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7.13 수업 후기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7-19 12:31
조회
444
먹고 자고, 만나고 헤어지고, 뭔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즐겨하고, 어딘가를 가고… 제 삶을 이루는 것들은 이런 것들인데요. 들뢰즈에 따르면 이 작디 작은 것들은 사회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욕망은 개인적이며 이미 사회적. 가장 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욕망의 사회적 투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욕망은 분명 사회적 생산을 뛰어넘지만 그렇다고 사회 바깥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적 생산은 언제나 사회적 규정력을 흘러 넘치지만 또한 사회는 욕망을 특정 방식으로 코드화하고 관리. 개인은 바로 이 속에서 생산(?)됩니다. ‘오이디푸스’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시스템 속에서 쑥쑥 자랄 수 있듯이 내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특정 방식으로 활동들을 해 나가고 하는 것들이 욕망의 흐름을 재단하고 조직해내는 사회적 생산과 무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좀 단순합니다만 ‘군더더기 없이 하루를 처리(?)하고 싶다’는 마음 역시 자본적 생산‧조직화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는 순전한 마음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생산을 뽑아내는(?) 사회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요. “내 미시적 욕망들 속에 어떤 식의 사회적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수업 때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것은 고대 사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체에 있어서 “욕망 기계들과 무한히 더 큰 친화력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는데요.(319쪽) 원시영토기계에서 이 지점을 봅니다.

원시 영토기계는 욕망을 코드화하고 흐름들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통상의 사회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환하지 말고, 토지라는 몸에 표시하라”는 원시기계의 방식은 욕망이 규정력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회적 인간성으로 국한되지 않는 차원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 이 지점이 사회체 및 개인적 삶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통과의례에서 개인은 ‘사적 개인’이라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우주적 관계 속에서의 개인으로 서게 됩니다. 고대 축제의 폭력성은 인간 신체가 결코 균질한 방식으로 관리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 위에서 성립한다고 했는데요. 그럼에도 욕망은 언제나 가족, 나(私)의 영역으로 귀속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나 생산이 허용되는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결국에 ‘화폐’라는 초월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미시적으로 관리, 조직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유롭다’고 하지만 화폐 통제 이상의 운신의 폭을 갖기가 어려워지는 것 아닐지. 원시 사회체는 저와 같은 방식을 위험하게 본 것 같은데요. 쓰려고 보니 어째서인지 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수업 끝날 때쯤에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어떤 공동체도 파시즘 체제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어떻게 명령의 메커니즘을 계속 방해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회체가 유지된다는 것은 저에게 아직도 ‘단일한 명령 메커니즘의 유지’가 아닌지. 그런데 원시체는 바로 그렇게 해서 파시즘적으로 되는 것을 사회 유지에 있어서 위협적인 일로 본 것 같습니다.

지난 수업 때 또 재미있었던 내용은 ‘내면의 인간’이라는 근대 인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근대인은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없다! 모든 고통을 내면화하며 자기 안에 감싸인 채로 둡니다. ‘되돌려진 공격적 본능’이라는 말을 썼었는데요. 그때는 고개를 엄청 끄덕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공격적 본능이든 뭐든, 어떻게 어떤 감정이나 욕망이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쌓이고 간직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아합니다. (매일 하고 있는 일일텐데도요...)
아무튼 원시 부족에게 고통은 향유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표면의 일이었고 또 어떤 부채든 탕감시킬 수 있는 것이라 좀 좋은 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대인에게 고통은 아니 그가 겪는 사건은 언제나 초월자 아래서 본질주의적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하면서 묻게 되지요. 근대인에게는 고통을 보는 눈이 아니라 읽는 눈이 생겼다고 했는데요. 이 눈은 곧 심판하는 눈이기도 했습니다. 내면의 법체계라는 절대자와 연결하여 모든 것을 평가하는 눈인 것입니다. 이 눈을 쓰기 때문에 심판자가 되지만 언제나 법체계라는 초월자에 종속된 채입니다.

그 밖에 여러이야기가 많았는데요.
.....<천하무림기계>이야기 하면서 의상 자체가 신체의 변형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하는 그 모든 일들과 더불어 욕망이 생산된다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내일 뵈어요.
<안티오이디푸스>에 리비도 투자를 할 시간......(*.*)
전체 3

  • 2016-07-19 13:37
    중요한 맥락들은 모르겠고..................중요한 맥락들은 모르겠고.....................중요한 맥락들은............ ㅋㅋㅋ 강심장무대뽀로소이다

    • 2016-07-19 13:46
      ㅋㅋㅋㅋ 왠지 뭐시기 해 지웠습니다. 저는 소심장ㅋ.ㅋ

  • 2016-07-19 21:52
    다른 건 댔고, "천하무림기행"! '천하무림기계'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거야? 아무리 기계라는 단어가 익숙해졌기로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