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절탁] 0812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08-07 17:36
조회
3986

  지난 수업시간 예수에 대한 채운 쌤의 해석은 저를 완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아니 예수가 극도의 데카당...?

  일단 제가 생각했던 걸 정리해보자면... 예수의 복음이란 곧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전한 복음 '신의 죽음'과 동급이라 여겼습니다. 신의 구원, 피안의 세계, 삶 바깥의 영원... 같은 건 없다는 것이 예수의 복음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와 완벽히 다른 것이라고. 그러니 기도도 신앙의 증명도 불필요하다...! 사도 바울에 의해 날조되기 전 예수의 삶과 죽음은 오히려 (역시 <차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낙타'와 '사자' 이후 '어린아이'("순결한 바보"라는 표현)의 그것과 같다고 읽었어요. 그래서 그의 삶은 부정과 변증법을 모른다... 이렇게.

  예수가 보여준 무저항/전투에 대한 회피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제가 보여주는 바가 실상 연민의 이름으로 - 하지만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세상의 약자들을 위해 벌이는 전투, 기쁨과 생명에 대한 적개심과 공격력으로 삶을 비방하는 것이라 전제한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가 보여준 전투의 회피는 위버멘쉬에 대립되는 게 아니라 사제에 대립되는 게 아닌가 했던.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이렇게 말하네요.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전투적인 그것은 가난한 자들, 고통 받는 자들, 무능한 자들, 하찮은 자들의 최종 승리를 예고한다. 누가 연민을 느끼는가?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그 삶과 그것의 승리를 필요로 하는 자, 그 같은 삶의 질퍽거리는 지면 위에 사원을 세우는 자이다. 삶 속에서 적극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는 자, 삶을 부정하고 비하하기 위해서, 그것을 그것 자체와 대립시키기 위해서 삶을 이용하는 자이다. (263)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니체가 예수를 '백치'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내적 집중' 같은 걸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와 같은 내적 집중의 상태에 안주하는 것, "어떤 종류의 현실성도 더 이상은 건드리지 않는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것, 예수의 이 같은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데카당으로서의 예수인 듯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안티크리스트> 전반에 드러난 예수 이미지가 소멸을 향해 걷는 자에 부합되네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를 위시한 반응적 인간들)가 또 갈린다고, 니체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해요. <차라투스트라>에서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가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너희가 하는 경멸에서조차 이렇듯 너희의 자기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들의 자기, 그가 스스로 죽기를 원하여 생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소망해온 것, 곧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는 것, 그것을 더 이상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며 그의 전 열망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 때문에 너희의 자기는 몰락하려는 것이다.

너희의 자기는 몰락하고자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너희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너희로서는 이제 더 이상 너희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생과 이 대지에 화가 나 있는 것이다. 너희 경멸의 사팔뜨기 눈길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시샘이 도사리고 있구나. (53)

그리고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네요.

저들 끔찍한 자들은 아직 인간이 되지도 못했다. 그런 자들이 생과의 결별을 설교하고 스스로 생에 등을 진다면 얼마나 좋으랴!

영혼이 결핵에 걸려 있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하며, 피로와 체념에 대한 가르침을 동경한다.

그런 자들은 차라리 죽어 있기를 원하는 바 우리는 저들의 소망을 반겨야 할 것이다! 이 죽어 있는 자들을 깨우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 관들에 흠집을 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자! (71)

예수를 제외한 그리스도교는 그러니까 몰락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신체는 자신의 무능에 절감해 몰락을 원하지만, 그들은 그런만큼 강하게 삶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지쳐 있으면서도 매번 똑같이 '그 삶'을 고집하는 자들이고, 삶을 부정하는 그 힘으로 삶을 유지하는 자들이죠. 그래서 니체는 그런 자들을 두고 극도로 피로한 자,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죽기를 꺼리는 자, 소멸을 피해 달아나는 자라고 말이죠.

  예수를 그 반대라고 해야할 지, 그 끝이라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소멸의 길을 택합니다. 자기 삶을 통해 몰락을 가르쳤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니체가 예수를 높이 산 한 가지가 있다면 이거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수업을 들으며 처음 하게 되었어요. 예수는 데카당의 길을 끝까지 가버린 사람, 그런 삶의 끝까지 도달해 결국 나가버린 사람 아닐까... 그리스도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방식으로. 

  지난 시간 채운 쌤 말씀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요철투성이의 텍스트를 하나로 꿰려고 하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니체가 구사하는 다양한 뉘앙스를 단 하나로 덮어버리고 납작하게 만들지 말자는. 이번에 저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책을 읽었나보다 싶습니다. 새삼 몸에 긴장감이 생기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앞으로 더 찬찬히 더 다채롭게 읽고 생각하시길 ^^

 

  다음 주에는 <안티크리스트> 마지막까지 다 읽어오심 됩니다. 역시 인상적인 구절 하나씩 뽑아오셔요.

  후기는 문정문정문정. 간식은 영애쌤+혜경쌤. 맛난 간식 부탁해요~

  아참, 오랜만에 본 지은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휴가 떠난 결석자들, 다음 주에는 꼭 오시고요. 먼길 떠났던 원일쌤도, 오늘 입국일인 걸로 기억하는데 담주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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