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127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1-16 14:51
조회
794
빰빰빠밤~ 복음 전합니다 복음 전합니다~ 채운쌤의 짧은 외유 덕에 다음 주 휴강합니다아~~
한 주의 시간이 주어진 만큼 전에 공부한 것들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복습도 하고.... 그러면 참 좋겠단 생각을 일단은 해봅니다. -_-
왜 하나의 일정이 빠져도 시간이 더 생기는 건 아닌지 참 알 수가 없지요ㅋㅋ
이것이야말로 시간이란 크로노스적이지 않다는 것,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혹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재적 조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듯합니다.
개체가 역량을 펼치는 정도와 시간은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
암튼, 담주 휴강이다 병선아. 수업 두 주 안 나오다 휴강 때 나오면... 뭐 그것도 재미나긴 하겠지만..
후기는 수영, 간식은... 그날 못 정했는데, 일단 병선이-_- 그리고 제가 할게요.

하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삶의 고통, 그것이 죄의 증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방법은 하나다. 이 삶을 견뎌내는 것. 참고 견디고 숙이는 만큼 인간에게 구원의 문이 열릴 것이므로. 이 땅과 달리 구원의 세계는 영원하고 변치 않을 것이다.

둘, 삶은 불확실하고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왜 불완전한가? 이 땅의 모든 것이 이데아의 모방물이기 때문이다. 형상을 형상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 우리가 형상을 보고 분별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이데아 덕분이다. 이데아는 절대적이며 본질적이고 선험적이다.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적 세계관과 플라톤 형이상학은 한곳에서 만납니다.
바로 이 세계 바깥의 장소, 이 세계를 만든 의도 혹은 원리가 숨어 있는 장소, 곧 초월적 세계죠.
예측 불가능한 이 세계를 긍정할 역량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든 이 세계를 그리고 이 세계를 살아야 할 이유를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발명품 - 니체는 저 두 개의 사유를 그와 같이 간주했습니다.
세계를 긍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서 나온 불쾌감의 산물이라는 거죠.
덕분에 이제 우리가 실제로 발 딛고 사는 세계는 하찮기 짝이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맙니다.
이곳은 구원의 세계 입성을 위해 잠시 들렀다 가야 하는 방이거나 다리요, 소량의 절대적인 것에 온갖 불순물이 섞여 들어간 불량품... 한 마디로 대지는 죄 많은 땅, 삶은 고통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이를 ‘허무주의’라 불렀고요.

하지만 세상은 정말 가치 없는 것이고, 생은 그 자체 허무한 것인가? 이처럼 반문하면서 니체는 ‘대지의 철학’을 내놓았습니다.
삶 바깥에 다른 삶은 없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부다, 단 그것은 매번의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는 자, 영원회귀를 통과할 수 있는 자에게만 선물이 될 것이다...

채운쌤 말씀에 따르면 이 같은 초월론/목적론 비판을 엄밀하게 논증하는 것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랍니다.
논리에 기댄 논증적 서술방식보다는 웅변과 노래의 정서와 리듬을 따르는 니체의 텍스트에서는 확실히 영원회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들뢰즈가 이를 시도했군요.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주체와 목적을 상정하지 않고서 말하기. 신의 의도나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 마땅히 되어야 하는 상태와 가야만 하는 도달점 따위를 상정하지 않은 채로.
들뢰즈는 이를 물질적 차원과 비물질적 차원에서 두루 고찰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차이와 반복>의 4, 5부래요.
생명의 진화, 수학의 미분방정식, 예술, 사유와 배움의 문제 등등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기원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기원은 기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 “모사는 물론이고 최초의 원본도 부인되는 세계 안에서만” 설정될 수 있습니다.
“근거와해” 안으로 빠져든 세계 안에서만 기원,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요.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현실화된 모든 것은 잠재적인 것의 내재적 힘에 따른 분화에 의한 것이다.

4부의 제목이기도 한 ‘차이의 이념적 종합’이 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차이들의 장 안에서 일어나는 이념적 종합, 그에 의해 잠재적인 것이 분화, 즉 현실화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규정적인 것이 규정적인 것으로 됩니다.
물론 여기서 ‘이념’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 필요가 있지요.
들뢰즈는 자신이 이 개념을 칸트로부터 가져왔음을 4부 서두에서 확실하게 밝힙니다.
플라톤의 이데아(Idee)와 달리 칸트에게 이념(Idee)은 개념 이전의 선험적인 것, 개념의 씨앗, 하나의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칸트는 충분히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념을 선험적 조건으로 그리는 데 그쳤을 뿐, 사유 발생의 조건 자체를 사유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의 생성론은 칸트가 멈춘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칸트적 개념은 전복되지요.
이념은 무엇인가? 채운쌤 말씀으로는 후기 철학에 가면 이 개념어 대신 ‘욕망’이 사용된다지요. 이념은 욕망이고 다양체입니다.
이 책에서는 ‘문제제기의 장’이라 표현되는 이념의 장은 그러니까 욕망들의 배치입니다.
다시, 이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화되는 것, 규정적인 것, 개념으로 출현하는 것 이전의 잠재적 차원입니다.
그것은 현실화된 것과 동등하게 실재하는 것, (현실화된 것에 정체성을 부여한 뒤 소급하는 형식을 취하는 ‘가능성’의 차원과 다르게) 차라리 어떤 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욕망과 역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체 발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잠재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힘 그 자체에 의합니다.
(화엄 사상에서는 이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해 理事無碍라 하는 것 같습니다...)
차이들이 우글거리는 장 그 바깥에 의도가 있지도 않고, 우리가 ‘주체’라 부르는 존재가 전적인 원인이 되지도 않지요.(차라리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힘들이 분화라고 해야...)

들뢰즈는 이를 ‘우연’ — 니체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이러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고 고양이가 죽고 구름이 이동하는 이 모든 사태는 완벽하게 우연적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전혀 자의적이지 않으며 또 목적론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의 장 안에서 일어나는 미/분화에 의해 어떤 것이 현실화되고 경험 가능한 대상이 되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를 가지고 개념을 형성하지만, 그 개념은 차이들의 종합에 따른 일시적 효과일 뿐 존재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사태/개체/사유 등등에 대해 표상을 형성한 뒤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그 현실화된 조건을 묻는 것(욕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긍정입니다.
그것은 현실화된 모든 것, 그리고 현실화된 것의 발생론적 장이 되는 차이들의 장에 대한 조건 - 한 마디로 세계에 대한 긍정입니다.
세계에 대한 긍정, 이를 차라투스트라는 우연의 긍정이라 노래했고, 들뢰즈는 이에 대해 길게 주석을 달아놓은 셈이죠.
니체와 들뢰즈에 의하면 결국 우연의 긍정은 매번의 차이가 돌아오는 사태, 곧 영원회귀를 통과해 괴물이 되어 돌아올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습니다)나를 (또 다시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습니다;;)약속합니다.

변태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종종 들뢰즈를 읽으며 강하게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내가 사유라고 착각해온 것을 향해 직접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떤 사유 x의 기미를 느끼는 순간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도 모르겠는 와중에 그래도 드문드문 움직여지는 게 있다니, 역시 책을 읽는다는 건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묘한 경험들 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들뢰즈의 표현대로 이러한 독특성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이때 배움이 시작된다고 하니,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조금은 기대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한 주 잘 쉬시고 그런 중에 공부도 조금은 하시고^^; 27일에 만납시다.

 

 
전체 4

  • 2016-01-18 02:34
    ㅎㅎㅎ 지난 토요일에 무사히 여행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27일날 간식 준비해서 갈게요~!!

    • 2016-01-18 14:11
      그토록 긴 여행일 줄은 몰랐건만... 도대체 얼마만에 보는 거지ㅋㅋㅋ 올 때 특산물(?) 가져오렴.

  • 2016-01-18 21:14
    저번 혼자 질문하느라 귀한 시간 다잡아먹어 죄송 ᆢㅠ 들뢰즈를 절대 바로 이해를 한다는건 어불성설이지 싶습니다.. 그래도 항상 시간이 흘러야 들었던것들이 하나 둘 그나마 뭔가 숙성?도 하는듯요. 저는 주체아닌 배치에서 시작되는 시각이 참 새롭고 그게 요즘 뉴스 사건사고를 볼때 많이 발효하고 있는듯합니다. ^^' 여튼 담에 수업 가게되면 일단 조용히 들뢰즈를 끝까지 들어보려고해요. 제게도 참 기묘한 경험입니다. 들뢰즈의 이런 시각..

    • 2016-01-19 10:44
      정도차는 있겠으나 들뢰즈나 니체, 불교를 처음 접하면 으레 맛보는 충격과 의문 내지 반감 같은 게 있는 듯해요. 쌤 말씀대로 일단은 이 낯선 말들을 귀기울여 들어보고 숙성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좋은 방법 같네요. 한 주 잘 쉬시고, 담주에 뵈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