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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읽기 12.5 공지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5-11-29 17:13
조회
764

우리의 ‘루쉰 읽기’가 이제 끝이 보이는 지점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간 읽어온 텍스트들을 떠올려 보면 뭔가 미진한 듯 아쉬운 마음이, 다음을 향해 나가는 발걸음을 계속 붙잡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뭔가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기존의 습관적이고도 상식적인 사고틀이나 통념에서 헤어나오기가 왜 이리 어려운 일인지요. 루쉰의 문제의식을 ‘지금, 여기, 나’의 문제 및 상황과 결합시켜 받아들이자고 그렇게 다짐을 하는데도, 읽다보면 여전히 그와 그의 텍스트들을 대상화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 가서 루쉰에 대해 잘난 척할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단순한 앎이 지금의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질 않을 거란 것을 숱한 경험들을 통해 당연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지요. 이번 시간엔 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어, 정신 바짝 차리고 나머지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다시한번 다짐을 했더랍니다.


‘아Q정전’ 하면, 긴말 필요 없는 루쉰의 대표작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루쉰 하면 ‘아Q정전’을 떠올리고, 이 ‘아Q정전’에 루쉰 사상이나 정신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들 말들 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점 때문에 그런지 쉽게 이야기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저 또한 사정이 비슷해, 그 우툴두툴한 불균질성 앞에서 쩔쩔매면서도 그냥 남들이 위대한 명작이라고 하니까 뭔가 있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뭐, 아Q만 그러고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마는. 어쨋든, 이번에 ‘아Q’를 재독하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보려고 애들 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 조에서도 많은 얘기들이 오갔습니다마는, 전 수영의 공통과제에서 새로운 아Q 해석을 살짝 본 듯합니다. 왜 아Q는 집도 절도 가족도 없고, 나이도, 이름도, 소속도 정체불명인 그런 ‘떠돌이’여야 했을까? 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예속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어쩌면 ‘자유와 해방’의 열린 길로 거침없이 나갈 수도 있었을 터. 여러 가능성을 실현시켰을 수도 있었을 그가, 끝내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미없는’ 희생양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를 통해 루쉰이 문제삼고자 한 바를 이 시대의 ‘자유로운 사람들’과 연관지어 새롭게 사유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또한 저희 조에서는 이런 아Q의 모습을 제시한 루쉰이 과연 혁명의 가능성을 믿었는지, 아니 혁명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왕후이는 <아Q 생명의 여섯 순간>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고 지나가는 몇몇 지점들을 눈여겨보고 이를 통해 아Q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흔히 아Q를 정신승리법과 노예의식의 상징쯤으로 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아Q를 파멸로 몰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추는데, 왕후이는 텍스트에 스치듯 짧게 나타나는 그의 본능적인 정서나 몸짓을 해석의 중요한 포인트로 삼습니다. 그가 느낀 ‘실패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름’, ‘무의미함’, ‘공포와 순간적인 자아상실’ 등이 그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나 ‘생각’의 차원이 아닌, 이같은 무의식적 영역의 발현에서, 왕후이는 아Q의 가능성과 나아가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작품 <아Q정전>이 ‘정신승리법의 전형을 창조했다기보다 정신승리법을 돌파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데,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의미영역이 넓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왕후이 해석의 지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왕후이는 서서히 자본주의화되어가는 현재 중국, 다시 말해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해 아Q와 혁명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채운 샘 말씀이셨지요. 더 이상 ‘의식’의 각성이나 ‘생각’의 변화, 그리고 이를 유도하는 선각적 지식인의 존재와 역할을 통해 혁명을 사유할 수 없는 시대에 그걸 가능하게 해줄 근원적인 힘은 무엇일까 같은 문제의식에 대한 시사점을 <아Q정전>에서 찾아내고자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의 우리의 경우를 보면 하나같이 계몽적인 지식인(먼저 의식화된 사람들)이 우매한 민중들을 이끌어 각성시키는 내용의 소설이 대부분인데, 이 작품에는 외려 지식인이 ‘가짜 양놈’처럼 부정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루쉰의 시선 또한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왕후이는 이를 자기의 문제에 맞게 휙 낚아챈 것일테고요. <아Q 생명의 여섯 순간>, 없는 시간 내서라도 일독을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럴 둣해 보여도, 왕후이의 해석이 정답은 아닐테지요. 우리는 우리(나)의 자리에 맞게, 해석 의지를 뜨겁게 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이상 지식이 지성이 소수의 특권이나 전유물이 아닌 시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시대, 소통의 매개들은 넘치는데 정작 소통은 불가능해진 시대, 이런 시대의 대중들과 그 대중들의 진정한 삶의 변화, 나아가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우리는 더 깊이, 생명, 욕망, 본성, 무의식과 잠재적인 차원의 장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듯도 하네요. 진짜 ‘삶의 갱신’을 소망한다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 왕후이 책에서, 아Q의가 느낀 ‘무의미’와 루쉰의 ‘무의미’ · ‘적막’을 연결해 설명한 부분이 흥미로왔는데, 정리 못하고 넘어갑니다. 이와 관련해, 세계에 대해 느끼게 되는 인간이 갖게 되는 ‘無聊’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생각이 필요할 듯합니다.


<다음 주 공지>


1. 읽을 책 : 루쉰 전집 5집 중 <이이집>


2. 발제 : 윤제원(바쁘시겠네~~ ‘주역’ 후기까지^^)


3. 간식 : 김태욱, 전인선 샘


4. 다함께 : 공통과제 및 암송

전체 2

  • 2015-11-29 19:17
    앗, 제원 아니라 재원. 글고, 정신승리법이란게 결국, 습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채운샘의 말씀도 어딘가에 덧붙여야 할 듯요. 에세이 이후에 결석이 부쩍 늘었습니다. 심기일전하시고,ㅈ공부는 항심이라는 거 잊지마시고요. 담주에 뵈서요.

  • 2015-12-03 15:09
    요번 주 뒷풀이, 왕창(?) 모아진 벌금들과 함께 완전 맛난 중국집 가려고 해요! ㅋㅋ 곧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