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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21. 동사서독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05-25 14:31
조회
528
오랜만에  - 아, 생각해보니 이번 학기 처음인 것 같네요. 1시 반 이전에 수업 시간에 가 있었던 것이 말이죠. 하하.

어쩌다 보니 제 의지와 상관없이 알바가 없어지면서 토요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본 수업 전 낯선 풍경, 모두 각자의 외울 분량을 들고 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거나 한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신선한 장면이었어요. 이윽고 암송시간이 시작되었는데, 오잉, 흑기사 제도가 있더군요.  이게, 잘만 활용하면.... 않을까. 하는 잔머리를 살짝 굴려보게 하더군요. 다음 사람만 잘 고르면 무사히 벌금이 모면된다니, 누구를 골라야 될지가 대충 보이는(거의 상태가 매주 비슷하지 않나요ㅋㅋ) 게 함정이네요. 그리 수명이 긴 제도는 아닌듯요?!



아무튼, 요번주엔 뒤늦은 제 에세이 발표가 있었죠. 혼자 읽고 혼자 혼나야(동지도 없이 에너지 만땅인 채운샘께 혼자 후들겨 맞는 거 아닙니까;) 한다는 부담에다, 애초에 '성의 있는 공통과제' 정도로 딜(?)이 된 줄 안심하고 있다가 뒤늦게 허둥지둥 쓰다만 티가 가득한 에세이였던 터라 부끄러움이 몇 배였죠. 샘의 의외로 덜 가혹한(오잉, 웬 자비를.. 감사감사) 코멘트를 듣고 보니, 시간이 더 있어서 몇 장 더 썼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글쓰기의 가장 큰 문제는 이번의 공부가, 내지는 이 작품이 내게 준 영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는데요. 전 그냥 평소의 제 생각을 쓴 것이더라고요. 이것만 보면 사실 소세키는 제게 아무 변화도 주지 않은 거나 다름이 없었어요. 지금까지 취미라고 술술 읽어제꼈던, 줄거리나 분위기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소설들 처럼요. 이 텍스트를 통해 내 생각을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수정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여야 한다는데 말이에요. 사실, 이런 코멘트를 들은 게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제 고질적인 문제인 게 분명한 듯한데, 매번 쓸 때는 리셋이라도 된 듯이 까맣게 잊곤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젠 제 문제를 확실히 알기는 알았네요! 바로 고쳐지진 않겠지만, 다음 에세이 땐 꼭 명심하겠습니다. 최소한 같은 얘긴 듣지 말아야지, 하고 일단 목표를 낮추었어요. 하나씩 고치다 보면 좋아지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문제가 무한정있진 않겠죠!!! 설마!!!


자, 이제 수업으로 가서요. 제가 모처럼 일찍 가서 시동을 제대로 걸었기 때문인지, 평소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수업을 따라잡으려 애썼던 때보다 뭔가 느껴지는 게 더 많았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작년부터 채운샘이 니체, 니체 하셨는데, 전 지금까지 니체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전혀 모르는 상태거든요. 니체를 비롯한 거의 모든 철학자 이름이 주르르 나올 때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음을 비우고 흘려듣곤 했어요. '아, 샘이 유식한 티를 내시는구나. 아, 어렵고 지루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요. 그러다 요번엔 샘이 아주 쉬운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정리를 먼저 해주셔서 그랬는지, 제 마음밭이 비옥하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흥미 있었던 것을 몇 가지 얘기해 보면요. 우선 '모든 신앙은 결국 자기를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요.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라고 해요. 인간은 자신이 참되다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믿지 않으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죠. 이것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감정적 부딪힘들, 특히 신앙을 내세운 부딪힘들이 쉽게 격렬해 지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천국이라는 고통없는 세계를 꿈꾸는 기독교와 같은 사상은  어찌 보면 삶을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는 이상주의라고 볼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은 고통 가득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벌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원죄'라는 말과도 연결이 될 수 있겠고요.  그래서 이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을 자를 믿는 수밖에 없다는 발상을 하게 됐다는 거였는데, 정말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기독교적 사고에 익숙한 원래의 제게는 굉장히 도발적이고 불경스럽게(!) 들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최근의 이런저런 공부탓에 깊어져서(아시는 자는 다 아신다는 그 깊어지고 있는 몽이!!!!!)일까요. 방어나 불쾌함보다는 매우 타당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어요. 조금 더 깊게 공부해 보면 생각할 지점이 많을 거 같아요. 일단 이 주제는 아직은 덜 깊으니 패스.

니체에 대한 이야기가 애초에 나오게 된 것이 루쉰에게서 니체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이 보인다는 채운샘의 말씀 때문이었는데요. 루쉰을 '니체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라고 하셨어요. 미개한 야만의 시대로부터 지금으로 발전해왔다는 사회진화론, 과학, 역사, 진보 등의 단어로 설명되는 '헤겔적'인 사고는 과거보다 지금을 나은 것으로, 결국 현재를 최선으로 보고 나머지를 평가하는 시각인데, 이것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옹호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기도 했다고 해요. 우리에게 이 논리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학교에서 내내 받아온 교육이 이런 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 거죠. 현대 자본주의도 사실 다르지 않은 맥락인 거 같고요. 이렇게 모두가 진보하고 있다고 할 때 니체는 혼자 쇠퇴와 몰락을 이야기 했대요. 동물은 자기가 가진 힘만큼 살아가지만 인간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힘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신일 수도 있지만, 역사나 진보를 참된 것이라 믿는 것도 포함해서겠죠)를 믿지 못하면 살 수 없는 비천한 존재라고 봤죠. 그가 말한 몰락해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부나 사고력, 노동력 같은 인간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회의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모든 것이 부정되고 무너져내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또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이 오히려 반대로 인간에 대한 가장 강한 긍정일 수 있지 않겠어요? 이런 가치에 대한 철저한 회의, 몰락의 지점까지 간다는 점이 루쉰에게 '니체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근거가 돼요.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했던 루쉰의 '적막', '무'의 자리는 기존가치를 그대로 고수한 채로 그것을 참되다 믿고 움켜쥐고 있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죠. 기존의 가치를 전부 회의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 곳이 없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니체가 말한 폐허이고, 그곳이 바로 루쉰이 평생을 분투한 지점이기도 해요. 폐허 속의 인간들이 폐허 밖의 완벽한 곳, 더러움도 고통도 없는 바깥 세계를 그리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면, 처녀에게서 태어나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의 순결함을 통해 더러운 것을 피할 수 없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발상은 극도의 순결주의자의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여기서 '모든 아이는 오물과 함께 태어난다'는 아주 소름돋는 말을 들었는데요(유명하다는데 전 스포일러 없이 깨끗하게 처음 들어서 소름이 돋을 수 있었어요). 오물을 뒤집어 쓰고 태어나는 아이의 현실을 떼어놓고 깨끗하고 순결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없)는 순결주의자는 사실은 생을 긍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어요. 실수를 두려워하는 것, 엉망일 결과가 두려워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 내가 이런 식의 사고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저 자신이 겨냥당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창조가 안 되는 건 생을 긍정하지 못해서라는 거예요. 생의 순간에 자연스럽게 포함되는 오물, 나쁜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자신의 창조에 더러움이 딸려올 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사실은 허무주의자이기도 하고 창조가 불가능한 자이기도 한 거예요. 모든 것을 회의 한 후의 적막의 폐허 속에 서 있던 루쉰은 서양적인 것, 민족적인 것, 혁명, 혁명 가능한 민중이라는 주체, 자기 자신, 그 모든 것을 믿지 않았어요. 어떤 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기도 해요. 마찬가지로 소세키가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자기 의식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모두가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을 구분하고 그 중 하나에 무게를 두는 식의 사고에 익숙할 때, 그 부분 자체를 다르게 보고자 한 지점이 있다는 것, 바로 기존의 가치평가를 부정하는 방식인 거죠. 니체가 말한 '강자'가 '(할 수 있는) 힘을 구성해 낼 수 있는 자'라고 본다면 소세키와 루쉰이야말로 그런 의미의 강자라고 할 수 있어요. 기존의 가치 속에 끌려다니는 노예들(루쉰의 작품에서 '노예'라는 표현을 많이 봤죠)은 관념 속에서 꿈꾸는 자들이기도 하고, 자신을 허위의식으로 포장하는 데 능한 약자이기도 해요. 능동적일 수 없는 이런 자들이 기대를 미래에 투영하며 탁상공론하는 자들이고, 그렇게 루쉰에게 공격을 당했던 자들이기도 하고요. 기존가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노예, 삶에 대한 가치 평가를 능동적으로 구성하지 못하는 모든 약자라는 존재들, 모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이 아닌 무수한 조건들로 돌리는 비겁한 자들, 금수저를 비난하며 흙수저인 처지만을 탓하며 주저앉아 자기연민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과 비교할 때, 스스로 힘을 구성할 역량을 발휘해서 가치 변환을 시킬 수 있는 자였던 루쉰과 소세키의 삶과 글에는 분명히 다른 지점들이 있어요.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를 작품 속에서 직접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이번학기의 좋은 공부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받아적은 걸 다시 옮겨적는 것에 불과한 일인데도 이렇게 힘이 든다는 건 아직 제대로 소화를 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 같아요. 모든 표현들에 채운샘의 또랑또랑 목소리가 가득하네요. 훌쩍.


공지는 수영이나 채운샘이 아래 댓글로 달아주시길 바라고..

(과제는 루쉰 1권 무덤 중에서 '뇌봉탑' 전까지, 그러니까 258p 까지 읽고 공통과제 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분명치 않습니다. 공지 달아주셔용.)

전 제가 할 수 있는 것 - 그날 암송하느라 땀을 뻘뻘흘리던 귀여운 민호군와, 마냥 즐거운 얼굴로 먹잇감의 실수를 호시탐탐 기다리시던 채운샘의 사진을 남기도록 하죠.

모두 토요일에 만나요!

전체 2

  • 2016-05-25 14:33
    아. 공지가 먼저 올라왔군요~ 공지는 공지글을 참고하십쇼~~

  • 2016-05-26 11:03
    언니, 뭔가 삘 충만하게 새학기 시작하는 것 같군요-
    사진은..... 뭐시기하고요-
    암튼 과외 (짤린) 덕에 시작부터 같이하게 된거시 젤 좋습니당!
    씨유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