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713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7-10 14:02
조회
496
지난 시간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유물론을 살펴보았습니다.
원시영토기계니, 전제군주기계니 하는 해괴한 소리들이 난무한 두 시간이었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냥 병맛 같을 수도…;
저는 책을 읽으며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항문의 사유화니 마을의 변태니 하는 표현들이 출현할 때마다 확 텐션이 올라가는 느낌이랄까. 철학적 개념과 사유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와장창 깨는 말들에 감탄 또 감탄하며 박수를 쳤답니다.

첫 수업서부터 줄곧 설명된 대로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을 선차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어떤 것이 결핍된 탓에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으로서의 욕망이 먼저 있답니다.
대상도 없이 어찌 욕망이 있을 수 있는가 싶어 물론 처음에는 아리송합니다만, 끊임없이 접속하고 변이, 생성하는 힘 자체가 곧 욕망임을 이해해야겠습니다. 욕망은 일종의 힘이랍니다. 생산하는 힘, 끊임없이 흐르는 힘.

들뢰즈+가타리가 <미개, 야만, 문명>이라는 제목을 붙인 3장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욕망적 생산을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영토화한 사회기계들의 특성입니다.
늘 흐르고 넘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욕망에 어떤 코드를 부여하고 어떻게 이를 영토화 하는가를 기준으로 들뢰즈+가타리는 세계사를 새롭게 구성해 보였지요. 이름 하여 원시 영토 기계 - 전제군주 기계 - 자본주의 기계가 그것.
지난 시간에는 주로 원시 영토 기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몇 가지 개념들을 아주아주 간략히 복습해볼까요오

일단 사회기계. 들뢰즈+가타리는 사회도 늘 접속하고 이행하고 작동된다는 측면에서 실제적으로 기계라고 이해합니다.
앞서 말했듯 선차적인 것, 심지어 단 하나 ‘존재한다’ 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인데, 욕망이 기입되는 표면이 곧 사회기계랍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기계란 하나의 프로그램에 따라 오차 없이 기능을 수행하는 mechanics가 아니라, 각 부분들의 활동에 의해 늘 역동적으로 작동되면서 새롭게 생산되는 machine입니다.
채운 쌤께서 이 둘의 구분을 몇 번 강조하신 바 있죠. 사회기계란 후자인바, 결코 특정 집단이나 지배자의 의도대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혁명의 가능성, 동시에 전혀 다른 혁명의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다고 하지요. 들뢰즈+가타리가 이 기묘한 책에서 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 혁명에 대한 새로운 사유랍니다.
시스템을 고장 낸다 해서 멈추지 않을 자본주의 기계 안에서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자본주의 혁명을 시스템의 고장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게 사회주의 그룹이죠) 어떤 것이 시도되어야 하는가? 문득 로렌스의 <제대로 된 혁명>이 떠오르기도…

아무튼 존재한 모든 사회기계는 흐르는 욕망에 특정한 코드를 부여한 뒤 특정한 방식으로 이를 영토화한 결과입니다.
채운 쌤 설명에 따르면 예컨대 자본주의 기계는 ‘소유’ 코드를 부여함으로써 특정한 사회적 생산을 가능케 했답니다.
…코드화, 영토화. 제대로 정리한 적은 없어도 종종 들어보신 개념일 수 있는데, 여기서 유의할 건 ‘化’에 있지요.
흐름을 절단해 특정 코드를 부여하려는 작업, 이게 코드화. 그리고 특정한 관계와 기능을 설정해 영토 표시하는 작업, 이게 영토화.
동물의 세계에서 영토화란 곧 텃세지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내 영역이고 그곳에서는 이러저러한 룰을 지켜야 한다는 강제력이 작동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영토화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의 영토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특정 방식의 영토화 작업들이 있답니다.
채운 쌤에 따르면, 그래서 혁명과 실험에서 관건은 탈영토화에 그치는 게 아니라 더 강고한 영토에 갇히지 않은 채로 계속 접속할 수 있는가의 여부랍니다.
정신분석이 질색하는 환자가 바로 분열자인데, 왜냐하면 코드화가 불가해서라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네요.

이렇게 볼 때 욕망은 결코 개인적인 것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욕망에는 사회적인 것이 투여(투자. 말 그대로 invest)되기 마련이니까요. 순수한 나의 욕망, 이런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은 늘 동시적인 것으로, 욕망적 생산을 규정하는 게 사회적 생산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어째서 사회기계들을 분석하는가, <앙띠>에서 세계사가 다뤄지는 맥락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정리해볼까요.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어떤 사회체에도 하나의 극한으로서 내재해 있습니다.
역사 속 다른 사회체들과 달리 자본주의는 탈코드화 위에서 성립되어 끊임없이 극한까지 옮겨간다고 해요.
생각해보면 모든 욕망을 허용하는 가장 자유로운 사회 시스템 같지만,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는 다시 욕망을 코드화해 외연을 확장하고 자신을 갱신하는 듯합니다.
반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였던 삶의 양식이 다시 포획돼 하나둘 상품화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해요. 가령 명상, 자연주의 식품과 화장품, 인문학, 대안교육 같은.
아무튼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와 분열증을 본령으로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그것은 모든 사회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거죠.
코드화를 기반으로 한 어떤 사회체도 탈코드화의 순간을 피할 수 없고, 언제나 극한을 향한 접근의 위험을 안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사회적 악몽이 곧 자본주의가 아닌가 —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의 놀라운 분석이랍니다.

자, 늦은 수업 정리는 여기서 마치고요. 다음 시간에는 3장 <원국가>까지 읽어오심 됩니다. 재미나게, 꼼꼼하게 읽어보아요.
후기는 최정옥쌤, 간식은 이미영, 김봉선 쌤께 부탁드립니다.
수요일에 만나요!

 
전체 2

  • 2016-07-11 11:20
    틸코드화는 코드화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겠죠? 자본주의기계가 모든 사회기계의 극한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기계는 탈코드화를 먹이로 그것마저도 수용하고 그것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탈코드화로는 안돼는 거죠? 코드화자체가 안돼야하는 것?!

    지난 시간 선생님 말씀 중에, '자본주의 공리계를 깨지 않는 한 자본주의 변혁은 불가능하다'에서 자본주의 공리계는 무엇일까요? 이 공리계를 깨는 것이 탈코드화와는 다른 것인가요?

    • 2016-07-11 19:30
      코드화가 안 될 수가 있을까요?^^ 질문에 대해서는 이번 수요일에 얘기해보도록 해요, 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