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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쓸 때 참고하셔요~!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5-11-02 17:50
조회
901
에세이 쓸 때 참고하시라고 (+ 우리가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지 말라고?!) 채운샘께서 참고 글 몇 가지를 주셨네요.

1) <<루쉰>>(다케우치요시미>에 대한 서평(유세종)
스크랩 되지 않아 주소 달겠습니다. http://blog.naver.com/ucsdkim/10051505619

2) 기사. "이제 리영희의 루쉰에서 전우익의 루쉰으로!" - <루쉰 전집>발간에 부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5880)
기사는 아래에 붙일게요.~

"이제 리영희의 루쉰에서 전우익의 루쉰으로!"
[프레시안 books] <루쉰 전집> 발간에 부쳐

이욱연 서강대학교 중국문화전공 교수 2011.01.21 18:14:00






루쉰(魯迅, 1881~1936년) 전집 완역 작업이 첫 결실을 맺었다. 1차분 3권이 출간된 것이다. 1차분이 나왔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소설과 산문, 시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루쉰의 저작은 양도 방대하지만 여간 난해한 게 아니다. 그런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첫 결실을 맺은 역자들에게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

루쉰은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 근대의 중요한 사상 자원이다. 하지만 그동안 단편적인 번역 작업밖에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번 전집 출간은 의미가 크다. 루쉰을 보다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루쉰 독서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다. 이번 루쉰 전집 1차분은 한국의 루쉰이라 불렸던 리영희 선생이 가실 무렵에 나왔다. 기뻐하셨을 것이다. 평생 루쉰을 즐겨 읽고 루쉰처럼 살았던 사람이 리영희 선생 아닌가. 저 세상으로 가는 길에 당신이 기뻐할 만한 선물이 될 것이다. 루쉰과 리영희는 청년과 진보의 상징으로서 하나이고 겹친다. 리영희 선생은 가시고, 당신이 평생 읽었던 루쉰의 글들은 전집이라는 새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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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 전집 1>(루쉰 지음,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우리가 루쉰을 읽은 것은 이육사, 이광수 시절부터였다. 하지만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루쉰은 우리에게 거의 잊혀졌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만 간혹 읽혔다. 중국 민중의 우매함을 풍자한 소설가 루쉰은 있었지만, 어두운 중국 현실에 던지는 투창이자 비수였던 글을 쓰고 몸으로 그것을 실천했던 지식인 루쉰은 사라졌다.

루쉰이 마오쩌둥이 제일 존경하던 문인이었던 까닭에 루쉰은 더욱 냉전의 주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루쉰은 잊힌 기억이었고, 그저 중국 소설가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리영희 선생이 루쉰을 다시 불러왔다. 중국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진보의 상징으로 다시 불러낸 것이다.

1970~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무렵 대학을 다니던 청년들 중 많은 이들이 리영희 선생의 글을 통해 루쉰을 알고, 루쉰의 산문을 읽었다. 중문학도였던 나 역시도 그러했다. <아Q정전>의 작가에게 중국 현실과 중국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촌철살인의 산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글들에 빠지게 된 계기가 리영희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 만남의 인연은 길어서, 내게 루쉰은 평생의 공부 대상이 되었다. 물론 루쉰이 계기가 되어 리영희 선생과도 만났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루쉰 산문집을 내려고, 리영희 선생에게 서문을 부탁드리러 화양리 댁을 찾아가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때 사모님이 내주셨던 수육과 매실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리영희의 글을 통해 루쉰을 만나고 루쉰을 통해 인간 리영희를 만난 셈이다.

리영희는 왜 한국인들에게 한동안 잊힌 루쉰을 한국 지식인들에게, 청년들에게 다시 불러냈는가? 당시 어두운 한국 현실에 루쉰의 글과 사상이 여전히 적실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당시 한국 현실에서 볼 때, 루쉰의 글과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루쉰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쉰이 바로 최근의 한국, 심지어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와 그 속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착각을 느낄지 모른다"라고.

리영희 선생에게, 그리고 당시 리영희 선생의 소개를 따라 루쉰을 읽었던 많은 한국 청년과 지식인에게 루쉰은 더 이상 중국의 루쉰이 아니라 한국의 루쉰이었다. 그의 글은 중국 사회와 중국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겨냥한 것으로 읽혔다. 루쉰은 자신이 살던 중국의 현실을 탈출 전망이 없는 철의 방으로 비유하였다. 아무런 탈출 전망도, 희망도 없는 철의 방 같은 어둠의 현실, 거기에 갇혀 저항도 없이 죽어가는 민중들, 루쉰의 많은 글들은 이런 중국의 현실에 나온 것인데, 리영희와 당시 한국의 루쉰 독자들은 그런 중국 상황에서 그 당시 한국을 본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한국의 상황이 바뀌었다. 민주를 이루었고, 언론의 자유도 찾았다. 그렇다면 이제 루쉰은 과거형이고, 이번 루쉰 전집의 발간은 과거의 추억을 보존하는 일에 불과한가? 루쉰은 자신의 글들이 하루 속히 썩어 없어지길 바랐다. 자신과 자기 글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을 소망한 것이다.

루쉰의 바람과 달리 그의 조국인 중국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루쉰의 창 같고 비수 같은 글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적어도 고문으로 청년들이 죽임을 당하는 시대는 아니다. 요즘 청년과 지식인들이 예전보다 루쉰 글을 덜 읽는 것도 이 때문이리다.

이 차원에서만 보자면, 한국에서 루쉰의 시대가 저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리영희의 많은 글들이 과거형의 되었듯이, 리영희의 루쉰도 많은 부분 분명히 과거형이 되었다. 이것은 리영희를 위해서, 루쉰을 위해서, 무엇보다 한국 사회를 위해서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분단과 냉전이 가시지 않는 한 리영희의 관련 글들은 여전히 미래형이듯이, 한국에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 과제가 남아 있는 한, 루쉰은 과거형이자 미래형이다. 루쉰 전집 번역, 출판을 계기로 리영희의 루쉰을 넘어 다시 새로운 루쉰 읽기가 필요한 것은 그 미래형 때문이다.

루쉰의 미래형과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 루쉰 독서사에서 리영희의 계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루쉰 독서 계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우익 선생의 루쉰이 그것이다. 전우익 선생은 농사를 짓는 틈틈이 평생 루쉰을 읽어왔다. 물론 일본 서적을 통해서였다. 어쩌다 꼭 완행열차를 타고 봉화에서 서울에 오실 때면 당신이 구한 일본 책을 복사해서 넘겨주시면서 그 분이 강조하던 루쉰은 리영희 루쉰과 겹치면서도 다르다.

리영희의 루쉰이 근대 계몽주의자 루쉰으로 주로 루쉰의 후기 사상과 글에 강조점이 찍혀 있다면, 전우익의 루쉰은 근대 적응과 동시에 근대 극복으로 나아가는 루쉰으로 루쉰의 초기 사상과 글에 방점이 찍혀 있다. 평생을 진정한 야인(野人)으로 살았던 전우익 선생이 읽은 루쉰은 요즘 나의 고민도 그렇고, 중국과 한국의 일부 루쉰 연구자, 일본 이토 토라마루 등의 루쉰 연구자들의 관심과도 연결된다.

ⓒ프레시안(손문상)


이번에 출간된 루쉰 전집 1차분에는 루쉰 초기 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전우익 선생이 주목한 것은 루쉰의 이들 초기 글들에 자주 등장하는 노예성의 문제와 '개(個)'의 사상이었다. 이들 글은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나온 루쉰 후기 글들과 달리 근대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루쉰의 문명론적 사유를 담고 있다.

루쉰은 모든 문명은 편향 발전한다고 보았다. 새로운 시대가 앞 시대를 부정하고 앞 시대의 잘못을 바로 잡는데 치중하다 보면 거기서 또 다른 편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한 편향은 근대 역시 예외가 아니기에 루쉰이 전통 사회와 동시에 근대 사회를 비판하였다. 동아시아 근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우리의 이광수와 루쉰이 갈리는 지점도 여기이다. 둘 다 일본 유학 시절에 약육강식의 진화론에 빠졌지만, 진화론과 더불어 니체에도 심취했던 루쉰이 근대주의자 이광수와 갈리는 지점이다. 루쉰은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을 동시에 사유하였던 것이다.

루쉰은 과거 전통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다수를 학대하던 시대였지만, 근대 대중 사회가 되면서 다수가 한 사람을 학대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루쉰의 고민은 근대 계몽주의 차원을 넘는다. 한 사람이 다수를 학대하는 전통 사회를 철폐하고 근대 계몽 사회를 만드는 것도 루쉰의 관심이었지만, 동질화, 균질화가 특징인 '다중(多衆)'의 근대 사회에서 다수가 한 사람을 학대하는 근대의 어둠을 동시에 극복하는 것도 루쉰의 극복 대상이었던 것이다.

근대 대중 사회를 고민하면서 루쉰은 진정한 자기됨, 자기의식, 자기 주체성을 지닌 개인을 강조하였다. 루쉰의 개인에 대한 강조는 근대 개인주의 차원이 아니라, 니체의 생각과 많이 가깝다. 루쉰이 보기에 다수가 공유하는 동일한 사상과 행동을 강요하는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와 다수의 사상에 물든 채 그것을 진정한 자기 생각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현대판 노예들이다. 자기 생각과 자기 사상이, 참다운 자기됨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루쉰 전집에 담긴 루쉰 초기 글에는 주인과 노예에 관한 언급도 자주 등장한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 주인을 타도하고 노예를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참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노예와 주인 사이의 진화론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루쉰의 궁극적 관심이다.

루쉰은 노예가 과거 자신의 주인을 타도하고 새로운 주인이 된다고 해서 주인과 노예 관계가 철폐되거나 노예성이 사라진다고 보지 않았다. <아Q정전>에 나오는 아Q처럼 주인을 타도하고 이제부터 내가 재물도 여자도 모두 차지하겠다는 식의 혁명은 그저 주인 바꾸기 식의 노예식 혁명이다. 이는 주인 자리를 차지하려는 주인 자리 뺏기 싸움에 불과하고, 여전히 진화론의 패러다임 안에 있다고 본 것이다. 노예와 주인 사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제3의 시대를 여는 것, 윤리적 혁명의 시대를 열기 위한 루쉰의 고민을 루쉰 초기 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은 과거형이자 미래형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루쉰 전집 번역과 출간 작업을 계기로 한국의 독자들이 과거형 루쉰에서 루쉰의 역사성을, 미래형 루쉰에서 근대에 대한 통찰과 새로운 문명론적 비전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루쉰은 자신의 글이 꽃을 위해 기꺼이 썩는 들풀이 되길 원했다. 루쉰 전집 출간을 계기로 루쉰을 다시 읽으면서 루쉰의 글이 우리 사회에서 그런 들풀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






전체 2

  • 2015-11-02 17:52
    우리의 루쉰입니다.... ,Umhehehehe.....어허허허ㅋㅋ

  • 2015-11-02 19:37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벼리시라는 의미에서 일독하시길 권하고요, (혹 아래 태욱샘 공지글을 안 읽으신 분들은) 아래 글에 제가 달아놓은 댓글도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