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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읽기 1.9 공지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6-01-03 23:30
조회
733

1933년에 쓰인 글들을 묶은 <거짓자유서>와 <준풍월담>을 읽었습니다. 국내외적인 정세나 문단의 상황으로 미루어 루쉰의 생애에서 최악의 시점이랄 수 있겠는데요, 그래선지 대부분의 글들이 여유가 없이 호흡이 가쁘고 짧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용 또한 그때그때의 시국이나 문단의 상황, 또는 지식인 개인의 처사에 대한 즉각적인 비판이나 단평을 담고 있어, 초기작이랄 수 있는, <열풍>에 수록된 글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루쉰 자신의 말대로 ‘코 하나, 입 하나, 터럭 하나’를 쓴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파편들을 모아 작품집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기가 힘들었고, 또한 스타일도 건조하기 이를 데 없어 읽어내기가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분량 또한 감당하기 힘들 정도여서, 사실 끝까지 읽어낸 사람도 많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구요(ㅠ). 글에 대한 호오도 엇갈린 편이었는데, 초기의 글에 비해 애착감이 확 떨어진다는 의견부터, 그럼에도 루쉰의 글은 여전히 빛난다는 얘기, 오히려 이런 글들에서 루쉰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는 평가까지 다양했습니다. 근데, 이 모두가 겉핥기식의 인상 비평에 그친 것이어서 좀 더 깊게 읽어 봐야 이 작품집을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수다들이 토론 시간에 오갔는데, 우리의 역사주석가 옥상 샘께서 당시 중국의 상황을 정확한 연도를 들어가며 정리해 준 내용이 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장성이 강해 시대적인 맥락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없이 그의 글의 의도나 효과를 온전히 따라잡기 힘든 만큼, 루쉰 평전이라도 옆에 놓고 남은 부분을 읽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수업 시간에 중요하게 언급된 거 두어 가지만 정리해 볼게요. 지금까지 읽은, <화개집>, <삼한집>, <이심집>, <남강북조집> 등과 같은 작품집의 제목이 그랬던 것처럼, 이 <거짓자유서>란 이름에도 역시, 루쉰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정신이 담겨 있지요. 이 작품집에 실린 글들은 <선바오>의 ‘자유담’이란 부간에 연재되는데, 언론의 자유가 철저히 봉쇄되던 시기에 ‘자유로운 이야기’라니요, 그 허구성을 이런 식의 제목을 통해 조롱하고 있는 셈이겠지요. 여기에 덧붙여 채운 샘께서는 억압적인 현실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끼는 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전도 현상과 그 메커니즘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요.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 그 부자유를 자신의 힘으로 타개할 힘과 용기가 없을 때 인간은, 그 부자유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식하면서 그 부자유를 누릴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라고 스스로 내면화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몇 번의 의식의 전도가 일어나게 되는데, 대부분의 인간들이 비겁한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식의 자기 기만의 메커니즘에 익숙한 채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고요. 우리의 루쉰이 그 시기의 자유에 대한 담론에서 본 것도, 지식인들의 그 같은 허위의식이나 노예의식이 빚어낸 뒤집힌 풍경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지요. 절대적인 자유의 주재자 같은데 어디 따로 있어서 그게 우리에게 자유를 주거나 주지 않고의 문제가 아닐 텐데도, 우리는 늘 '자유'를 외부의 문제로 사유하려 드는 경향이 있지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나는 자유롭지 않아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허나 자유는, 그것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으냐 없느냐, 즉 역랑의 문제라는 것. 그게 없으니, 우리들 대부분이 지금의 부자유스러운 현실 속에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허상에 사로잡히거나 쉽게 비관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참에, 루쉰을 읽으면서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기 루쉰이 벌인 중요한 논쟁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스저춘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장자>와 <문선>을 둘러싼 논쟁이었지요. 안 그래도 청년들의 수구화 경향을 우려하던 차에, 그들에게 옛 낡은 글들을 통해 문학과 도덕을 수양할 것을 권장하다니, 그것들과 싸워 온 루쉰에게 기가 찰 노릇이었겠지요. 물론, 대상이 되는 책들이나 스저춘 개인이 문제될 것이 아니었지요. 지금의 현실에서 뽑아낸 문제의식이나 맥락과 무관하게 그저 봉건 시대의 삶의 방식을 흉내내라는, 5.4 이후 조금씩 전진해온 발자취를 다시 그 이전으로 되돌리려드는, 이같은 1930년대의 보수적인 풍조가 그에게 절망스러운 것이었겠습니다. 20년 전과 동일한 상황이 꼭 그대로 연출되고 있다는 기시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 역사의 희극적인 반복, 아니 과거의 유령과의 조우는 그에게 적막감을 심화시켰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그런 것처럼, 이렇듯 인간도 사회도 역사도 변화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루쉰은 변하지 않는(을) ‘적’들을 향해 비수 같은 글들을 지속적으로 쓰고 또 쓰고, 또 그렇게 쓰다가 죽습니다. 시지포스의 형상이 선연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신화적인 아우라가 드리워지는 듯도 싶고요. 누군가는, 루쉰은 자기를 두고 후인들이 이런 식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루쉰은 자신의 글쓰기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 또한 상처를 입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쓰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업을 감당하고 운명을 살아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 다음 주가 마지막 수업이고, 대망의 에세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루쉰과 글쓰기’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는가에서 출발해, 자신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로 마무리 되어야 할 긴 여정입니다. 전체 작품을 대상으로 하면 좋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일터, 특정 시기의 작품집이나 인상적인 몇몇 작품들을 좀 꼼꼼히 읽고 거기서 글쓰기의 테마를 길어 올려 자기화하면 좋을 듯합니다. 긴 말 필요없겠지요?^^  전 여기서 입을 닫습니다, 합!.


<공지>


1. 읽을 책 : 루쉰 7집 중 <꽃테 문학>


2. 발제 : 수영


3. 간식 : 은남, 태욱


4. 다함께 : 암송, 공통과제

전체 1

  • 2016-01-04 17:23
    다음주에 <꽃테문학>을 마치면 잠깐 숨을 고르겠네요. 자자, 이젠 깊이 읽기의 시간입니다. <무덤>에서 <꽃테문학>까지, 시간상으로는 16년 정도가 되겠지요? 이 짧은 시간을 일단 꼼꼼하게 정리해두셔야 합니다. 무슨 사건이 있었고, 그때마다 루쉰은 어디서 뭘 했는지, 그걸 머리속에 입력해놓으셔야 그의 글쓰기 언저리라도 갈 수 있을 겁니다. 뭐, 다 아시겠지만! 다음 시간엔 루쉰 연보를 각자 상세하게 만들어오시길. 간단한 확인테스트가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