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23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12-18 19:17
조회
555
지난 시간에는 2장 대자적 반복에서 시간의 두 번째 종합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시간의 종합이라는 개념부터 생소한데다가 칸트와 흄, 베르그손 등의 시간 개념, 존재론이 펼쳐지는 장인지라 책을 읽을 때도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수업 시간에는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습관과 현재'라는 항으로 요약될 시간의 첫 번째 종합, 그리고 '기억과 과거'라는 항으로 요약될 두 번째 종합만을 간단히 정리해볼까요.

생명체가 산다는 것은 시간을 종합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채운쌤에 의하면 아메바도 인간도, 세계에 대해 구성하는 어떤 종합이 있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랍니다.
유기체는 종합합니다. 무엇을 종합하는가? 시간의 종합이지요.
하지만 시간의 종합은 칸트가 말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균열을 발견했으나 다시 봉합하고 회귀시킨)능동적 자아의 활동이 아닙니다.
들뢰즈가 생명과 유기체의 차원에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을 말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쥐도 시간을 종합합니다. 어떻게? 쥐를 이루는 온갖 근육과 혈관과 신경을 통해.
매순간 맞닥뜨리게 될 즉자적 사태 앞에서 모든 유기체의 모든 부위는 그것을 자기 식으로 붙들고 융합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응시와 수축이라 부르고 이에 의해 형성된 습관에 의해 존재는 현재를 구성한다고 설명하지요.
순간과 요소를 수축해 현재를 펼치기,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를 불러오기, 이렇게 하여 유기체는 시간을 구성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어떤 가상의, 추상적인 내가 아니라 '나들'입니다.
내 근육과 신경과 혈관들. 그것들 하나하나를 들뢰즈는 응시하는 영혼들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응시들이 수천의 종합을 행해 습관을 형성함으로써 유기체가 만들어지는 거죠.
그러므로 나란 곧 내가 응시하는 것들, 내가 맞닥뜨리고 수축하는 것들-타자들이라는 말이 되고요.
다음의 멋진 구절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흙과 습기의 수축이 있고, 이것이 밀알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 수축은 어떤 응시이며 이 응시가 가져오는 자기만족이다. 들판의 백합은 단지 자신의 실존을 통해 어떤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하늘, 여신과 신들의 영광을, 다시 말해서 자신이 수축하면서 응시하는 요소들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 어떤 유기체가 예외이겠는가? 모든 유기체는 반복의 요소와 경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응시되고 수축된 물, 질소, 탄소, 염소, 황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습관들을 서로 얽고 조여 매고 있다." (180)
자, 어째서 능동이 아니라 수동적 종합이 되는지 이해하시겠죠?
정신이 종합하는 게 아니고, (자명한 것으로서의)코기토가 구성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각각의 들끓는 응시들에 의해 수축되는 것일 따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합은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굳이 정신과 결부지어 설명하자면 정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종합에 이어 또 다른 종합이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종합에 의해(순간과 요소를 수축해 구성한) 현재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그 현재는 늘 지나가버립니다.
지나가는 현재가 아니라, 호은 지나가는 현재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시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현재를 지나가게 만드는 것, 현재과 습관을 전유하는 것이 있어야 하죠. 이게 '기억'이랍니다.
우리는 기억이란 능동적 종합이라 생각하지만 들뢰즈는 능동적 종합으로서의 기억이란 재현이며,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종합으로서의 기억이 있다고 구분해 말합니다.
복잡한 이야기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애초 현재가 현재로서 구성될 수 있는 것, 그리고 현재들이 서로 끼워맞춰져 재현(기억의 능동적 종합)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어떤 다른 시간의 차원/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과거'라고 부르지만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나간 현재'의 다른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라리 '순수 과거'라고 부르길 택하는데요, 이는 '한때 있었던' 그러므로 지금은 더이상 없는 과거가 아니라 모든 현재에 항시 있는 것, 항시 있으면서 현재가 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선 장에서 말한 '잠재태'가 여기서는 과거라고 불리는 건데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베르그손의 원뿔 도식을 떠올려봅시다.
내가 지각하는 것으로서의 이 세계가 바닥이고, 그 위를 미끄러지며 이동하는 원뿔이 있습니다.
원뿔의 꼭지점은 '현재'이고, 이 현재를 가능케 하고 지나가게 하는 것으로서 전체 원뿔이 있습니다.
꼭지점을 제외한 원뿔 전체가 과거가 될텐데, 이는 상이한 수준에서 이완되고 수축된 과거지요.
하나의 원뿔 안에 있는 것이니만큼 그것은 서로 공존하며 서로간 수축의 정도차는 있을지언정 그 외에는 일관된 배열과 일관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어떤 것과 마주치느냐에 따라 원뿔을 이룬 서로 다른 수준의 수축된 과거 중 하나를 취하며, 이것이 곧 우리의 현재가 현행화되는 방식이 된다는 거죠.
왜 굳이 '과거'라는 단어를 써서 사람 헷갈리게 하나 싶을 수도 있는데, 현행적 현재와 동시간적이지만 그와 더불어 현행적 현재에 대해 늘 선재하는 것, 그것이 재현될 근거라는 의미에서 충분히(?) 과거죠^^;
예컨대 지금 내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을 가능케해준 전인류의 기억, 그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특정한 현재였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럼에도  지금 컴퓨터를 사용하는 나를 가능케한 과거임이 분명합니다.
현재와 늘 동시적이면서 동시에 그에 선재하는 것으로서 있는 순수과거죠. 다르게 말하면 지금의 내 행위를 현실화시킨 잠재론적 토대.
"과거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면서 내속하고 공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있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 속에 내속하고, 현행적 현재나 새로운 현재와 더불어 공속한다. 과거는 시간의 즉자적 측면이며, 이것이 이행의 최종적 근거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는 시간 전체의 순수하고 일반적이며 선험적인 요소를 형성한다. 사실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결코 현재였었던 적이 없는 어떤 과거에 대해 말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 과거는 어떤 '이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4) 
들뢰즈의 멋진 운명론과 자유론이 여기서 잠시 등장하네요.
운명은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잠재적 차원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이 원뿔 전체에서 어떤 수준의 기억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습관적이고 반응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의 삶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는 -_-

자, 수업 정리는 이쯤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2장의 하이라이트, 시간의 세번째 종합과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응용?을 함께 보겠습니다.
다들 꼼꼼히 정독해오시어요~ 읽는 횟수에 비례해 자기의 멋짐을 마구마구 쏘아보내주는, 고고하고도 고마운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주 후기는 수영, 다음 시간 간식은 락쿤쌤과 주진희쌤께 부탁드립니닷.
모두들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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