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Cahier de pomme de terre 감자의 프랑스 일기 2

작성자
감자
작성일
2017-12-02 09:38
조회
254
한 달 전,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세잔의 인물화 특별전을 보러 갔었습니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나 생 빅투아르 산과 같은 정물화와 풍경화만 알고 있던 저는 별다른 지식 없이 그가 그린 인물화를 마주했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 인물화들을 볼수록 점점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림 속 모델들은 무표정하고 부자연스러운 얼굴에 자세는 엉거주춤했고, 부드럽게 흘러내려야 할 옷감마저도 마치 조각가가 일부러 투박하게 표현하려고 거칠게 다룬 조각 같아 보였으니까요. 전시실 작품의 절반 남짓을 차지하고 있었던 아내의 초상화에서도 세잔의 아내는 그 주변에 사용된 붉은빛, 노란빛의 강렬한 색채가 안 어울릴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처럼 앉아있었어요.


궁금한 마음을 안고서 메를로퐁티가 세잔에 대해 쓴 『눈과 정신』이라는 짧은 책을 빌렸습니다. 메를로퐁티가 존경했다는 화가, 그리고 실로 메를로퐁티의 철학과 닮기도 했다는 그의 그림.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과 함께 세잔과 메를로 퐁티의 도시 엑상 프로방스로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아직 불어로 책을 읽는 게 많이 서툴러서 책장 한 장을 넘기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메를로퐁티가 첫 페이지에 인용한 세잔의 오랜 친구 J. 가스케의 『세잔』 속 한 문장,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메를로퐁티의 글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번역도 엉터리일 수도 있어요 하하)

“내가 당신에게 나타내 보여주려 하는 것은 가장 불가사의한 것, 존재의 뿌리에서부터, 그리고 미세한 감각의 원천에서부터 뒤얽혀있는 가장 미스테리한 무언가이다”
J. 가스케, 『세잔』

그가 가시화하려 했던 비가시적인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존재의 뿌리”와 “감각의 원천”에서부터 뒤얽혀있는 것? 이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뒤로한 채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과학은 사물들을 조작하고, 그럼으로 사물들 안에서 거주하길 포기한다. (…) 그런데 회화가 이런 조작적 사고는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야생적 감각의 층을 길어 올린다. (...) 화가는 다른 어떤 “방편”도 없이 그에게 볼 힘과 그릴 힘을 주는 두 눈과 손만으로도 시끌벅적한 세속으로부터 인간의 분노나 기대의 투쟁과는 관련이 없는 그림을 길어내는 데에 열중한다. 화가가 지니고 있거나 모색하는 이 비밀스런 기술은 무엇인가? 바로 이 차원을 따라서 반 고흐가 “더 멀리” 가려했던 것일까? 회화의 근본, 어쩌면 모든 문화의 근본?
정신만으로 그림을 그려낼 수는 없다. 화가는 제 몸을 세계에 빌려줌으로써, 세계를 그림으로 전환해낸다. 이러한 화가와 세계의 서로-몸 됨substantiation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현행적인 몸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 몸은 물질이나 기관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봄vision과 운동의 뒤얽힘, 그 교직으로서의 몸이다. (...) 우리가 미처 고려해보지 못했던 이 예외적인 잠식-서로 미끄러져 들어감-이 봄을 조작적 사고의 작용으로볼 수 없게 한다. 보이는 것 속에서 그 자신 역시 보이는 몸으로 잠겨 있는 보는 자는 보는 것을 제 것으로 탈취하지 않는다 ; 보는 자는 오직 바라봄에 의해서만 보이는 것에 다가가고, 그럼으로 세계를 향해 열린다.


기차를 타고서 한동안 숨을 죽이고 책장을 넘겼습니다. 제게 본다는 것은 그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듯 어떤 시점에서 보이는 대상을 향해 시선을 쏘는 것과 같았어요. 그러나 메를로퐁티에게 ‘봄’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몸, 감각하는 몸을 되찾아 보이는 것을 더듬는 것입니다. 사물들로부터 즉각적 감각성을 떼어내버린 과학적 사고로부터 우리는 감각하는 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예술을 함으로써 이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되찾습니다. 아니, 바타유는 이를 “감각적 현실의 창조”(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라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세속적인 시선으로 보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가시적인 현존을 불어넣는 작업. 매일같이 생 빅투아르 산을 마주하던 세잔이 “내게 풍경화는 지금까지 전혀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도 이런 까닭이었을까요.

엑상 프로방스를 다녀오고 나서 바로 베니스 비엔날레도 다녀왔었는데, 환경이나 여성, 지역 공동체 같은 직접적이고 정치적인 메세지를 던지는 예술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어요.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화가가 해야 할 작업 혹은 화가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은 세속적인 의무나 의도와 무관하게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에게 회화의 발생은 봄과 보이는 것의 사이, 몸과 세계의 사이, 이들이 직물처럼 서로 짜이는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지난한 과정입니다. 보이는 대로 그리기 위해 화가는 사물을 보는 기존의 방식을 잊고서 자연을 마주해야 합니다. 사물은 나의 지각과 별개로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고, 이미 모두 드러난 상태로 가시화되어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돌아선 화가는 어쩔 수 없이 혹은 새롭게 다가올 만남에 가슴 두근거리며 주위의 언덕으로, 산으로 오릅니다. 다가오는 시지각적 편린들만이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의 전부임을 아는 화가는 매일같이 언덕에 올라 산을 바라보고, 산을 수백 번 고쳐 그리고, 반복해서 그립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이 고집스런 작업은 산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그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착란을 봄 그 자체”로 끌어올리기 위함입니다. 오직 몸의 감각에 의지해 산을 마주하고 있는 화가의 눈은 제 앞의 세계가 주는 충격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한편 눈의 움직임 속에서 세계는 가시적인 존재로 짜여 갑니다. 이렇게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서로를 드나들 때에 그림이 될 만한 관능적인 세계가 보이게 되고, 메를로퐁티가 “오로지 가시적이고 거의 미친 세계” 또는 “매혹의 상태”라고 얘기하는 그 순간에 화가는 화폭에 자신 앞에 열린 보임, 즉 여태껏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담아냅니다.

이 기적 같은 창조는 화가 홀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계의 충격에 제 몸을 여는 화가와 그런 화가에게 어떤 충격을 선사하는 세계가 “서로-몸 됨”으로써만, 서로 엮임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메를로 퐁티가 “세계의 폭력”과 “고흐의 더 나아감”을 얘기하는 테오의 편지를 인용한 걸까요.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의 정신이 고흐가 작업을 계속하도록 강제하고, 더 나아가 극한의 지점에 이르길 강제한다고 썼던 것처럼 화가를 정체 상태에 머무르도록 놔두지 않는 정신의 움직임과 세계의 폭력은 야성의 감각을 끌어올리고, 관습적 당위나 상식, 의도와 합리를 초월한 상태로 화가를 이끌어갑니다. 낯설기만 했던 세잔의 그림은 투명한 사고를 거치기 이전의 원초적 감각으로 그리려 했던 그림, 그야말로 봄이 사물을 만지는 동안 사물이 봄 속에서 짜여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말 기대했던 프로방스의 톨로네 Tholonet. 톨로네에 간다니 버스기사 아저씨가 “그 마을 예쁘지만 정말 작은데 괜찮아?” 여러 번 되물어보셨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본 ‘세잔의 길’ 표지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말년의 세잔은 이곳에 매일같이 찾아와 생 빅투아르 산을 마주했고, 메를로퐁티도 이곳 톨로네에서 『눈과 정신』을 썼다고 해요. 이미 추수 기간이 지나서 밭들은 모두 횅한 모습이었지만 산의 에밀 졸라 호수에서부터 내려온 시냇물이 흐르고 낮은 산들과 그 사이로 우뚝 솟은 바위산 생트 빅투아르가 보이는 곳이었어요. 저와 친구는 마을과 산을 잇는 세잔의 길을 따라 생 빅투아르 산이 보인다는 작은 산으로 올라갔고, 해가 질 때까지 산을 보다가 내려왔습니다.

*프로방스에 가기 전에 잠시 들렸던 마르세유의 풍경이에요! 언젠가 프랑스에 갔다 온 이모로부터 “니스 바다보다 제주 바다가 열 배는 더 예쁘다!”고 하는 실망섞인 평을 듣기는 했지만, 반평생 탁한 서해 바다 가까이에 살았던 제겐 짙푸른 빛깔의 마르세유 바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전체 6

  • 2017-12-02 18:25
    산과 바다 넘 예쁘다~~프랑스에 푹 빠져있는 감자가 보이는 거 같은 ㅎㅎ

  • 2017-12-02 19:21
    마르세유나 생 빅투아르 산보다 더 궁금한 것은 감자 얼굴~ 노을이 내려깔리는 바다를 "모색하는 감자의 이 비밀스러운 마음"은 무엇인가? 흐흐 ~ ^^

    • 2017-12-02 21:37
      다음엔 제 얼굴과 함께 오겠습니다~ㅎㅎ

  • 2017-12-03 16:57
    '보는 자와 보이는 자들이 서로 드나드는' 그림들과 그 그림들을 해석한 메를로 퐁티의 글과, 그 글들에 다시 드나드는 감자의 언어들...을 찬찬히 읽었네요.
    연구실에서 만난 풀무의 그 어여쁜 소녀가 아닌, 이 글 속의 인물은 또 다른 '누구'네요.ㅎㅎ 양파같은 감자의 공부가 가닿을 곳이 궁금해집니다. (감자는 내가 누군지 잘 모를껄???)

  • 2017-12-04 18:38
    감각을 열어둔 몸과 세계가 만나 얽히는 지점에서 그림이 탄생한다라... 멋져요 +_+

  • 2017-12-04 20:21
    오오...! 읽다가 소름이 돋고 말았음. 감자, 정말 온 몸으로 책을 읽고 있구나. 기차 안에서 숨 죽이며 책장을 넘기는 감자를 상상하니 감동이 물씬 전해진다. 프로방스의 톨로네 사진은 다 감자가 찍은 것이야?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한 곳이네. 공부하면서 하는 여행이란 참말 멋진 것. 많이 보고 느끼고 와. 꺄옹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