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805 절탁후기

작성자
이문정
작성일
2015-08-11 11:42
조회
865

예수는 데카당인가 아닌가? 저는 니체가 예수를 데카당 아닌 강자로 그리는 것 같았어요. 예수는 신의 나라가 회개와 기도로 신의 뜻에 복종해야만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으로 ‘죄’, ‘죄의 사함’, ‘신앙’, ‘신앙을 통한 구원’과 같은 개념들이 부정되어서요. 이 개념들은 삶의 고통을 못 견디는 약자들이 갖는 고통 없는 참된 세계에 대한 믿음에서 발생했고, 이 개념들을 없앤 예수는 강자에 가깝지 않나. 신의 나라가 너희 마음에 있다고 하는 순간 인간이 복종해야 할 신의 뜻이라던가 그에 따라 인간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신의 뜻에 얼마나 따르는 지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믿음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신의 뜻에 따르지 않은 죄인이란 개념이나 신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공식은 사라지잖아요. 그에 따르면 이제 천국이나 영원, 신의 나라는 이 삶에 있는, 마음의 어떤 특정한 상태인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나 ‘영원’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심층적 본능만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의 유일한 심리적 사실<p260>이 되는 거죠.

또 니체는 예수가 작은 봉기를 일으켰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예수는 죄와 신앙을 통한 구원을 설파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고 사회의 우위를 점하려는 당시 신학자와 사제에게 저항한 아나키스트였답니다. 그는 하층민과 배제된 자, ‘죄인’, 유대교 내부의 찬달라(유대사회의 가장 하위 계급인 것 같은데)에게도 지배층에 저항하기를 호소했대요. (페이지 250 참조) 이 부분에서선 예수를 저항에 무능력한 약자로 떠올리기 힘든 것 같아요.

이런 예수의 이미지에 놀랐던 저는 세미나에서 예수를 데카당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 듣고는 뭐지? 싶었어요. 논란이 많았던 문제의 글은 29번과 30번. 니체가 예수를 백치라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어떻게 보면 니체는 백치를 부정적으로, 또 다르게 보면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어요. 니체는 백치의 생리적 습관에 대해 말하는데, 그 습관이란 고통에 대한 극단적 감수성으로 현실적인 것 전부를 본능적으로 증오하는 겁니다. 예수가 현실적인 것 전부를 증오했다고? 신의 나라는 너의 마음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초월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이 삶을 긍정하는 듯 해보였는데. 위 말만 들으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죄와 신의 구원을 얘기했던 사제들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여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백치는 관습이고 제도이고 교회인 것 전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 같은데요. 지배층인 사제라면 관습, 제도, 교회 모두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라 반감은커녕 중요하게 생각했겠죠.

백치에게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지 니체가 설명한 부분을 더 보면, 잡을 수 있는 것, 파악할 수 있는 것, 확고한 모든 것, 모든 시간 공간 개념이라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백치는 이 현실적인 것에서 벗어나 잡을 수 없고 파악할 수 없고 영원한 ‘내적인 세계’ ‘참된 세계’를 추구하려고 한답니다. 이 내적인 세계가 뭐지. 백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바로 백치가 이 내적인 침잠을 갈구하는 상태라는 거였어요. 32번 글에서 예수는 자기긍정과 힘의 증거로 내적으로 빛을 보고, 기쁨을 느끼고 있어서 국가, 질서, 노동, 전쟁 같은 문화적인 것을 몰랐고, 부정할 줄 몰랐다고 말하는 데, 현실성이란 이 문화적인 것들이고 이것들에서 벗어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을 내적인 침잠이라고 하는 건지.

강의 시간에 채운 쌤은 니체가 해석한 예수를 한 가지 관점으로 읽어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굵은 글씨에 ‘유의해’ 니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잘 살려 읽어내야 한다고요. 쌤은 예수를 데카당으로 보는 관점을 얘기해주셨어요. 니체는 예수의 복음을 모든 싸움에 대립하고,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느낌 전체에 대립하는 것, 즉 저항에의 무능력이 도덕인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예수를 당시 사회의 위계질서에 저항했다고 쓴 부분이 분명 있는데도, 그가 저항에 무능력한 인간이었다고 니체가 평가한 이유는 그가 저항하는 방식이 저항하는 대상에게 직접 보복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는 저항하지도,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고,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는 조치를 취하지도 않는 무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오히려 주변인들에게 너도 내 가르침대로 하라며 사태를 도발합니다. 그 가르침이란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책임 지우지 말라......또한 악한 자에게도 저항하지 말고-그를 사랑하라......’<p262> ‘-말라’에 굵은 글씨로 세 번 강조가 되어 있네요. 왜 ‘-해라’ 라는 말하기 방식으로는 가르침을 말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듯한 뉘앙스인데요. ‘-말라’는 부정의 방식으로 행동을 하는 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고, 곧 자신의 힘을 빼앗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는 약자적인 것입니다. 그는 또 모두가 신의 자식이라는 믿음으로 차별없이,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라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어떻게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지. 거리,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배제하고 평등을 당위로 여기는 것은 니체에겐 아주 기만적인 것이죠.

여러모로 알 수 없던 예수란 사람뿐만 아니라 인상적이었던 건 그리스도교를 작동시키는 원리인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인간이 죄에 대한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데 필요한 전제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명제가 참인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것, 죄를 지었다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이런 믿음에 기반하는 것이고요. 이건 비단 그리스도교의 문제가 아닌게 우리도, 믿고 싶은 세계를 믿지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 모자 사건의 예는 저의 섬뜩함을 더욱 배가시켰어요. 무속인이 자신의 병을 고쳐주니 그의 말을 진리로 믿고, 돈을 얻어내기 위해 사주하는 온갖 일들을 서슴치 않았던 인간. 믿음 앞에서 이성과 인식, 탐구는 명예가 훼손되어버린다는 니체의 말이 딱 들어맞아요. 그러면서 내가 보는 세계도, 물에 빠진 후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꽉 붙잡는 것처럼 붙잡는 작은 믿음이 그리는 세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게 당연하기도 한것 같아 웃기기도 했어요. 또,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지만 행위를 하는 것도 이미 행위 후의 나와 세계를 스스로의 믿음대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믿고 싶은 세계를 믿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어요. 세계를 믿는다는 게 뭘까. 이성, 인식, 탐구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는 것? 이성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면! 분명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다른 어떤 것이 보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중지될 것 같아요. 저 예수라는 사람을 써내려갔던 알 수 없는 니체의 글처럼요. 또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 없이 행동하는 것도 세계를 믿는 자의 모습일 것 같아요. 세계를 믿는 자가 곧 힘이 과다한 자, 그 자가 곧 강자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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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8-11 12:09
    하지만 기대없이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공부하고 글 쓰다가 문득 힘들다, 지친다 느끼는 것도 실은 다 거기에 원인이 있는 듯. / 성실한 후기 잘 읽었쏘. 담부터 후기 올리는 건 그 주를 넘기지 않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