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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읽기 공지(2016.1.2)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5-12-29 20:34
조회
809

확실히 연말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힘든 시기인 듯하네요^^. 한 며칠 가족 행사다, 연말 모임이다 뭐다 하고 쏘다니다 이제사 컴 앞에 서니 루쉰인지 뤼신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가 되어 버린 것 같네요. 불과 3일전에 들었던 수업인데도, 머릿속이 하야니 텅 빈 거 같은 게, 그동안 정말 루쉰을 열심히 읽어왔다고 내심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스스로에 대한 기망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그럼에도 하나 확실한 건, 내가 지금 호랑이 등에 올라타 어디론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는 느낌, 방향도 목적지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분명 다른 어딘가에 내팽개져지리란 예감이 저의 온몸을 휩싸고 돈다는 겁니다. 가끔 어지럽고 두렵기까지 하지만, 두 눈 부릅뜨고 안간힘을 다해 그 등허리를 꼭 붙들고 갈 데까지 가봐야 한다는 마음까지요. 가다가 중도에 내동이쳐지더라도,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까진 생채기와 멍을 문지르고 추스르고 일어나 앞으로 걸어갈 수 있으리라 싶기도 하고요.ㅋ 루쉰을 만나기 전과 지금의 전 이미 다른 인간이고, 앞으로 더 많이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공지 늦어 미안한 마음에 서두가 좀 길어졌네요, 죄송.


지난 시간에, <남강북조집>을 읽었습니다. 이 작품집에 실린 글들은 1932-33년에 쓰인 글들로, 이 시기는 국민당의 백색 테러의 위협이 극에 달하고 그에 따라 루쉰 또한 불안정한 도피의 생활을 반복해야 했던 시점입니다. 어쩌면 그 지옥도와도 같은 삶 가운데서 운좋게 살아남아 쓴 글들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선지, 호흡이 길고 밀도 있는 글보다는, 이전에 비해 길이도 짧고 다소 중량감이 떨어져 보이는 글들이 많은 듯도 합니다. 해서, 살짝 몰입감이 떨어지는 때가 좀 있기도 했습니다만(좀 타성이 붙기도 한 거 같고요), 흐려지는 정신줄을 다잡고 읽어가노라면 여전히 투창과 비수의 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더 깊어진 느낌이 드는 때도 있었고요. 특히 이 작품집의 마지막에 실린, ‘양춘런 선생의 공개 서신에 대한 공개답신’ 같은 글을 읽으면서는, 서늘할 정도의 예리함과 깊이 모를 삶의 깊이가 동시에 느껴져 한동안 책을 덮을 수가 없을 정도였답니다.(암송시간에 현옥 샘께서 이 글을 읊으시는 걸 보고, 규문 망년회 때 전문에 도전해 볼까하는 생각까지 살짝 들기도 했으나, 넘 길어~ㅠ) 여튼, <남강북조집>을 읽으면서는, 적당한 선에서 그를 아는 척하지 말고 끝까지 긴장 풀지 말고 첫마음으로  읽어야겠다고 다잡게 되었던 거 같습니다.


암송 때도 그렇고 조별 토론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망각을 위한 기념’이란 제목의, ‘좌련오열사’ 중 러우스와 바이망을 추모하는 글이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가슴 먹먹하고 목울대가 쉴새없이 꿀렁대지 않았는지요. 자고 일어나면 동지와 제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던 시절에, 살아남은 자로서 느끼는 비애와 회한, 죄의식을 담은 이 글에서, 루쉰은 그 어떤 관념이나 이데올로기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정서와 의식의 바닥을 솔직하게 직시하는 한편, 결코 집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관습적인 형식 속에 갇힐 수 있는 성격의 글임에도, 한 시대를 살다간 이름 없는 한 인간의 살아있는 얼굴과 숨결을 기억해 되살려내고 더불어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아낼 수 있었기에 자기 시대에 대한 진실한 기록이자 ‘사라져간 자’에 대한 의미 있는 기념의 글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1930년대 들어 그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끝내 그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처럼 어떤 명분이나 관념적 허위를 혐오하고 지금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구체성을 중시했던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 덕분일거라 채운 샘은 말씀하셨지요. 다음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지요.


재작년 오늘, 나는 객잔에 피신해 있었지만 그들은 형장으로 걸어갔다. 작년 오늘, 나는 포성 속에서 영국 조계로 도피했지만 그들은 어디인지도 모를 지하에 이미 묻혀 있었다. 그리고 금년 오늘, 비로소 나는 내 본래에 거처에 앉아있고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다.~~ 하지만 뜻밖에 오래된 습관이 잠잠한 바닥으로부터 머리를 쳐들어 위의 글자들을 긁적이게 만든다.


깊은 어둠을 응시하는 루쉰의 모습이 보일 듯하지 않는지.... 그 숱한 죽음들로 인한 비분으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래된 습관처럼 또 애도의 글을 써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가 느낀 건, ‘적막’이 아니었을지. 역시, 그의 글쓰기와 적막이 근원적인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만드는 글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삶이나 사회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비애, 희열, 사랑, 분노, 불만, 미움 같은 즉자적인 감정 상태로는 어림도 없고, 그것들이 다 가라앉아 더 이상 들쑤성거림이 없는 적막감 한 가운데 자신을 놓을 수 있어야 거기서 머리를 쳐들듯이 이런 글이 올라오는 것이지 싶기도 합니다.


채운 샘도 지적하셨다시피, 루쉰의 글을 읽으면서 거듭 느끼는 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거나 멀지 않다는, 생생한 동시대성입니다. 중국의 근대화 초기에 쓰인 글들이, 근대를 넘어 포스트 모던을 들먹이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나아가 강력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우린 그 시대가 남긴 유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루쉰이 제기한 문제들이 인간사의 영원히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숙업처럼 인간을 들씌워온 갖은 허위와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이에 바탕해 타자와 관계를 맺고 주어진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 시대나 우리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은 공통의 과제일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것이, 자신이 맞딱뜨린 당장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타겟을 두고 쓴, 구체적인 걸 넘어 자질구레해 보이기까지한 내용을 담은 그의 글들이 외려 불후성을 얻어 지금 우리 앞에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루쉰이 자신의 글에 품은 소망 또한 그때그때 쓸모를 다하고 바로 잊혀져 사라지는 것이었지요.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하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 앞에 살아남아 마음을 흔드는 위대한 문장들이 다들 이처럼 불멸에 대한 욕망 없이 그때그때 자신의 몸으로 경험한 문제의식을 절박하고 솔직하게 드러낸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거 말고  글쓰기의 정석이나 본령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까지~~.  확실히 루쉰의 글은, 여지껏 우리가 글과 글쓰기에 대해 알게 모르게 품어왔던 낭만주의적 환상이나  불필요한 오해를 걷어내고, 어떠한 허식 없이 자기 앞의 삶과 마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남긴 ‘글쓰기 비결’ 확인하고 마무리 하도록 하지요.


‘백묘’에는 어떠한 비결도 없다. 만약 있다고 해야 한다면 눈속임과 정반대의 논조, 즉 이런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진의가 있을 것, 분식을 없앨 것, 장난 덜 칠 것,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말 것.



<다음 주 공지>


1. 읽을 책 : 루쉰 7집 중 <거짓자유서>와 <풍월 이야기>


2. 발제 : <거짓자유서>-홍명자 샘, <풍월 이야기>-소담


3. 간식 : 수영과 요순


4. 다함께 : 공통과제 및 암송



다음번 수업은 2016년도 둘째날인거군요. 신정을 지내시는 분들은 살짝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마는, 되도록이면 다들 나오셔서 새해 인사도,덕담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해 보지요. 토요일에 뵈어요~~~.

전체 1

  • 2015-12-29 21:23
    1.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연말연시가 따로 어딨습니꺄! 그날이 그날, 매일이 같은 날이지욤. 끄응. 2. 지금이 쌍팔년도 아니고 '신정'이라뉘..ㅋㅋ올드하기 짝이 없슴다. 3. 우리 반장님만 지각 결석 안하시고 오심 됨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