로서의 군자가 통치하는 세상과 비슷하죠. 그 이후에 등장한 디오게네스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자로, 아무것도(가족도, 집도) 소유하지 않고 노숙하며, 권력자에 아부하지 않고 본성에 거릴 것 없이 살면서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맞장(!)을 떴을 때 멋있게 그를 이기는 것으로 많이 등장해요. 그의 삶의 방식은 장자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죠.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장자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공자의 모습을 생각해 봐도 더 자유로운 삶에 대한 선호랄까, 그런 게 있죠. 물론 유가적 자유, 노장적 자유, 불가적 자유 등 우린 다양한 자유를 구성할 수 있겠지만요. 아무튼 전 소크라테스, 플라톤, 디오게네스로 이어지는 서양의 철학적 흐름이 너무도 멀리 떨어진 동양에서의 공자, 맹자, 장자로 이어지는 흐름과 비슷하게 맞물려 있는 점이 무척 신기했어요.

잘 산다는 건 뭘까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이 질문에 대답으로 채운샘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를 말씀하셨어요. 성인들의 공통점이라면 항상된 삶을 산 것이었죠. 논어나 장자에 많이 등장하는 편안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하는 것들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되는 것을 편안하지 않은 것, 불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산만한 것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저로서는 요 부분에서 엄청 마음이 불편해졌어요). 편안하고 항상되고 떳떳한 것은 외적 가치가 자신을 흔들게 놔두지 않는 것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지는 걸 감당하지 못해요. 가난만이 아니라 부유함도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상황이 어떻든 그것과 무관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성인이죠. 성인은 자신의 상황을 완벽히 이해한 자(그레이엄)예요. 상황은 때이자 시(時: 하늘日와 땅土사이의 마디寸, 우주안의 자신의 실존, 자신의 상황)이죠. 우주 안의 자기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시중)이며 동시에 존재 자체가 자연인 것, 무엇을 해도 떳떳할 수 있는 것, 잘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여기서 노자나 장자사상이 자연처럼 살라는 것은 나무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전 이게 좀 좋았어요. 인간은 의식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겨나지만 그것과 동시에 또 나무의 삶을 벗어나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죠. 우리가 나무보다 존재론적으로 나무보다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인간은 자유를 말할 수 있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린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나무처럼 되는 거, 나무와 다를 바가 없어지는 거예요. 각자의 수준이나 나이와 상황에 맞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존재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고민하라고 채운샘이 말씀하셨죠. 혼자 공부하지 않고 이렇게 모이는 건 나의 잘 존재함이 서로의 잘 존재함에 시너지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하셨고요.

 

이미 말이 많았기 때문에 이제 그레이엄의 책 얘기로 넘어가면요.

 

공자의 ()은 귀족적이고 숭고한 것, 외적인 것에 대한 전면적 열려있음, 기운이 통하는 것의 문제예요. 자연과 때를 완벽히 이해한 성인이 자연의 질서에 거스름이 없는 것, 이것을 인하다고 할 수 있죠. 또, 공자에게 예(禮)라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적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더 이상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초점이 인간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었고요. 또한 시중의 상황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부터 어떤 행동이 나올 때 그것은 의식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 즉 서양에서 오랫동안 당위, 선택과 책임, 논리의 문제였던 것들이 유가에선 자연스런 호오와 관련된 것으로 달라진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서양에서는 스피노자에 이르러서야 이성과 감정의 대비라는 구도를 벗어났지만, 동양의 유가는 애초부터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조절하는 문제이자 호오의 문제라고 말한 거예요. 그러니 공자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지 않고 그것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이죠. 동양에선 모든 것이 정(情)의 문제와 연결된다고까지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감정(이모션)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마음, 정황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어요. 그러니 정을 파악한다는 말은 전체적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이 되고요.

언어의 기표와 기의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요. 어떤 언어가 의미하는 바(기의)가 따로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바(기표)가 따로 있어서 두 가지가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 서양적 관점이라면, 동양은 말과 행동을 하나라고 얘기하고 말에 의해 인격이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이분적인 구분을 무화시키는 점이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수행적 발언이라고 그레이엄이 표현한 이 말은, 어떤 것을 말할 때 이미 그 안에 그 사람이 모든 것(그의 인격, 상황파악력, 정서 등)이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동양적 사고를 설명한 것이었는데요. 유학은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그 말을 파악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누군가가 정의를 떠든다면 그 말하는 자의 일상적 삶과 인격에 의해 그의 정의에 대한 말이 규정되는 것이지, 그라는 인간과 상관없이 정의라는 말의 뜻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단 얘기죠. 그러니 공자는 효와 인 등의 개념을 설명할 때 상대에 따라 매번 다른 정의를 내리며 설명하죠. 즉 지금의 너에겐 이것이 인이다, 하는 식으로요. 이것이 또 정명이라는 말과도 연관돼요.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자가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된다는 거요. 아무튼 공자에겐 삶이란 선택과 책임과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좋아하는 바를 따르면 그것이 자연스레 자신의 행위를 촉발시키고 그에 맞는 말을 하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는 것과 관련된 것이죠. 여기서도 채운샘은 마음이 가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와 같은 얘길 하시며 공부에 마음이 가느냐고 물으시고, 마음이 가지 않으면 공부하지 말라고 너무도 말하고 싶지만 차마 이렇게 말하기는 힘들다며 괴로워하셨어요.

 

노자에 대한 수업인데 막상 노자에 대한 얘기를 하나도 안하고 후기를 맺으려니 어딘가 찝찝하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딱 한 가지만 얘기하면 규정성, 언표불가능성에 대한 얘긴데요. 도가 언표불가능하다는 건 도가 너무 위대하고 초월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다는 말에 가깝다는 거예요. 언어는 규정을 기능으로 삼지만 무언가를 규정하는 순간 실체를 놓치는 것이 한계이죠. 도를 불가피하게 언어로 표현은 하지만 언어로 표현한 것이 도 자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언어가 가진 규정성은 우릴 속박할 수 있어요. 그래서 위대한 철학은 모두 언어를 의심한대요. 노자는 이렇게 이름에 의해 사물이 구별되고 규정되기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무이고 도이고 허이고 박이 되는 거죠. 노자는 무욕을 말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욕망을 가지라고 했어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최소의 것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도 누릴 수 있는 기쁨 같은 것이요.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규정적인 의미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사랑과 연애에 대한 규정이 있으니 애인을 가지기를 욕망하는 것처럼요. 그렇다는 말은 규정력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결여를 만들어낸다는 얘기도 돼요. 그래서 기본적인 사유의 패턴을 바꾸기 위해서 핵심적인 건 언어에, 언어가 가지는 규정성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요. 이른바 ‘규정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우린 욕망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규정된 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고요. 규정된 것을 욕망하지 않으면 결여가 없고, 그러면 존재의 본성대로, 지금 있는 것으로 자기 삶을 꾸리며 살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고 샘은 질문하셨죠. 그것을 그러니까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묻는 노자의 질문인 것이고요. 언어의 규정성, 속박을 벗어난 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일 테고요. 그건 본문을 보면서 차차 배울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이번 주는 안타깝게도 텍스트를 전부 다 읽어온 사람들이 극히 드문 관계로 채운샘의 한탄 섞인 꾸중을 거의 모두가 들었습니다. 이번 주처럼 텍스트가 잘 안 읽힐 수도 있으므로 시간이 많이 들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준비해야겠습니다. 이번 과제는 제본했던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의 해제부분(본문 들어가기 전이니까 1부를 말씀하신 것 같은데..), 나눠드린 프린트물 읽고 공통과제를 쓰는 것입니다. 채운샘께서 공통과제는 요약방식으로 사실을 단순나열하지 말고, 작은 것이어도 글을 읽으며 생각이 전환된 점을 쓰라고 당부하셨어요.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야 생각이 하나라도 남는다고요. 생각이 남지 않으면 영혼이 없다는 거라고요. 소박하게라도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하고, 기존의 자기 생각도 뒤집는 기회로 삼을 것. 요것이 과제입니다. 최선을 다해봅시다.

 

발제는 없고요. 간식은 양언니와 접니다. 혹시 뭐 잘못된 공지 있거나 추가 사항이 있으면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모두 댓글도 함께 꼼꼼히 읽어주세용. 그럼 모두 토요일에 만나요.
전체 5

  • 2016-09-28 20:16
    오호..강의를 다시 듣는듯한 생생한 후기이네요. 감사합니다 ^.^

  • 2016-09-28 20:39
    쵸코파이 "정"이 그냥 한자가 아니었네요, "전제척 상황을 파악한다는"의미도 있었네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동양의 유가사상"욕망을 조절하는 문제이자 호우의 문제" 낯설지만 받아들이고 싶어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2016-09-30 00:40
    제가 누나를 후기 노동자로 만들어 버렸네요... (죄송) 어렵다고 불평하셨지만 역시나 꼼꼼하고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근쌤 호우의 문제...ㅋㅋㅋ절묘한 오타네요.

  • 2016-09-30 13:38
    이제 보니 건빵 윤몽.. 건빵이 호같이 보이넹. 당근샘은 얼른 주역신청하시길.. 양언니는 은근 싸이트 열심히 오시는듯.. 매우 바람직하여요.

    • 2016-09-30 15:49
      매일 한번씩은 들어와서 공지가 있나 보지만..꼼꼼하게 읽지 못해요. 최근 벌려놓은 일이 많다보니 저의 한계에 도달한듯..익스트림 바빠요..
      어제와 오늘 이번주 공통과제를 놓고 엄청 압박감을 느끼는 중인데, 이것이 극대화 되면 다시 安이 찾아올까요...순환적 道니깡...켁..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