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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니체 2탄 <7강> 후기 2 (안티크리스트)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01-11 03:22
조회
463
철학하는 월요일, <니체>편 마지막 강의는 그 유명한 <안티크리스트>입니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잘 알려져있듯 기독교 도덕을 철저히 비판하는 책입니다. 비단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양 역사 전체에 깔려 있는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그리스도교의 종말을 선언하는 말일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교적인 사고방식의 종말을 선언하는 말인 것이지요.
그럼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다음 윤몽의 후기에서 만나보실 수 있구요(^^) 이번 후기는 그 ‘그리스도교적 부정적 힘의지’를 어떻게 ‘디오니소스적 긍정적 힘의지’로 전환하는가! 하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답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제가 놀랐던 점은 바로 이 ‘힘의 전환’을 중점에 두고 니체를 보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가 어떻게 기독교를 비판하는지 그 ‘내용’에만 초점을 두고 있었거든요. 그 비판을 통해 니체가 어떤 ‘힘의지’를 보여주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디오니소스적 긍정’으로 연결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어 초집중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 2장에서 ‘약자들과 실패자들은 몰락해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것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부정’과 ‘파괴’를 통해. 즉 “부정과 파괴는 긍정의 조건”인 것이지요. 긍정하기 위해 부정과 파괴를 거쳐야 한다니.. 무엇을 부정하고 파괴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상을 추구하고, 그 이상을 추구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원인을 제거하려는 ‘반동적 힘들’과 ‘무에의 의지’입니다. (‘반동적 의지’와 ‘무에의 의지’는 쉽게 풀면, ‘그사람 때문이야’ + ‘사는게 다 그렇지 뭐’ 라고나 할까요.) 이 두 가지가 만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의지가 움터서 스스로 소멸되고자 하는 ‘최후의 인간’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닙니다. 최후의 인간 앞에는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바로 몰락의 순간에, ‘정말 몰락하는 길’과, ‘그 몰락을 통해 전환하는 길’ 두 가지가 나타나는 것이죠. 즉 부정과 파괴를 통해 긍정으로 갈 수 있는 길도 동시에 열린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흥미로운건, ‘부정과 파괴를 긍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거꾸로 돌려보면, ‘긍정은 부정과 파괴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말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는 반드시 아리아드네가 필요하다 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로 이어집니다. 크레타의 공주인 아리아드네는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로스의 여동생입니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자로 자신의 나라에서 매년 처녀총각을 희생물로 바치는 것에 저항하고자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결심을 하지요.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테세우스에게 반하여 자신의 오빠를 배신하고 테세우스를 돕습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를 탈출하여 넥소스 섬에 정박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테세우스는 자신을 위해 오라비를 배신한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섬을 떠납니다. 버려진 아리아드네는 슬퍼하며 자살을 결심하는데.. 이때! 디오니소스가 나타나 아리아드네를 구하여 아내로 삼습니다. 니체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왜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왜 디오니소스에게는 아리아드네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까.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와 디오니소스 사이에 있습니다. 테세우스 쪽에서 디오니소스 쪽으로 전환을 시도하는 아리아드네! 이 점을 염두하며, ‘부정적 힘의지’가 어떻게 ‘긍정적 힘의지’로 전환하는지 주목해보기로 해요.
먼저 아리아드네가 반했던 테세우스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 2부에서 말했던 ‘숭고한 인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숭고한 인간에게 있어 긍정은 “어떤 시련을 짊어지고 받아들이며 견뎌내는 것이요 어떤 짐을 떠맡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테세우스는 여전히 삶의 부정을 긍정으로 포장하는 ‘나귀’이고, ‘인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자신이 짊어진 것의 무게로 실증성을 평가하며, 짊어진 모든 것이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다는 믿음’과 ‘저건 죽여야만 한다는 당위’가 만나 ‘부정적 힘의지’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걸 도와준 아리아드네의 상징은, ‘부정적 힘의지’가 목적하는 것에 달라붙는 ‘반응적 힘의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응적 힘의지가 부정적 힘의지에게 버림받을 때, 어떤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부정적 힘의지와 이별하고 죽기를 원하는 몰락의 순간에 디오니소스라는 긍정의 힘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떠맡지 않지만,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볍게 해주는” 디오니소스와 더불어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가벼워지지요.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아리아드네 자신이 적극성이라고 믿었던 것(오빠에 대한 복수)이 실은 원한의 반작용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긍정이라고 믿었던 것이 우스꽝스러운 가장이었음을. 부정적인 힘의지와의 이별, 이것이 아리아드네에게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아리아드네라는 반응적 힘의지가 테세우스라는 부정적 힘의지와 이별을 고하고, 디오니소스라는 긍정을 만나 가벼워졌다면, 반대로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를 필요로 하는 것은 왜일까요? 여기에 니체는 이렇게 답합니다. 긍정이 진짜 긍정되려면 제2의 긍정이 필요하다고. 즉 긍정이 긍정을 낳을 수 있어야 진정한 긍정이라고 말이지요. 영원회귀는 이 두 긍정의 결합, 즉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간의 결합의 산물입니다.

“영원회귀는 반드시 변환을 동반한다. 생성의 존재 또는 영원회귀는 이중 긍정의 산물이며, 이때 이 이중 긍정은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되돌아오게 하고 오로지 적극적인 것만 생성되도록 한다. 반응적인 힘도 부정의의지도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변환에 의해서, 즉 선별하는 영원회귀에 의해서 제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니체의 이런 사고는 변증법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중의 부정을 통해 작동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중의 긍정을 통해 작동합니다. 니체에게서 운동의 주요한 계기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입니다. 무엇이 긍정되는 것일까요? 바로 우연. 세계에 발생하는 모든 생성의 사건은 우연이고, 그 우연이 만들어낸 조합은 필연입니다. 마치 주사위 놀이처럼, 한 번 던져짐이 우연의 긍정이라면,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라 할 수 있지요. 니체는 말합니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디오니소스의 긍정에 이은 아리아드네의 긍정. 그것은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고 또 다른 우연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또 한번의 우연을 통해 지나간 것들을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잊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나쁜 추억이 아니다. 테세우스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회귀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이다.”


단 한번뿐이라면, 그 사건은 봉인된 채 의미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실행을 통해 과거는 다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아무리 비슷한 사건이 다시 닥치더라도 그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니체는 말합니다. “어떤 때보다 내 삶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더 깊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주사위놀이라는 우연, 그 우연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은 다 필연적이며, 그 자체로 유용하기도 합니다. 단, 그 우연이 가져다주는 것을 긍정하고 사랑할때만-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요. 이것을 니체는 “ 운명애” 라고 합니다. 생에서 다가오는 그 모든 것은 당연히 고통을 내포합니다. 그리스인들은 한번도 고통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않았지요.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자체이기 위해서- 파괴에서 느끼는 기쁨도 역시 내포하고 있는 기쁨이기 위해서”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것이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를 필요해했던 이유이고, 고통의 피안을 꿈꿨던 그리스도교적 사고와 가장 다른 점일 것입니다.

강의를 마치며 채운샘은 말씀하셨어요. 니체에게 삶이란 미로라고. 그 미로 속에서 각자의 길이 있는거라고.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절대 자기를 절대 우상시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 말은 결국 ‘모델 없이 자신이 최초인 삶을 살라’는 말이겠지요. 니체를 떠나기 위해, 따라야 할 모델 없이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더욱 니체를 읽어야 겠습니다.
“모든 책은 그 책을 떠나기 위해 읽어야 한다”는 채운샘의 말이 마음에 남네요. ‘적당히’ 읽어서는 절대 떠날 수 없겠죠^^
온 신체를 동원하여 니체를 읽고 떠나보내고 싶으신 분은 2월 첫째주 월요일에 개강하는 <소리 내어 읽는 니체>로 고고!ㅋㅋ

그럼 또 만나요~
전체 2

  • 2017-01-13 14:52
    깨알같은 홍보까지ㅋㅋㅋ감사합니다~ 삶의 우발성, 무의미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또다시 삶을 긍정한다는 것...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기...! 이 말을 당위로 만들지 않으면서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저처럼 아쉬움이 남으시는 분들은 '소-니'로 오세요!ㅋㅋ

  • 2017-01-14 08:03
    동정이나 연민이 필요없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 같아요. 고통받는 이가 아픔을 외면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고통을 스스로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딱딱한 야전침대!) 약자들이 더 이상 몰락할 수 없는 곳까지 몰락하게 하지만 오히려 그곳이야말로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전환점이라는 것. 약자들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걸 이렇게 이해해도 될지는 모르겠네요 ㅋㅋㅋ 이렇게 생각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니체에게 약간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