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16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12-11 17:46
조회
3624
세미나 참여자들의 후기 순서가 너무 빨리 돌아오는고로 이번 주는 제가 후기 겸해 공지 올립니다^^

후기 시작하기 앞서 지난 시간에 새로 합류하신 두 선생님, 안명애 선생님과 윤희연 선생님께 다시 한 번 환영의 인사를~ 우리 함께 끝까지, 무사히(?) 건너가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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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차이 그 자체>에서 다루는 철학자는 크게 아리스토텔레스, 둔스 스코투스와 스피노자와 니체, 헤겔과 라이프니츠, 그리고 플라톤입니다.
들뢰즈는 이 순서대로 그들의 차이의 철학을 살펴보고 있는데, 얼핏 봐서는 납득이 쉽지 않습니다.
역사상 시간 순서도 아니고, 개념으로서 차이를 사유한 철학과 그렇지 않은 철학을 구분해 일관적으로 배치한 것도 아니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에 일의적 존재론이 나오더니 다시 헤겔과 라이프니츠라니, 게다가 제일 마지막이 플라톤이라니;
강의를 듣고 다시 책을 펼치니 이제야 아주 조금 짐작이 가는군요.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로 시작해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은 그야말로 우리가 차이를 표상할 때 그와 가장 가까운 개념입니다.
개체와 개체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차이, 이것이 곧 종차, 결국은 유 안에서 합치되는 종차가 되지요.
개념 안의 동일성에 의거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끝내 그 차이는 유 안에서 무화되고 맙니다.
동물이라는 유 안에서 흑인과 얼룩말이 합치되고, 식물이라는 유 안에서 파리지옥과 무궁화가 합치되는 것처럼요.
이와 같이 차이를 사유하는 형식을 '유기적 재현'이라 합니다. 이
때 차이는 재현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의 '반성적 개념'이 됩니다.

하지만 차이란 실로 재현 불가한 것, 비개념적인 것이라는 게 들뢰즈의 주장인데, 이와 맞물려 '존재의 일의성'을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둔스 스코투스에서 시작해 니체의 영원회귀까지 이르렀을 때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건, 차이는 이 사물과 저 사물에 대한 술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존재 그 자체가 차이라는 것, 왜냐하면 존재는 일의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존재는 단 하나의 목소리 위에서 모든 개별 양상을 가능케 하고, 개별 양상들은 서로 다르게 있으면서 존재를 언명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죠.
아직 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둔스 스코투스와 달리 니체에 이르러 이제 신조차 사라지고 선별하는 것으로서의 영원회귀가 출현합니다.
'먼저 존재'하는 주체(자아), 모든 것을 '보장하'는 신 같은 건 불필요해집니다.
세계는 부단히 생성되는 것이며, 그 생성이야말로 영원회귀입니다.
무엇이 회귀하는가? 생성이 회귀합니다.
이 세계에서 동일한 게 있다면 오직 하나, 부단한 생성이, 매번의 차이들이 회귀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가 차이입니다. 존재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생성합니다.
하지만 니체 외에도 차이를 사유한 철학자들은 많고, 또 차이를 생산하는 것으로서 주목한 철학자도 많습니다.
그 중 들뢰즈는 두 명의 철학자에 주목하는데 그게 바로 헤겔과 라이프니츠죠.
중학생 수준에서(^^;) 말하자면 헤겔, 하면 변증법이죠.
A의 모순이 극복되어 A는 A'가 되고, 다시 그것에서 드러나는 모순들이 극복되어 지양되면 A''가 나타납니다.
이는 기존의 차이의 철학에서 한층 나아간 것처럼 보이는데요, 왜냐하면 차이들이 극대화되어 드러난 모순이 이윽고 동일자A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죠.
차이를 동일자의 철학으로 만들어버린 시도에 비하면 이는 대단한 발전이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의 지적에 따르면 A의 지양을 통해 A'를 출현시키는 건, 하나의 동일자에 대한 대립물로서 또 하나의 동일자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군요.
끝없이 동일자를 출현시키기, 모순들을 동일자로 승격시키기,에 불과하다는 거죠.
고로 헤겔이 말하는 모순, 차이란 실상 동일자 사이를 매개하는 것, 대립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들뢰즈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짓된 추상 운동이라 말하는 건 이 때문이라고 하네요.
실은 아무 것도 운동하지 않습니다. 대립과 투쟁을 통해 동일자가 탄생하는 것일 뿐이죠.
조 휴즈(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입문)는 이렇게 설명했네요.
“생성의 전개 과정은 대립 혹은 규정적인 부정이라는 수단에 의해 펼쳐지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발달의 전 과정이 ‘하위-재현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립 그 자체가 그것에 대립되는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매개는 대립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는 진행될 수가 없다. 잠재적인 주체 안에는 규정적인 주체도, 부정을 지탱해줄 수 있는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은 자명한 주체가 나타나고 난 이후라야만 가능한 것이다.”(97)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그리고 헤겔을 동일한 이유로 비판한다. 각각의 경우 차이는 더 큰 구조 내에서 기능하기 위해 한정되거나 억제된다. 이 장에서 들뢰즈가 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차이를, 모든 것을 포괄하고 아우르는 어떤 종류의 연속성과 무관한 개체성의 원리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99)


그럼 다음으로, 라이프니츠는 어떨까요?
그가 사용하는 모나드 개념 및 공가능성이 차이에 대해 이전과 다른 사유의 지평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일단 들뢰즈는 개체 이전에 존재하는 무한한 것들, 개체화에 필요한 무한성 등을 사유한 라이프니츠에게 큰 흥미를 느낍니다.
수업시간에 들은대로, 알렉산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수많은 것들 사이의 영향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그런데 여기서도 한계가 발견됩니다.
유한한 개체 안에 깃든 무한성을 사유한 라이프니츠는 바로 그 자리- 무한한 것들이 수렴된 장소를 알렉산더라는 이름으로 묶은 뒤 거기 머물길 택했다는 거예요.
개체성을 깨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계열 안에 무한성을 수렴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하고 말지요.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실재 세계는 최선의 세계입니다. 개체가 잠재적인 것들을 실현함으로써 만든 세계니까요.
게다가 이때 선별의 기능을 담당하는 건 신이라고...
이상과 같이,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주목한 것은 그가 개체가 아니라 개체화를 사유했다는 점, 다르게 말하면 잠재적인 것들을 사유했다는 점에 있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것, 그것을 선별하는 것을 신의 몫으로 두지 않았죠.
여기에서 그의 유명한 '배치' 개념이 따라나온다는군요.
문제는 배치입니다. 배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 질문을 통해 다른 잠재성이 현실화될 기회가 만들어진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칸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합니다만, 들뢰즈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지요.
헤겔이 무한대를 사유하고 라이프니츠가 무한소를 사유한 것도 실은 안 중요하답니다-_-
둘 모두 차이는 동일자에 종속되고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되기 매한가지라고요.
책에서 그는, 주목해야 할 건 칸트 사상의 한 국면이라고 말하죠.
이성 신학을 법정에 세우면서 칸트는 "세계의 일관성과 신의 일관성을 배제하는 어떤 신비한 일관성"에  호소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칸트 공부를 해본 적 없는지라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 지점에서 현대 철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집니다.
문제는 칸트와 싸우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사유 체계, 바로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데 있다는 거죠.
(헤겔, 하면 변증법이듯^_^;) 플라톤, 하면 이데아죠.
이데아-사물-허상으로 이어지는 플라톤의 위계는 아주 명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의미심장한 지점이 여기 도사리고 있습니다.
채운쌤 말씀에 따르면 그건 허상들의 존재입니다.
사물과 허상을 구별할 때 플라톤이 꾀한 것은 물론 가짜 지망자와 약한 경쟁자들을 없애는 것이었으나, 들뢰즈가 볼 때 플라톤 철학에는 이미 플라톤주의를 전복할 요소가 있으니, 누구도 아니고 플라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지상의 모든 것을 시뮬라크르라는 것, 이데아에 종속되지 않는 힘이 지상의 모든 것을 구성한다는 것을 말이에요. (...이건 플라톤이 아니라 들뢰즈가 경이로워지는 지점;)

플라톤주의가 보여주는 이 두 개의 지점, 즉 원본에서 시뮬라크르까지 이어지는 위계 관계, 그리고 개체화된 모든 것으로서의 시뮬라크르- 이를 가지고 니체의 영원회귀로 돌아와보면 보다 재미있는  독해가 가능해집니다.
영원회귀는 생성이라고, 생성의 반복이라고, 그것은 선별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앞에서 말했었죠.
하여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회귀는 일종의 패러디입니다.
아마도...이미테이션, 짝퉁, 표절이라는 말과 다르게 패러디라는 단어에는 원본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기 때문이겠죠.
잘 모르는 가운데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앤디워홀의 마릴린 먼로나 코카콜라 작업 등을 떠올려보면  패러디는 원본을 흉내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해 결과적으로 원본을 더 높은 곳에 세워두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과 이미지들 사이의 위계를 소멸시키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마릴린 먼로의 웃는 얼굴과 마오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신성한 것으로 추앙하고 그것을 살리려는 목적은 애당초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영원회귀는 패러디의 성격을 갖습니다.
영원회귀의 선별 작업을 거쳐 돌아오는 것들은 모두 서로 다르고, 위계가 없고, 하나의 동일성에(원본에 속한 것으로서의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은 채 괴물 같은 형상으로 출현합니다.
영원회귀가 가져오는 것은 오직 시뮬라크르들 뿐입니다.
세계에는 오직 무한한 시뮬라크르들이 있을 뿐입니다.  존재의 일의성은 그 무한한 시뮬라크르들을 통해 구성됩니다.
수많은 다른 잠재성들이 일의성의 평면 위에서 (존재론적으로)동등하게 출현합니다, 각각이 하나의 허상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영원회귀는 각각의 사물이 오로지 되돌아오는 가운데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영원회귀는 사물이 무한히 많은 모사들의 모사이고, 때문에 원본도, 심지어 기원조차 계속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영원회귀는 '패러디'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해진다. 즉 영원회귀는 자신이 존재하게(그리고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에 허상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영원회귀가 존재(비형상적인 것)의 역량일 때, 허상은 존재하는 것-'존재자'-의 참된 특성 호은 형상이다. 사물들의 동일성이 와해될 때, 존재는 거기서 빠져나와 일의성에 도달하며, 차이나는 것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 혹은 되돌아오는 것은 결코 이미 구성된 선행의 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 사물은 자신을 갈가리 찢는 차이로 환원되고, 이 차이 안에 함축된 모든 차이들을 통과하며, 그 차이들로 환원된다. 이런 의미에서 허상은 상징 자체이다."(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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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래서 차이가 정확히 뭐라는 건지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게 분명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1장이 이렇게 끝나버렸네요.
다음 주는 2장 대자적 반복입니다.
여기서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지만, 머리말과 서론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들이 이렇게 저렇게 차이화하며 등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겪고 겪고 하다보면 책이 끝날 때쯤 뭐라도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자, 그러니 모두들 부디 포기하지 마시고요^^ 2장 꼼꼼히...는 물론 힘들겠고; 일단 성실하게 읽어오시고, 질문들 준비해오셔요.
세 가지 종합을 중심으로 읽으시라는 채운쌤 말씀 한 번 더 전합니다.

간식은 은남쌤과 하동쌤~

그럼 모두들 다음 주에 만나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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