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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후기 및 7월 16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7-14 09:07
조회
681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는 『우미인초』와 가라타니 고진의 소세키론을 읽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우미인초』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연재한 소설입니다. 『우미인초』는 초기작이라서 그런지 여러 가지 면에서 직접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신랄한 문명 해부가 전에 읽었던 어떤 작품들보다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점, 권선징악의 구도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개운한(?) 결말, 또 고노의 말이나 일기를 통해 소세키의 육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 느껴진다는 점 등에서 그랬죠. 혜원누나는 장난으로 ‘이땐 아직 소세키가 젊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미인초』같은 초기의 다소 기술적으로 미숙한 소설에서 후기의 『명암』같은 성숙한 소설로의 발전을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미인초』를 쓸 당시 소세키는 이미 『문학론』을 쓰고 자신의 문학관을 확립한 상태였습니다. 이 소설을 쓸 당시의 소세키가 이후보다 근대문학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저항 내지는 실험으로 『우미인초』같은, 근대문학의 관점으로 봤을 때 지양되어야 할 소설을 쓴 것이라고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1907년에 연재되었는데, 이때는 루쉰이 도쿄에 있던 시기와 겹칩니다. 그러므로 소세키 소설을 애독했던 루쉰이 『우미인초』역시 읽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글만 놓고 보면 몹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이 1907년 도쿄라는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는 것, 신문에 연재되는 소세키의 소설을 루쉰이 매번 챙겨 읽었으리라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루쉰-소세키의 연결고리이기도 한 『우미인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미인초』는 지금까지 함께 읽은 소세키 작품 중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문명을 비판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연재된 1907년은 도쿄에서 ‘내국 권업 박람회’가 개최된 해였습니다. 소세키는 이 소설 속에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는 두 공간 중 하나로 박람회 장을 선택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마지막 오노의 집) 그만큼 소설 속에서 박람회는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는데, 소세키는 영국 유학중에 이미 프랑스에서 열린 박람회를 구경했고,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런던의 수정궁을 봤습니다. 박람회는 유학중인 소세키에게 화려한 껍데기일 뿐인 서양 문명의 표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이식한 도쿄의 내국 권업 박람회는 껍데기의 껍데기로 보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소세키는 박람회에 몰려든 문명인들을 단 것에 몰려든 개미처럼 무료함을 한탄하며 새로운 것에 모여드는 인간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외부의 자극에 이끌리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강한 자극에 이끌려 박람회장에 와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세력이 다수임을 인식한 후 집으로 돌아갑니다.

『풀베개』에서 소세키는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개성을 짓밟으려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박람회와 더불어 문명의 대표자처럼 그려지는 기차는 인간들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고, 행동의 반경을 엄청나게 넓혀 놓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차에 의해 인간이 땅과 직접 관계할 가능성은 차단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지하철은 기차의 이러한 특성이 극단적으로 된 형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하철을 이용해온 저에게 서울이라는 공간은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공간들은 제 의식 속에 점으로만 존재하고 지하철 노선도 속에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세키는 인간은 기차에 타는 것이 아니라 ‘실리는 것’이며 기차에 의해 ‘운반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세키의 기차에 대한 사유는 단순히 땅과 인간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소세키는 “8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기차는 소를 태우든 말을 태우든, 어떤 사람의 운명을 동쪽으로 어떻게 나르든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한 인간에게는 “백가지 세계가 존재하”며, “개개의 세계는 운명의 교차점에 개개의 중심을 두고 각자의 신분이나 능력에 맞는 원주를 좌우에 긋는”데, 기차는 이렇게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간들의 운명에 무관심합니다.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리듯, 이러한 운명을 싹둑 자르고 나아갑니다. 채운쌤은 근대 이전의 인간들에게 ‘운명’이 주어진 인연조건으로서 각자가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었다면, 근대 이후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회피하고 우회하는 방식으로 자기 운명을 살아내며, 오히려 근대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오롯이 겪어내는 일은 어려운 것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세키는 이러한 모순된 문명 속을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오노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노는 시와 돈 사이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문명의 시가 돈에 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고,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서재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연재소설 작가로서 소세키가 겪었을 현실을 보여줍니다. 연재소설가로서 소세키는 더 이상 글쓰기가 돈과 무관한 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채운쌤은 소세키가 근대에 자신의 운명을 던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소세키는 자기가 놓인 자리에서 떠나고자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근대문학의 조건들 안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또렷하게 의식하고 그것에 저항했던 것 같습니다.

오노는 연재작가로서 소세키가 느꼈을 모순이 극단화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의 학문은 항상 타인의 승인과 돈을 필요로 합니다. 오노가 아끼는 은시계는 천황으로부터 자신의 학문을 승인받은 표식입니다. 또한 그는 시를 쓰기 위해서 후지오의 돈을 필요로 합니다. 이때 오노가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는 시의 세계는 문명의 세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채운쌤은 시는 시간이 멈춘 곳에 있으며, 언어로 행해지면서도 언어적 표상이나 이미지의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는 속도와 표상으로 이루어진 근대 문명과 가장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이때 후지오는 오노에게 시와 문명이라는 대척점에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움켜쥘 수 있는 가능성으로 등장합니다. 후지오는 오노의 시세계를 알아주며, 동시에 그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후지오야말로 근대가 작동하는 방식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근대는 박람회와 같은 환상을 매개로 인간들을 돈에 묶어놓습니다. 자본주의는 ‘시’라고 하는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것 역시 자신을 견고하게 하는 환상으로 동원할 수 있습니다. 소세키는 문명인들이 “시인의 노래보다 시인의 행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시가 하나의 표상으로 소비되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지오는 환상에 돈을 매개해서 작동하는 근대 문명을 체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채운쌤은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후지오에 대한 소세키의 경멸은 여성혐오의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소세키가 영문학에 대해서 느낀 불쾌감과 같은 층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노와 후지오가 『우미인초』의 한 축을 이룬다면 반대쪽에는 무네치카와 고노의 세계가 놓여있을 것입니다. 고노는 외곽에서 조망하고 관조하는 자입니다. 고노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직접 행동하는 일은 없습니다. 독자는 고노의 목소리를 대화보다는 일기에서 더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노는 분명 이 소설에서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소세키는 편지에서 맨 뒤에 나오는 고노의 비극론을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노의 비극론은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되서 골치였는데, 채운쌤은 고노의 비극론이 소세키가 근대를 바라본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하셨습니다. 근대는 삶을 향해서만 나아갑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말이죠. 화려한 박람회장과 운명의 매듭을 자르고 나아가는 기차의 세계에 죽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소세키는 고노의 비극론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고노가 말하는 도의는 사랑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도의입니다. 소세키는 오노와 후지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랑’이라는 것의 허위와 기만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환상을 실체화시키고 거기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지요. 소세키는 이미지를 매개로 작동하고, 희극적인 것들, 즉 선택의 차원의 허무한 것들을 실체화 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근대적 삶 이전의, 이런 것들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고민하며 ‘도의’를 이야기한 것이겠습니다. 여전히 고노의 비극론은 확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만 써야겠네요. 채운쌤은 ‘죽음’을 키워드로 에세이를 써보는 것도 재밌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쉰과 소세키 모두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고, 각자 병에 의해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기도 했죠.

이번 주에는 <갱부>와 수영누나가 올려주신 고진 글 읽고, 공통과제와 암송 준비 해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가 에세이인 만큼 무엇을 주제로 에세이를 쓸지 공통과제 뒷부분에 짧게 적어 오시면 좋겠습니다.

발제는 감자. 간식은 현옥쌤과 윤진쌤.

토요일에 뵙겠습니다~다들 정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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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4 11:02
    건화 요새 무지 바쁘다는 말 듣고 살짝 찔렸는데~~~~ㅋ 바쁜 와중에도 이리 세세하고도 멋진 후기라니~~~ 역시!

  • 2016-07-14 17:14
    꺄악. 역시 멋있음! 모두가 날 건빠라 하는데 정작 건화는 날 안티로 아는 이상한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