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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3강>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2-15 15:13
조회
463
<선악의 저편>(1886)은 ‘미래철학의 서곡’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반시대적 고찰>부터 이어온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선과 악이 지배하는 우리의 이곳을 넘어서 다른 어떤 저곳, 저편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악을 깨부수고 새로운 선악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책은 순서로 보면 <차라투스트라>와 <도덕의 계보> 사이에 있어요. 니체의 모든 핵심 개념이 다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 이후의 저작들은 그 개념들이 더 정교화되고, 문체도 기존의 아포리즘적 형식에서 보다 간결한 산문체로 바뀝니다. 니체는 마지막 10년을 정신병에 시달렸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의 말년의 글쓰기에 대해 이와 관련한 두 가지 극단적인 평, 그러니까 광기에 지배된 혼돈의 글쓰기라는 쪽과, 광기 속에서 차갑고 고요하게 제련된 글쓰기로 보는 쪽이 있다고 하죠. 실제로 강의를 들어보니 채운샘의 말씀처럼 확실히 후자의 평이 맞는 것 같습니다. 미친 채로 이런 글을 어떻게 씁니까! 자신의 광기를 감당 못해서 글쓰기는커녕 사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붕괴로서의 광기가 전자라면, 아픔(광기도 일종의 아픔이죠) 때문에 붕괴하지 않고 그 아픔 속에서 아픔을 돌파하는, 그러니까 광기를 돌파해 나간 것으로 보이는 니체의 경우는 후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들뢰즈는 니체를 읽을 때 피해야 할 오해들을 몇 가지로 이야기 했는데, 힘의지가 지배욕이나 힘을 의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이렇게 믿어버린 자들이 있었으니 나치들에게도 활용될 수 있었죠), 강자와 약자가 사회체제 속 권력의 유무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는 것, 영원회귀가 고대에서 가져온 낡은 이념이라는 생각(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순환적 개념이 아닌 전혀 다른 함축을 가진다고 하죠. 저는 이 부분이 엄청 어려워요!), 마지막으로 니체 말년 저작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쓰였다는 바로 이 사실, 이것들이에요.

저는 힘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는데요. 니체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건 힘이 증가하는 느낌으로부터라고 했어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보통 그렇듯 완벽한 사람에게서 사랑을 상징하는 모든 것들을 받고 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돌봐지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 같지만,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힘을 능동적으로 쓸 수 있을 때 행복한 존재예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들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약자 중의 약자인 것이고, 그 약자를 축복받은 자로 묘사하는 드라마는 반니체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게다가 니체는 인간이 힘의 느낌을 느낄 때 스스로를 ‘선하다’고 느낀다고도 해요!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선하다거나 착하다고 평가하는 자는 사실은 아무것도 안하는 자인 경우가 많다고요. 채운샘이 들어주신 예로, 사실은 연인과 헤어지고 싶으면서 말도 행위도 먼저 하지 않고 있다가 상대에 의해 차이는 입장이 되고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많죠. 피해를 받은 자는 보통 악한 자에 의해 당한 선한 자가 되어 버리곤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뭔가 안하는 자가 니체가 보기에는 선한 것이 아니라 제일 나쁜 것이에요. 니체는 이것을 무력한 선보다는 힘을 행하는 악이 낫다고 했는데요. “강하면서도 통제되지 않는 힘의지를 가진 사람은 힘의지가 약한 사람보다 더 위험하지만, 선하다는 것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는 선한 것보다 차라리 악한 것이 낫다(강의안 2p)”고요. 이것은 무력한 것을 선이라고 착각하는 자들, 바로 허무주의자인 그들이 이 대지에서 천상을 꿈꾸는 행위를 비판하는 맥락과 연결이 돼요.

요즘 니체를 배우면서 점점 강하게 느끼는 거지만 전 어릴 때부터 받은 기독교적 교육의 탓인지 착해야 한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최소한 착해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거든요. 착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간다거나 나쁜 일을 해서 벌을 피하고 싶었던 어릴 때부터의 아주 단순한 사고라든가, 환생이든 업보든 아무튼 나쁜 결과들이 되돌아오지는 않게 살고 싶은 마음 같은 것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일상이 된 것이죠. 더불어 나는 어느 정도(평균이상..?)는 선하고 최소한 저들(?)보다 낫다는 식의 어떤 우월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착하게 내지는 착해 보이는 행동들을 하는 것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무척 당연한 것이라고도 느꼈고, 그런 삶의 방식이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기는 데에 한몫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요즘의 니체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그런 선해 보이고 착해 보이는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는 저야말로 행동하지 않는 약자구나 싶어집니다. 어쩔 때는 악해 보이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지부진한 연인 관계를 끊어내고 단절시킴으로써 그 상황을 돌파해야 할 때가 있죠. 그럴 때 우리 삶이 능력으로 고양될 수 있는 것인데, 저의 경우는 지지부진하게 끝내지 못하는, 마음 약한 피해자가 되는 쪽이 당장에는 더 쉽기 때문에 자꾸 그쪽 길로 가게 되는 거예요. 이런 경우는 상대까지 새로운 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게 될 수 있는데도요.

니체는 사회에 악이 만연할 때 아무행위도 하지 않고 그냥 견디는 민중들 편에 서지 않습니다. 힘을 사용하는 자를 더 좋아해요. 그 당시 인간들에게는 악처럼 나타난다 하더라도 힘을 사용하면서 그 느낌을 느끼는 능동적인 자를 바라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 그 선한 자들에 의해 역사는 결코 이뤄지지 않거든요. 요 몇몇 문장만을 따로 떼어 보고 잘못 활용하면 나치들이 니체를 사용한 것처럼 되겠지만요. 니체의 글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니체가 말한, 사람들에게는 악으로 평가받을 능동적인 행위를 함으로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이런 자는 오히려 예수, 붓다, 간디와 같은 성인들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 자신의 덕과 가치를 고안해 내서 적극적으로 실천한 그들은 기존의 선하고 정의롭다는 자들에게서 가장 큰 미움과 증오를 받게 되죠. 이것은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와,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그것을 결국 넘어가는 자의 차이, 그리고 전자의 후자에 대한 질시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아무튼 니체는 능동적인 힘의지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 하며 그 때문에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고 했어요. 기존 용법에서 보면 악한 자가 되지만, 그는 그 기존의 가치평가를 넘어가서 그 가치평가 자체를 새롭게 하는 자이고, 따라서 이전의 것들(자기 자신을 비롯해서)과는 선악의 가치체계가 달라진 자이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것을 경멸하게 된 자이기도 하겠죠. 채운샘께서는 루쉰의 예를 들어주셨는데, 지난 학기에 읽었던 루쉰은 누구보다 자신을 철저히 해부하고 경멸했죠. 그리고 자신의 동지였던 벗들을 진심으로 철저하게 미워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매번 과거의 자신을 넘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는 왜 이렇게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지가 의문이어서 채운샘의 설명해 마지못해 동의했던 기억이 있는데, 능동적으로 가치평가를 새롭게 하는 자는 이렇게 ‘자기극복’을 하는 거였네요.

아무튼 가치란 원래 사물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평가하는 행위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으로, 이 행위를 떠나서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치의 위계라는 것도 우주 만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가치는 계속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가치를 평가하는 자들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선과 악이라는 것도 그 가치를 평가하는 자들에 의해 매번 창조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척도로 삼는 도덕이라는 것의 기원을 거슬러가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가치평가의 결과에 지나지 않게 돼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도덕을 가치평과와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사실 도덕이란 특정한 가치평가에 의해 제한된 시야에 불과한 것이고, 누군가의 가치평가로 다른 누군가들을 강제하는 도구이기도 하죠. 우리는 그 가치를 몸에 규칙으로 새기고 원래부터 그것이 있었다고 믿으며, 우리가 받아들인 목록들을 거스르면 악이라고 규정하고 미워하죠.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힘의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평가를 그대로 따르는 자는 니체가 보기엔 나태한 자들이고, 자신의 힘의지를 사용하기를 포기한 무력한 자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가치평가를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힘의지를 사용하여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지금 이곳에 얼마나 많은 다양한 도덕들이 가능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해요.

영원회귀에 대해서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 저는 이것을 듣고도 잘 모르겠어서 정리를 하기가 정말 어렵네요(아무것도 못한 채로 시간이 계속 가요ㅠ). 순환으로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그런 모양이 그려지고, 왜 이것을 ‘반복’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설명했는지부터가 확 다가오지를 않아요; 주역에서의 순환이나 노자에서의 반(反)과 비슷한 것 같다고도 느껴졌는데, 악마의 속삭임(모든 것을 수없이 반복해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의 질문)과 연결하고 그것이 삶에 대한 온전한 긍정을 말한다고 얘기하자니,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영원회귀로부터 관점주의, 허무주의, 힘의지 개념이 완성되기 때문에 이것이 니체 철학의 핵심이라고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 답답한 상태입니다; 일단 토막토막이라도 들은 부분을 간단히 이야기해 볼게요. 조금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건화나 다른 선생님들이 다음 후기에 보충해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구입니다. 니체는 인간에게 유일한 인식이 관점적 해석밖에는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오류입니다. 그러니 모든 진리는 오류인 것이죠. 니체의 관점주의는 절대적 관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에요. 모든 관점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즉 누가 더 진리에 가깝냐, 어떤 것이 오류냐의 문제는 아무 의미가 없죠. 오히려 그가 인식한 내용이 어떤 질의 힘의지이냐.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냐, 능동적인 것이냐 수동적인 것이냐의 문제만이 남는 것이에요. 힘의지에 대응하여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인간유형인 위버멘쉬는 자신의 행위 자체가 수단이면서 목적인 자기 목적적 삶을 위해 관점적 경험상황을 구성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마주한 세계를 능동적으로 가치평가하는 자이죠.

니체가 여기서 묘사하는 이 세계, 우주는 동양의 고전들에서 접할 수 있는 사유와 무척 비슷한 것 같아요. 시작과 끝도 갖지 않는 힘, 목적이나 완성을 전제하지 않는 세계는 단지 변화만 있으며 텅 비어 있지 않고 다양한 힘들로 가득 차 있어요. 생성을 통해 존재가 되고, 다시 돌아옴이 존재를 매번 새롭게 창조하죠. 하나가 매번 다르게 존재하는 하나가 되는 것이에요.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한쪽에서 증가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감소하고, 풍랑과 범람을 하는 힘들의 바다,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되돌아가는 회귀의 거대한 세월, 밀물과 썰물의 형태,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가장 다양한 것에로 몰아치면서 가장 정적이고 가장 강하고 가장 차가운 것으로부터 가장 작열하고 가장 거칠고 가장 스스로 모순적인 것에로 가는, 그리고 다시 충만함으로부터 단순함이라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모순의 유희로부터 다시 조화의 기쁨으로 되돌아가서 스스로를 긍정하면서 여전히 그 안에서 자신의 길과 세월들을 갖는, 영원히 되돌아와야만 하는 것으로서, 생성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지나침과 피곤함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축복하는 힘 : 영원히 스스로를 창조하면서 영원히 스스로를 파괴해야만 하는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 이중의 환희를 갖는 비밀의 세계, 이 나의 선과 악의 피안, 저러한 원환의 행운에 놓여 있는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은 갖지 않고, 저 원환이 자신에 대해 갖는 좋은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는 결여되어 있는 세계이죠. 세계는 선악 너머에 있는 것이자 매순간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세계가 ‘변한다’는 것은 기존의 세계가 순간적으로 허물어지면서 동시에 새롭게 세워지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파괴인 동시에 생성으로 존재하게 돼요. 전 이 말이 무척 인상깊었는데요. 인간도 생과 멸의 찰나로 존재한다고, 이것을 불교용어로 찰나멸이라고 한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은 찰나적 존재, 생/멸 사이의 슬래쉬(/)라고 했대요.

이 현상 세계 너머의 다른 배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이 새롭게 반복되고, 생성되는 동시에 소멸되고, 오로지 되어갈 분인, 진행 중인 세계가 있을 뿐이에요. 이 영원회귀를 끊임없는 순환, 동일한 것의 되돌아옴으로 이해해버리면 글 속의 난쟁이처럼 모든 역겨운 것의 되돌아옴으로 결론이 나 버리고, 아무 윤리도 아닌 것이 되어버려요. 여기서 영원회귀는 이것과 다른 차원의 얘기예요(결정적인 차이, 지점을 콕 집어낼 수가 없는데ㅠ). 나만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인의 매듭들이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것, 나와 내 주변의 같이 작동하는 모든 힘들이, 나와 내 세계가 동시에 다같이 되돌아오는 것이죠. 나만이 아닌 우주 전체의 반복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달고 오죠. 선함과 행복 안에 악이나 불행도 같이 있다는 말이에요. 마치 ‘백투더 비기닝’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좋아하던 여자에게 작업을 걸다 실패했던 장면으로 시간을 거슬러가서 멋진 대답으로 그 여자를 얻는 대신, 그와 얽힌 모든 결과들을 다 바꾸는 바람에 다른 누군가가 죽거나 다친다는 무서운 결과들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요. 실존을 긍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순간으로 경험하는 그것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이 같이 반복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에요. 모든 순간 안에 악과 고통 등도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인정해야 하죠. 이것이 현존 전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고와 연결이 돼요. 자신의 가치평가를 넘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겪지 않은 것까지도 긍정하는 것, 전체 우주의 반복을 긍정하는 것이죠. 별들이 각각 자기의 속도로 돌 듯이, 우리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거예요. 이 속에서 전체와 더불어 존재들도 매번 다르게 변화해가는 것이고요.

우리는 습속과 자기 망상체계를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주와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꿈꾸죠. 자기식대로 되지 않을 때 슬퍼하고 낙심하고요.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에요. 채운샘은 자신이 자기를 정당화하는 원리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과가 아니라, 모든 사건을 필연으로 긍정하는 것, 매 순간 반복되는 전체 속에 나도 하나의 인과로 들어감을 이해하고, ‘나는 그것을 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자의 정신을 이야기하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낙타의 정신이 아니라요. 지금 이순간이 악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전체 돌아옴으로 인해 존재함을 알면 그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죠. 삶이란 이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다음 순간도 다르게 맞이할 수 있겠죠. 이것을 모르는 자에겐 매번 동일한 사건이 동일한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항상 반복되는 같은 일과 매번 같은 해석과 여전히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남는 것이죠.

 

니체를 배울수록 동양철학에서 배운 것들과 묘하게 연결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동양철학보다 지금 나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훨씬 더 뜨겁게 자극을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는 만큼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네요. 마지막까지 모두 빠지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날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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