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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쿠버의 여름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8-08-28 01:18
조회
287
벤쿠버의 여름

저는 돌아왔습니다. 가장 더울 때 벤쿠버에 가서 2주 정도 숲으로, 바다로 산책을 하면서 지내다가 왔습니다. 책을 얼마나 많이 싸갔던지, 짐을 다시 풀고 보니 ‘어리석었구나’ 싶습니다. 제가 머물렀던 곳은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대학의 대학원생 기숙사 같은 곳이었는데요. 거기 학생 회관이며 법대 도서관이며 앉아서 숙제를 많이 하려고 했는데, 결국 점점 더 게을러지고 말았습니다. 우하하하! 잘 쉬었으니, 다시 건강하게 생활하기로 하고요. 그동안 제가 즐긴 것과 느낀 점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면서 저의 여름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옆의 사진은 UBC 대학 캠퍼스 안입니다. 인디언 장승(토템폴)에는 인디언의 땅에 세워진 대학의 과거, 현재, 미래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토템폴이 저 너머의 태평양을 바라보는 거지요. 이렇게 맑았던 날씨가 나중에는 아래 바다 사진처럼 됩니다.)
  1. 1. 미세먼지를 피해 스모그 속으로


이번에 가장 잘 즐긴 것은 역시 날씨죠. ‘미세먼지 저리가라’의 스모그가 벤쿠버를 덮쳤나이다. 벤쿠버는 여름 날씨가 좋기로 유명하지요. 여름 평균기온이 23도 정도 되고, 긴 일조시간(새벽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덕분에 즐거운 여름을 보낼 수 있어요. 그늘에만 들어서면 천연 냉장고 바람이 불고, 대부분의 집에는 에어컨도 없답니다. 무엇보다 벤쿠버의 가장 큰 자랑이 ‘맑고 깨끗한 공기’입니다. 진짜 정신의 신선도를 높여준답니다. 그래서 많은 중국인들이 벤쿠버로 이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 북쪽에서 산불이 몇 백군데나 나는 바람에 연기가 벤쿠버까지 내려와서 하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게다가 매캐한 연기! 담배 5개비를 피는 것과 같은 정도의 스모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불이 바로 윗동네에서 났다고 생각하고 검색을 했는데요, 무려 10시간 밖에서 타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신의주 불난 것 때문에 고생하는 격이지요. 아, 이 대륙의 싸이즈라니, 이 스모그의 싸이즈라니.

이 나쁜 스모그는 아래 캘리포니아 주의 산불 연기가 위쪽으로 올라온 탓도 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 역시 10시간 밖입니다. 산불의 원인은 지구 온난화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습니다. 벤쿠버도 점점 더워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지구는 둥글고, 우리는 기후라는 조건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저번에 혜원이가 번역해준 인류세 편(<현대사상>)에서처럼, 정말 이 날씨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구나 싶었습니다. 지구에서 기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참, 사람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떠나오는 날,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는 비가 많이 왔습니다. 가을로 접어드는 것인지 길 가 나무에는 단풍도 조금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지구는 멈추지 않고 돌고 있네요.

2. 숲 속에는 곰님이

저의 일상은 몹띠 단순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숲 속으로 가서 긴 산책을 했습니다. 숲의 정기를 받아 글을 쓰리라! (T.T) 여름에도 숲에는 이끼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는데요, 그래도 날씨가 너무 더웠는지 돌 밑에 물기는 말라 있었습니다. 벤쿠버가 속해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는 태평양을 서쪽으로 끼고, 대륙 중서부에 있는 로키 산맥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높은 산과 넓은 호수가 많지요. 또한 깊은 숲도 도처에 있습니다. 숲 속을 걸으면, 갑자기 긴 나뭇가지가 툭 떨어지는 소리에 깜딱 놀랄 때가 많습니다. 여기 저기서 쿵, 쿵, 할 때면 숲을 돌아다니는 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나무인지 알 수가 없어서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합니다.

침엽수림의 주인은 야생동물입니다. 그리고 벤쿠버 산림의 진정한 왕자님은 곰님이시죠.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길에서는 ‘곰 조심하셔요’ 라는 싸인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이번에 저는 야생의 님을 못 뵙고, 그라우스 산에서 지내시는 그리즐리 님을 만났습니다. 곰 중에서 제일 큰 곰은? 북극곰! 제일 무서운 곰은? 그리즐리! 하지만 그라우스 산 야생동물 보호 구역에서 만난 님은 조용하시기만 하셨습니다. 아마도 식사를 막 마치신 뒤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곰을 보고, 곰은 저를 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네요. 카프카의 작품 중에 원숭이가 철창 밖 인간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곰은 저를 뭐라고 생각할까 싶기도 했습니다. 너도 인간이냐? ^^;;

3. 자신감의 한 걸음

저는 여행을 정말 좋아합니다. 기차길만 봐도 가슴이 뛴답니다. 하지만, 실제로 길 위에 서면 어찌나 겁이 많이 나는지요. 그래서 정말 쓸데없는 준비를 많이 합니다. 호신용 호루라기를 목에 건다든지, 과도하게 물을 많이 지고 다닌다든지, 구급상자를 터지도록 챙긴다든지요. 좀처럼 가볍지 못했습니다. 2년 전에 벤쿠버에 살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때에는 아이들 아빠가 대장처럼 여행을 진두지휘했는데요, 온갖 걱정으로 길 위에서 혼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겁을 냈던 것은 여행에 대한 책임을 제가 온전히 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이번 여행은 제가 출발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야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여행 동선을 짜고, 실리적으로 계산하고, 심플하게 문제를 처리하니까 겁을 낼 짬이 없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미래를 당겨 쓸 때 생겨나는 감정이었어요. 또 자신을 믿지 못할 때 갖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감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음 여행을 상상하면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계획했던 일 대부분을 시작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서울 기온은 훅 떨어져 있네요. 스모그의 스케일과 곰의 야생성을 본받아 종횡무진 다시 생활해야 겠습니다. ^^

아래 첫번째 사진은 좋은 공기 즐기세요입니다. 진짜 이 말이 무색한 여름이 되었지만요. 이곳은 휘슬러 산 정상이라 아주 높고 추웠습니다. 안개비가 자욱했는데, 여기에도 스모그가 섞여 있었어요. 그리고 휘슬러 정상에서 본 여름 꽃입니다. 너무 높아서 나무도 별로 없고, 돌이 많았는데도 꽃이 빨갛게 노랗게 피었습니다. 단풍도 들고 있구요. 그 아래 사진은 학교 안 흔들다리입니다. 나무가 크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알류미늄 줄이 나무 기둥에 살짝 기대는 형식으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면, 흔들다리도 올라가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나무들이 자라는 속도가 다르니 조금씩 흔들다리의 균형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사진은 맑은 날 키칠라노 해변입니다. 7시 반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벤쿠버에서는 흔하디 흔한 것이 블루 스카이인줄 알았건만요. 이 하늘은 금방 스모그로 둔갑을 하지요. 그 아래 사진입니다. 매캐합니다. 그리고 그리즐리 님!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한참 뒤에 하는 바람에 그 고혹적이던 자태가 멍~하고 불쌍하게만 나왔습니다.  마지막은 호시노 미치오라는 사진 작가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까마귀 전설을 찾다가 들른, 대학 내의 인류학 박물관에 있는 조각입니다. 까마귀가 첫인간의 탄생을 돕고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이야기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내년에는 옛이야기를 찾아서 더 많이 여행을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아무튼 저의 숭악한 사진 실력 때문에 벤쿠버 여름의 감동을 다 전하지 못하는군요. 아흐흐. . .

전체 3

  • 2018-08-28 11:12
    신선한 공기 맘껏 마시고 현서님도 다리가 나았군요! 무표정하게 날개를 펼친 모습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준비 단계인 것 같네요. 5초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합니다. ㅋㅋㅋ
    곰님의 웅장한 자태란..! 안개 낀 숲을 거니는 그 모습을 보셨더라면 또 감동이었겠네요. ㅠㅜ
    마지막에 까마귀가 출산을 돕는 건가요? 괴물 영화를 너무 봤나, 거북이 등껍질로 아이들을 가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ㅎㅎ

  • 2018-08-28 15:16
    매일 걷는 긴 숲길 산책! 부럽도다~~ 하늘 높이 쭉쭉 뻗어오른 나무들, 정신의 신선도를 보여줄만 하네요. 여행기만 읽어도 상쾌해지네~ 그나저나 얼마나 큰 산불이 난거지. 저 매캐한 연기라니.. 지구인으로써 책임감을 느낍니다 킁킁

  • 2018-08-29 11:43
    역시 그리즐리님은 진짜곰이었군요. 퀭하니 무심한 표정 때문에 가짜라는 평이 우세했었는데.
    신의주 산불이 부산까지 가는 스케일이라니... 북미는 정말 어마무시 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