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629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7-04 13:20
조회
541
채운쌤은 두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지면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어떤 초월적인 것 없이 사유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 가타리의 비판은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정신분석의 효과와 거기에 나타나는 사유구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의 사유 구조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간 욕망의 본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신분석의 이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대한 믿음은 근대적 가족관계와 그것이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를 재생산하는 효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 위에 사유를 구축하는 방식은 정신분석 뿐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종교들이겠지만, 신앙심이 없고 정신분석에 관심이 없다고 이런 사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신은 한 번도 실존한 적이 없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자는 “불신에 기초한 믿음”을 구성하고 있으며, 언제든 신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루쉰은 희망에 절망한 자는 여전히 절망만은 믿고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죠. 아무튼 우리는 ‘사유하는 나’에 대한 믿음만큼은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무질서, 혼란, 무정부상태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에 의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몹시 견고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실제로 이러한 지반이 무너졌을 때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될까요?

채운쌤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는 작가의 <칠레의 지진>이라는 작품을 언급하셨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처럼 칠레에 일어난 지진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호세페와 헤로니모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둘의 관계는 계급적 차이 때문에 가족과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은밀하게 관계를 계속 이어나갔고, 이것이 발각되어 호세페의 아버지에 의해 호세페는 수녀원에 보내집니다. 그러나 호세페와 헤로니모는 계속 만났고, 호세페는 임신하고 성체축일날 산고로 쓰러져 이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헤로니모는 감옥에 갇히고 호세페는 화형을 처할 위기에 놓입니다.

호세페의 화형 당일, 이 사실에 비관한 헤로니모는 목을 매달아 죽고자 결심하는데 이때 거대한 지진이 발생합니다. 여기서의 지진은 인간들이 삶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인 땅(ground)을 붕괴시킴과 동시에 아버지·법·종교라는 사유차원의 근거(ground)역시 붕괴시켜버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땅의 무너짐에 의한 혼란은 순식간에 이런 것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이때 헤로니모와 호세페에게 지진(아버지, 법, 종교의 붕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호세페는 자신이 축복받은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세상에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준 어제를, 하늘이 지금껏 자신에게 베풀지 않았던 은혜라고 칭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의 세속적인 재산이 모두 파괴되고, 자연이 모두 파묻힐 위기에 처한 이 끔찍한 순간에, 인간의 정신만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듯했다. 눈에 들어오는 들에는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고, 제후들과 거지들, 귀부인들과 농가 여인들, 관리와 삯군들, 신부들과 수녀들이 서로 동정을 베풀면서 도움을 주고, 자신의 생계를 위해 건진 것들을 기쁘게 나누니, 마치 모든 이의 불행이 불행으로부터 도망친 모든 이들을 한 가족으로 만든 것 같았다.” -<칠레의 지진>

지진이 칠레를 덮치자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이전에 공동체란 계급, 법, 가문 등과 같은 공통된 근거위에서 성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근거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자 사람들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돕고 필요한 것들을 나눕니다. 채운쌤은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냐’는 질문이 얼마나 유치하고 의미 없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은 위기 상황이 닥치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근거의 붕괴가 필연적으로 이렇게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만 말한다면 이것 역시 믿음의 차원에 머물겠지요. 바로 다음 상황에 사람들은 사제들에게 선동당해 재판을 열고 마녀사냥을 시작합니다. 근거의 붕괴는 인간들이 다른 공동체를 만들게 할 가능성과 함께 가장 극단적인 파시즘으로 치닫게 할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 가타리는 고흐를 인용하며 “참을성 있게 천천히” 벽을 가로지를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들이 우리 독자들에게 조심스러워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죠. “참을성 있게 천천히”는 문제를 단순화시키지 말고 계속해서 고민하라는 요구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벽을 가로질러야 할까. 강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 벽을 파고 줄로 갈아 가로질러야 한다, 내 느낌에 천천히 참을 성 있게.”

두 번째로 말씀하신 생각할 거리는 ‘어떻게 새로운 욕망을 배양할 것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번 영국의 EU탈퇴 문제를 보시면서 탈퇴를 말하는 이들과 잔류를 말하는 이들의 욕망이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 탈퇴 찬성자들은 이민자를 배척하는 우파 인종주의자로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봤을 때 복지를 주장하는 비계약노동자들이기도 합니다. 또한 잔류를 말하는 것은 진보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긴축재정을 통해 세계적 흐름에 발맞추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담론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닙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양쪽은 실상 자신들을 국가를 위탁할지, 세계금융시장에 위탁할지를 놓고 다투고 있을 뿐 욕망의 차원에서는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페미니즘 담론들이나 동성결혼 문제에 관한 담론들은 남성과, 이성애자와 동등해지고자 하는 욕망, 정상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담론들은 국가에, 사회에, 이성애자나 남성과 같은 정상의 범주에 있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들이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놓고 목소리를 내고, 무언가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비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문제를 놓고 보자면 결국 이들도 탄압을 내면화하고 억압을 욕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분열자의 여행은 기이하게도 제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상의 범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욕망도 사회체의 재생산에 관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뜬금없는 얘기를 좀 해보자면.. 요즘 많은 언더 힙합 레이블들이 “전략적 제휴”라는 명목으로 대기업들과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TV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비판했던 이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화제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실망하는 팬들도 많은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이것도 이들이 놓인 위치가 그들의 욕망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언더힙합으로 분류되는 많은 뮤지션들은 애초에 ‘비굴하지 않게 성공하는 것’을 욕망하고 있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표면적인 대립구도에 포획되지 않는 욕망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보다 혁명적인 제3의 것을 욕망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은 혁명을 욕망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욕망은 이것 아닌 저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구분에 고착되지 않으며, 그것을 와해할 때 혁명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놓았지만 아무 말도 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렵습니다. 역시 무책임한 인용으로 마치겠습니다.

“몇몇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혁명적인 것은 욕망이지 축제가 아니다! 또한 어떤 사회라도 참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착취, 예속, 위계의 구조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208)

“하지만 동시에 분열자의 여행은 기이하게도 제자리에서 일어난다. 분열자는 다른 세계에 관해 말하지 않으며, 다른 세계에 속하지도 않는다. 설사 공간 속에서 이전된다 해도, 그것은 내공에서의 여행이요, 여기 세워져 머물러 있는 욕망 기계 둘레에서의 여행이다. (중략) 분열자들은 몸짓 하나하나를 새로 발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이 없고 고독하고 기쁜 인간으로, 마침내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명사로 단순한 어떤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생산된다. 즉 그는 아무것도 결핌하고 있지 않은 욕망, 장벽들과 코드들을 뛰어넘는 흐름, 그 어떤 자아도 가리키지 않는 이름을 말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이다.”(233)

전적으로 제 게으름 때문에 너무나 늦어버린 후기, 죄송합니다ㅠㅠ 모레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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