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차이와반복(4장) 1.13 후기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1-16 11:47
조회
659
* 차이를 이해하는 일, 존재를 이해하는 일


지난 시간, 절탁에서는 <차이와 반복>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 부분을 읽었습니다.
무려 '미분'이라는 수학 용어^^;가 나와서 읽기부터 만만치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미분까지 말하면서 들뢰즈가 풀고싶었던 문제는 무엇인가, 이겠지요.
저야 결론만 쏙쏙 다이제스트하게(?) 받아먹고 싶어하는데요.
<차반> 읽고 있으면 기존 개념, 또 철학과 무관할 것 같은 영역 등을 더듬으며
한 사람이 자기 문제를 풀어가고 새로운 사유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아 괜히 뭉클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4장 제목이 '차이의 이념적 종합' 그리고 5장이 '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이지요.
수업 때 들은 것에 따르면 이 두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나름대로의 실재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글우글한 차이들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사건이 발생하는 데에서 한가지 종합을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출현한 경험 세계가 독특한 방식으로 의미화되고 해석되는 차원에서의 어떤 종합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 듣고 옮기고 있을까봐 절탁 후기에서는 매번 조심스러운데요-.-
어쨌든 위의 문제는 니체의 힘의지 - 힘의지가 결국 세계 해석이고, 그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출현한다는 문제를 심화시키며 논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차이와 반복 수업에서 계속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실재real이지요.
대체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
우리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이 실재인가. 그렇다면 꿈이나 무의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분명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재세계라면 실재 세계이지요. 물론 이 때 우리의 실재세계는 우리 표상들의 세계이기도 하죠.
들뢰즈는 우리의(?) 현실세계가 출현케되는 근원적 메커니즘을 살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현실화된 것은 이미 어떤 잠재적 차원을 포함하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는 다르게 현실화될 가능성, 다르게 현실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역량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미분화나 분화. 그리고 차이의 미규정성, 규정가능성, 규정성에 대해서 접근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미분화differentiation와 분화differenciation.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용어들은 아닙니다. 결국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미분화differentiation란 '미세하게 분화된다'?^^; 이 용어는 일종의 잠재적 차원에 더 방점을 찍습니다.
우글우글한 차이의 장 - 이것이 결국 우리의 경험세계의 기반이겠지요 - 그 속에서(?) 아니 그 장을 이루는 차이들은(?)
끊임없이 독특한 비나 관계를 형성해갑니다. "함축된 주름들을 펼쳐내는 과정"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지요.
끊임없지만 또한 변이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채운샘은 "progressive"라는 말도 계속 썼습니다.
그야말로 발생의 근원적 장, 조건 하지만 규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이 끊임없이 관계를 형성하고 규정되는 장, 그러한 과정. 이것이 미분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나름대로 이미 분화된 차원이지요.
분화differenciation는 좀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미분화 과정들 속에서 어떤 불연속적인 구조나 개체가 만들어지는 것.
구별된 종 등으로 현실화되는 것. 이런 것이 분화입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개체로 분화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미분화와 분화는 별개의 과정이 아닙니다.
존재를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과 더불어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개념이랄까요.
차이가 있다가 아니라 - 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차이화하는 차이들의 장과 더불어..... 이해하는 것이요... ^^


'차이의 이념적 종합'이란 미분화+분화의 과정에 다름아닌데요.  조금 다른 점은 개념화의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4장에서 차이를 세 가지 계기를 통해 말하지요. 미규정성 / 규정 가능성 / 무한한 규정성. (참고: p.372)

미규정성이란 일종의 순수 차이의 장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거다/저거다' '나무다' '봄이다' '눈온다' 할 때조차 실재 세계는 그렇게 환원할 수 없는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칭할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 장으로서 '자연'에 대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분명 특정한 방식으로 사건이 출현하고 경험 대상이 만들어지지요. 이것이 '규정 가능성'의 차원입니다.
나무가 나무로 출현하는 것. 미규정성만으로는 자칫 차이 자체가 실체화되고 이 때 차이는 실은 차이를 무화시켜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체가 어떻게 독특한 방식으로 형성 즉 규정되는지도 그 잠재적 차원과 더불어 생각해야 하는 것.
무한한 규정성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대상들이 출현(규정 가능성)하면서 그에 대한 개념적인 규정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규정가능성과 무한한 규정성을 분리해 말하는 것이 잘 이해는 안되는데요.
어쨌든 나무가 나무로 발생하는 것이 규정 가능성이라면 "나무다"라며 의미화하는 것은 '규정성'의 문제와 더 관련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통해 결국 들뢰즈는 존재를 또 사유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존재를 발생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발생의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정신이나 신체나 그 층위가 다르지 않습니다.
분화의 과정 속에서 정신과 신체로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겠지요.

또, 발생의 차원에서 존재를 말하면 존재는 발생 이전 그러니까 일종의 비재非在의 차원과 무관할 수도 없게 됩니다.
쉽사리 이해가가 가지는 않았지만 수업 때 이야기 중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비재非在 혹은 무아無我의 존재론 nobody의 존재론.
규정된 것은 언제나 미규정적인 것과의 연관 속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 때 우리는
존재의 방향(?)을 특정한 이데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고정성에도 갇히지 않는 방식으로 가볼 수 있게 됩니다.


수업 초반에 목적론 비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지요.
목적이나 목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에 비추어 모든 과정이 가치평가(가치절하) 된다는 것.
삶에 어떻게 특정한 방식의 잣대가 들이대질 수 있는가.
각자가 갖고 있는 표상이나 이념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괴로워집니다.
허무는 목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가지 목표에 사로잡혀있었던 자에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존재가 언제나 그것을 무화시키며 또한 발생케하는 조건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 때, 혹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사건이 우리 앞에 닥쳐왓을 때, 아니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경험할 때,
그 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사건을 현실화시킨 우리의 욕망, 또 인식 및 물질세계의 배치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이라면 어쩔 수 없음이 아닐지.
하지만 그 어쩔 수 없음과 맞닥뜨려서만 또한 사유의 다른 가능성도 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싶습니다.


가만가만 잘 듣고 있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 불안한 마음-.-
뭔가 이상한 내용은 채운샘께서 교정해 주시... 겠지만 채운샘은 요번 주 버마에 간다고 하셨으니깐요.
할 수 없이 각자 열심히 공부해 봅시다요?! 곧 올라올 반장님(수경언니)의 글도 잘 읽어보고요!
후기 쓰는데 밖에 눈이 펑펑옵니다.
복잡한 기의 출입, 뭉치고 흩어짐 속에서 요 눈도 오고.... 한파도 있고... 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기(氣)가 이합집산하며 한 여름이 되고, 낙엽도 떨어지고....-.- 이런 것 역시 우리가 미분화+분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하지만 이것만 말해줄 수는 없을 것 같고요.
늘어지는 생각은 여기서 마칠게요. 각자의 겨울 방학(!) 잘 보내셔요^.^

씨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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