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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일요일 : 니체, <2강> 비극의 탄생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09-29 15:26
조회
715
안녕하세요, 기력이 다 빠져버린 윤몽입니다.

니체 수업을 엄청 기다리던 일인으로서, 첫째 주 사자와 낙타 얘기가 나올 때만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으며 역시 이 수업을 듣기를 잘했다고 기뻐했습니다만, 이번 둘째 주에는 후기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들어서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갑자기 확 어려워져서 따라가는 게 한 문장, 두 문장, 한두 박자씩 늦는 게 아니겠습니까. 반장 건화가 매주 후기를 쓰는 게 아무래도 좋겠다는 생각을 엄청엄청 많이 하며 고통스런(!)복습을 했답니다. 아무튼 이미 벌어진 일, 매주 후기를 읽으시는 분들이 꽤 많으신 것 같으니 일단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할게요.

강의의 시작은 첫째 주에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부터(강의안 6p 하단)였어요.

나 자신, , 나는 누구인가

니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라고 말해요. 우린 우리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기존 서양철학에서는 ‘나’, ‘세계’라고 할 만한 것이 ‘진리’, ‘신’ 등의 이 세상을 규정하는 단일한 물질, 세상의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여겨요.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우리를 온전하게 충족시켜 주거나 확실히 다 파악할 수도 없고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해서 알려주지도 못하는 데도요. 그래도 인간은 본질, 실체,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찾고 초월론을 버리기가 힘들죠. 이렇게 꼭대기의 무언가를 두고 그것에서부터 나머지 전부를 평가하는 철학은 니체에겐 우리의 몸을 믿지 않는 철학이에요. 니체는 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요. 그것이 심신일원론을 말한 스피노자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는데요. 이건 아무리 이성과 정신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건 몸과 뗄 수 없고, 우리가 몸으로 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인간이 몸이란 우리가 흔히 이렇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 단순한 유기체가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인식을 넘어가는 것이에요. 내가 무엇을 의도하고 인식한 후에 몸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몸의 여러 힘 관계들이 얽혀서 행위로 나아간 후에야 의식이 바로 달라붙는 것으로, 굳이 뭐가 먼저냐를 물으면 몸의 차원이 먼저라는 거죠. 어떤 실존도 실존 자체는 무수히 많은 관계성들, 타자들의 연합인 것이고 우리의 몸은 내가 나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을 늘 넘쳐흐릅니다. 니체에게 몸은 큰 이성이었는데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에 이성과 더불어 함께 작동하는 욕망, 의지, 정서 같은 것들 전체를 니체는 몸이라고 표현해요. 나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그 역동적인 영향관계의 결과일 뿐, 내가 주어 자리에 놓는 나(I)라는 게 따로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나를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을 인식하는 것이 결국 나를 체험하는 것이고요. 내가 이렇게 나 아닌 것들로 이루어졌다면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의 경계도 의미가 없어지게 되죠.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정체성을 부수는 질문, 그러니까 나는 무엇으로 합성되어 있는가의 질문이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이질성들에 대해 묻고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니체철학

니체의 철학은 해독(entziffern: 기존의 정해진 코드를 벗겨내는 수동적 작업)이 아닌 해석(auslegung : 생각을 새겨 넣다, 의미에 대해서 시도하다는 뉘앙스)이라는 말이 중요한데요. 니체 이전의 철학의 목적은 우리의 몸과 정서는 옆에다 밀어 놓은 채 이성으로 하는 ‘인식’과 ‘진리추구’였어요. 어딘가에 있는 참된 것, 진리, 이데아, 궁극적인 무엇,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 이런 것을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것이죠. 이런 진리에 대한 태도를 인식이라고 했는데, 이건 발견과 같은 거여서 그곳에 어떻게 찾아가거나 도달할지를 고민했던 거죠. 그런데 니체에겐 진리는 어딘가에서 찾아지길 기다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점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어요. 수수께끼나 숨바꼭질처럼 내가 가졌던 상식을 전환해서 다른 관점에서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러니 수동적으로 해독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의미가 이런 것일까를 시도해 본다는 의미의 해석이요. 그래서 진리란 니체에겐 해석값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냥 진리가 파악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거예요. 상대주의가 여러 개 중에 뭘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면, 해석은 자신의 관점(perspective)을 변환하는 행위를 통해서 시도해나가는 것이죠. 보통의 사람들처럼 선이나 악으로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라고 나누는 그것 자체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거고요. 그래서 니체에게 철학자는 해석자입니다. 여기에 더해 니체가 철학자를 비유하는 또 다른 이미지가 의사와 예술가인데요. 의사로서의 철학자라는 말은, 철학자가 마치 의사가 사람에게서 안색, 눈빛, 말투 등의 스쳐지나가는 징후를 읽어 환자의 상태를 읽어내듯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고 그 시대가 어느 시점에서 변환하고, 어떤 지점에서 병을 앓고 있는가를 보는 뛰어난 의사와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어떤 예술가에겐 나무가 생명력을 가진 인간보다 더 위대한 실존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또 예술가로서의 철학자인 것이고요. 니체는 우리의 관점이라는 것 자체에 이미 가치평가, 힘의지가 내재되어 있다고 봤는데, 그것은 그가 대상을 어떻게 보고자 했는지의 욕망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어요. 그럴 때 대상에 대한 좋다, 나쁘다는 식의 판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때, 그 판단하는 사람의 관점과 힘의지가 무엇인지 그것을 봐야 한다는 거죠. 아무튼 니체가 자기를 철학자로 규정한다면, 그건 이 세대의 일반 상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다른 시선, 의사나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파악한 것이죠. 그래서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니체‘의’ 철학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읽는 스스로가 의사이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이라고 표현한 것이에요.

비극의 탄생

니체는 지난 시간 배웠든 문헌학에서 출발해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철학으로부터 자기 사유의 출발점을 삼게 돼요. 1872년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이라고 쓰고 학계의 냉소와 비판을 받았던 책을 1986년 책 서문들을 다시 쓰면서 <비극의 탄생 혹은 그리스 문화와 염세주의(비관주의)>라고 고칩니다. 그것이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였고,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의 증거라고 말하죠. 결론부터 말하면 니체는 파국과 비극을 그리는 것을 통해 그 염세주의가 또 다른 힘의지를 보여준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거예요. 여기서 니체의 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디오니소스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니체가 자신의 처녀작을 평가하며 그 속에 후에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중요한 두 가지 요소 - 즉 십자가의 예수와 매칭을 시킬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니체가 적으로 삼는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인식주의 –가 있다고 말해요. 니체는 당시 철학을, 전쟁을 겪고 우쭐해져 있던 독일에서 발전한 합리성을 가장한 현실순응적 철학이라고 평가했는데, 그 핵심엔 독일적인 것을 미화하는 낭만주의, 민족주의가 있다고 봤어요. 그것과의 투쟁이 이 두 가지 개념을 통해 드러난 것이죠.

당시 그리스 문화를 평가하는 주된 방식은 빈켈만이 말한 ‘고귀한 단순성, 고요한 위대함’이었는데요. 니체는 그러한 그리스 문화를 아주 낯선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한 것이었어요. 당시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많은 자유인들이 모여 공연을 보고 그 비극이 던진 문제로 정치토론을 하도록 했던 중요한 장이었어요. <비극의 탄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인데요. 이 두 가지는 예술을 구성하는 충동으로 이것이 결합되어야 예술이 이루어져요. 아폴론이란 빛의 신으로, 태양이 뜨면 개체가 드러나듯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나게 해주는 것, 개별적인 것들을 드러나게 해 주는 원리, 개체화의 원리예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그 개별적인 것이 하나로 녹아드는 근원적인 일자, 즉 개체화원리의 파괴라고 할 수 있죠. 아폴론적인 것은 빛을 통해 낱낱이 드러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그 하나하나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것이죠.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그는 개체화, 그러니까 나는 나, 너는 너, 내가 아무리 너와 가까워져도 네가 될 수 없음, 우리의 실존이 분리되고 찢겨 있음을 말했어요. 모든 존재가 그 존재들이 나온 어떤 근원으로부터 찢겨져서 존재 자체로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고 했던 거예요. 나는 왜 네가 아닌가의 결여감을 느끼며 개체가 찢겨 있는 현상의 너머에는 찢기지 않는 세계, 죽어서야 되돌아갈 수 있는 어떤 충만하고 분리된 세계가 있지 않을까를 생각했고요. 이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는데, 모든 현상이 생겨나는 현상 너머의 유일한 근원적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말로 설명해요. 그 세계에 우린 언어로 가 닿을 수 없고 예술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겐 예술이 중요했어요. 아무튼 쇼펜하우어에겐 개체는 궁국적으로 찢겨진 존재이기 때문에 일시적 만족과 결여를 오갈 수밖에 없고,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어요. 이걸 끊어내려면 의지를 그만두거나(불교적 허무주의) 찢겨짐의 부정을 통해 고통에서 일시적으로 해방에 이르는 방법, 즉 예술 밖에 없죠.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비극을 자기의 찢겨진 실존 속에서 여러 고통을 겪는 인간들과, 그들이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인생을 접는 것, 이렇게 지극한 염세주의로 해석했죠. 그는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이 일찍 죽는 것’이라는 실레노스의 지혜, 그 표면의 말뜻 그대로 인생을 고통으로 본 거예요.

하지만 니체는 그 비극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요.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디오니소스를 가져와요. 그것이 우리의 실존과 또 다른 세계, 이 두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갈 수 있는 것으로 봤던 것이에요. 니체 철학의 키워드라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무엇일까요. 디오니소스는 신과 인간 사이, 그것도 이미 타죽은 인간 태내에서 신의 몸을 거쳐 태어나요. 신이기도 인간이기도, 불멸과 필멸성을 모두 가진 모순된 존재죠. 또 다른 버전의 신화에서는 갈가리 찢긴 후에 그 파편(심장)이 다시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나고요. 아무튼 죽고 찢긴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 두 번 태어났다는 것이 중요해요. 삶과 죽음이 대립적 쌍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 삶이 죽음을, 또 죽음이 삶을 내포한다는 생사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에요. 애초에 찢겨진 상태로 존재하는 신, 온전한 근원에서 찢겨진 것이 아니라 찢겨진 것 자체가 근원이자 실존이라고 말하는 존재인 거죠. 니체가 보기엔 찢겨지지 않은 상태란 없어요.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넘어간 건 실존 너머의 합일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실존의 근원은 실존 그 자체라는 것이고, 실존은 겪는 것, 고통을 당하는 것, 어떤 걸 고스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leiden)이라고 해석한 것이에요. 니체는 우리가 결여되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넘쳐서 그런 것이라고 봤죠. 완벽한 이상태에서 어떤 결여가 생긴 상태가 아니라 나의 의지와 기대를 벗어나 다양한 일이 벌어지는 삶, 이것 자체를 과잉이라고 생각한 거죠. 만남, 헤어짐, 죽음, 늙음, 삶이 내가 쥘 수 있는 것을 언제나 넘어가요. 삶은 진리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상적인 것이고, 삶 그 자체로 오류예요. 니체에게 예술은 자신이 단정 짓고 규정한 일상 세계를 벗어나, 그 가상과 무상함 속에서도 삶의 기쁨이나 본질이 번뜩임을 보여주는 특권적인 것이에요. 예술작품, 소설 속에서 보는 삶의 만남과 헤어짐 등등의 사건은 삶이란 항상 무언가로 넘쳐나며 예기치 않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우리 삶이란 개체의 차원에서는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의 반복이지만 그것이 태어나고 죽는 삶 자체는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불멸이 될 수 있죠. 그리스인들에게 그런 생의 불멸을 형상화 한 것이 신이었던 거예요.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찢겨지지 않은 세계에서 찢겨진 세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찢겨짐을 반복하는 세계에서 찢겨진 채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근원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근원이 굳이 있다면 이 찢겨짐을 반복하는 세계 전체겠죠. 찢겨져야 다시 죽고, 또 그게 생명으로 이어지죠. 찢겨진다는 건 죽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개체화, 그러니까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 재미있죠. 형이상학자들은 근원적 일자를 목적으로 이 찢겨진 실존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찢겨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 이데아, 신, 내세, 영원불멸한 세계를 꿈꿀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개체로 선고 받았고, 이렇게 태어난 것이 우리의 운명이며, 이런 운명을 거듭한 세계만이 영원할 뿐 개체의 실존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원한 세계를 끌어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결국 니체는 삶 너머에 어떤 불멸하는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생사가 반복되는 이것 자체가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며, 비극이 그런 실존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쇼펜하우어가 비극을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이 폐기되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염세적인 것으로 해석했다면, 니체는 이 삶 자체를 완벽하게 긍정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비극이라고 한 거죠. 그 비극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실존을 긍정하는가의 문제를 중요하게 본 것이고요.

니체에게 산다는 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그냥 겪는 거예요. 이 고통을 어떻게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겪어낼 것인가. 이것이 니체에겐 실존을 긍정하는 문제죠. 채운샘은 이만하면 잘 살았어, 하는 식의 우리의 흔한 합리화 같은 것과 다른 차원의 얘기라고 하셨어요. 나에게 이런 사건과 병과 불행이 왔다면 아, 이것도 삶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실레노스의 지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우리의 실존이란 삶과 죽음이 나누지 않은 흐름 속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이에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렇게 말하니 꼭 주역 후기의 연장선을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드네요). 인생이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 실존을 인간의 인식으로 단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모든 삶은 예기치 않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흘러넘치는 상황들에 봉착하게 되어 있죠. 그럴 때 우리 뒤에서 가면을 쓴 합창단이 부르는 노랫말, ‘신들이 그렇게 만든 거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라는 말은 우리는 우리가 겪을 것들을 정하거나 피해갈 수 없으며 오로지 겪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인정해 줘요. 시대와 사회와 자본주의와 부모를 탓하지 않고, 오이디푸스처럼 오로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나아가는 것(여기서 먼저 잠깐 유명한 비극인 오이디푸스의 얘길 하자면요. 신만이 할 수 있을 어려운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앎에 대한 자부심 그 자체였지만, 그런 그도 인간이 뭔지는 알았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죠. 이 비극은 인간이 모든 세상을 알 수 있다는 의식이 커지던 시대에 과연 인간의 앎이란 그렇게 자만할 수 있는 것인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튼 오이디푸스처럼 자기 눈을 찌르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는 것 말고 좀 더 넓게 봅시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몫, 때로는 불행의 몫을 얼마나 당당하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리스 비극은 끔찍한 고통을 받는 인간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랑한 것이고, 실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힘이에요. 니체는 그것을 ‘강함의 비관주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고 말하죠.

채운샘은 이 밖에도 다양한 얘기들을 하셨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개념인 것 같고요. 그 이상은 제 역량을 벗어나는 것 같아요. 샘께서 하신 말씀을 옮겨적기에 급급한 지금 상태론 질문을 던지는 것도 버겁고요; ; 이제 처음 배우는 것이라 아직 니체가 많이 낯설고 어렵긴 하지만, 채운샘이 창피하시건 말건 아무튼 저는 니체가 하는 말들이 엄청 멋있어서 우와~하고 감탄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주는 다시 건화가 후기를 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숨을 돌리는 마음으로 후기를 마칠게요. 다음 주 간식은 건화가 댓글로 달아주길 바랍니다. 그럼 모두 월요일날 만나요.
전체 2

  • 2016-09-30 00:36
    니체가 말하는 실존을 겪는다는 것,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왠지 제게는 이게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자신이 혐오하는 자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루쉰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러나저러나 주어진 것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차이는 그 고통을 (니체에게 병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자기 자신에게로 열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역량의 유무에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통을 달관한 현인의 이미지보다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적들과 싸우며 그들을 해부하고 또 동시에 적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해부한 루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네요.

    간식 얘기는 안하고 사족이 길었네요. 다음 주는 개천절이라 쉬고, 그 다음 주 월요일(10월 10일)에 은정쌤, 성혜쌤, 우진쌤이 간식 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 강의에서는 <반시대적 고찰>을 주로 다루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주 쉬고 그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 2016-09-30 19:05
    윤몽쌤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리는듯 집중력(힘)이 느껴지는 후기입니디.저도 덩달아 졸린 기운을 물리치고 힘을 얻어가요.

    후기를 읽으면 제가 첫 후기쓸 때 감정(잘쓰고자 힘이 솟다가도, 막상 쓰려면 어떻게 문장을 풀어야할지 고민, 겉(생각)으로 안다는 것과 노트에 한 문장또는 pc에 쓸 때 비로소 뭔가 확! 그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윤몽쌤이 짠하다가도 점 점 멎진 후기에 기뿝니다^^

    *후기는 new 나를 발견하는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