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Cahier de pomme de terre 감자의 프랑스 일기 4

작성자
감자
작성일
2017-12-29 03:14
조회
240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은 파리는 정말 고요합니다. 기숙사도 밤이면 밤마다 파티하는 친구들로 떠들썩했는데 요즘 기숙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요. 남아있는 한국 친구들과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나서 <눈과 정신>을 겨우겨우 다 읽고 그동안 생각한 것들을 글로 정리해보았어요. 책을 한쪽한쪽 더디게 읽어나가면서 파리에 있는 세잔의 그림을 보러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프랑스에서의 두 달 남짓을 세잔과 함께 보내는 듯하네요ㅎㅎ 오늘도 오랑주리 미술관에 세잔의 그림을 보러 다녀오고 나서 이렇게 글을 올려요.


사이에서



세잔은 원근법이 주는 사실 임직함도, 단일한 윤곽선이 주는 확신도 멀리했습니다. 세잔의 그림들을 보다 보면 대상의 고유색을 저장하거나 대상을 생략해서 간명하게 드러내는 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의 그림 속에서 선은 면으로 변하거나, 대상을 둘러싼 여러 겹의 선들이 진동하고 있고, 흔들리는 선들의 틈새로 우리가 한 대상의 ‘고유색’이라 믿었던 색채가 넌지시 그 주위의 사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합니다. <초록 멜론이 있는 정물>에서 멜론은 컵과 탁자, 벽면에 제 색채를 흘려보냅니다. 그 옆에 있는 사물들도 마찬가지인데, 빛을 반사하는 유리잔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멜론이나 탁자와 같은 것들이 서로 색채를 주고받는 광경은 좀 낯설지요. 이 낯선 정물에서 멜론과 물 잔, 벽과 사과는 각자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사이에 있으며 그 사이에서 가시화됩니다. 서로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물들은 서로 존재의 지지이자 조건이 되어주며 보이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봄은 사물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이를 메를로퐁티는 멋진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의 응시는 존재의 후광처럼 존재 안에서 방황한다. 내가 그것을 본다는 것보다 그것에 따라, 혹은 그것과 더불어 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물에 따라, 그것과 더불어 본다"는 것은 사유의 시각과는 다른 시선입니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 지각은 사유와 구분되는데요. 세계에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서 성립하는 사유는 세계의 대상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유의 주체는 세계 앞에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인식하거나 위에서 객관적으로 조망하지, 사물들 사이로 들어가 사물들과 살을 섞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각의 주체는 스스로 감각 덩어리가 되어 순간순간 세계와 살을 섞습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세계는 사고되는 외적인 대상도 인식을 거치고 난 결과도 아닌 신체의 체험에 따라서 지각되어가는 것입니다. 보는 이는 세계의 앞이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가운데에 잠겨서 자신도 세계와 더불어 생성되어 갑니다.


교직-교차
보는 행위의 주체는 오직 보는 자이기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봄이 보는 자에게 종속되어있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들 속에서 사물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메를로퐁티의 말을 떠올려보면, 가시적인 세계 속에 잠겨있는 보는 자는 ‘함’의 주체이면서 ‘당함’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물이 그의 시선을 낚아채며 보는 방향을 강제하고, 움직이게 하고, 사물들 사이로 데려가는 한편, 보는 이는 사물을 치고 들어가 -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물의 피부를 으깨어" - 분절적 인식에 갇혀있던 사물의 이면을 민첩하게 포착하려 애씁니다. 보는 자와 사물이 적극적인 상호 개입을 이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가시적인 세계는 생성되어 갑니다. 메를로퐁티의 유고 작품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속 <교직-교차>라는 장의 제목이 암시하듯, 실과 실이 서로 교차하고 얽히며 짜여져가는 직물처럼 가시적인 세계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이 부단히 교차하고 서로를 낚아채면서 짜여가는 것입니다. 세잔의 그림 속 선의 흔들림과 색채의 주고받음은 대상을 빛 속에 흩어져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보이는 것으로 짜여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눈은 초점이 고정된 카메라의 눈처럼 전체상을 단번에 포착할 수 없는 데도, 우리는 봄 또한 일종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쉽게 간과하곤 합니다. 실제로 본다는 것은 일종의 몽타주 작업일지도 모르지요. 컵과 사과, 멜론이 놓여있는 식탁을 본다면, 눈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그 전체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과는 그저 사과라고 사유하기 때문에 좀처럼 눈앞에 있는 사물을 지각할 기회를 잡지 못하지요. 그러나 세잔의 그림은 인식을 거친 결과 혹은 보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대상이 보이는 것이 되기 이전의 상태, 즉 눈과 정신, 감각과 논리, 신체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미쳐 분리되기 전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그 대상이 보이는 것이 되어가는 생성의 과정, 사물이 보는 자의 보이는 세계로 들어오고 보는 자가 사물의 세계로 들어가는 접속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드러나는 세잔의 봄은 마치 탐구 행위와도 같지요.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그림에 표현된 시각을 "체험된 시각 "이라 일컬으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기에 있는 것은 산인데, 화가에 의해 그것 자체를 보이도록하는 산이다. 그것은 그의 응시로 탐구하는 산이다."


그림의 침묵
그러나 세잔은 완전한 보임의 임박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그의 그림에서 보는 행위는 어떤 확실성도 가지지 못합니다. "지각은 혼란스러운 것"이라 믿은 그에게 모든 것을 지각하려는 확실성의 추구는 불확실성을 핵심으로 안고 있는 지각의 전조건을 망각하는 일이었지요. 그렇다면 불확실성을 지각의 전조건으로 삼으면서도 근본적인 비가시계를 그리려했던 화가는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어떤 그림으로 드러내야 했을까요? 메를로퐁티의 글에서 번번히 등장하는 직물의 비유로 돌아가 봅니다. 실과 실이 엮이며 짜이는 한편 짜이면서 필연적으로 빈 구멍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직물처럼, 세잔의 회화에서도 가시적인 세계는 빈 구멍을 내포한 성근 엮임으로 짜입니다. 특히 그의 많은 후기 작품들이 미완성처럼 보일 정도로 흰 여백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세잔은 누구보다 공간을 채울 색채를 찾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고, 자신이 사물의 색을 칠하는 게 아니라 사물이 스스로 색을 칠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던 화가인데도 색채가 캔버스를 완전히 덮도록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가시적인 이미지가 다 표현할 수 없는 의미의 흔들림, 잔여를 안고 있는 세계를 그려낸 게 아닐까요. 그의 그림 속 사물과 자연은 여전히 다 펼쳐져 제시되지 않고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닫혀있던 세계를 향해 열리고, 또 세계를 열어젖히면서 잃어버렸던 감각을 되찾으려 했던 화가는 다시 자신의 그림을 침묵하게 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의 꾹 다문 입술과 남겨진 빈 구멍들,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산이 그러합니다. 이미 그가 바라보았던 자연이 완벽한 드러냄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표현하는 순간 다시 저 멀리로 도망가 다시 침묵하는 자연에 미처 닿지 못했던 화가는 자연과 닮은 그림을 그려냈는지도요.


세계의 안감
우리는 바다의 깊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 표면에서 일렁이는 짙푸른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깊이로 인해서입니다. 빙산을 떠올려봐도 그렇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빙하의 극히 작은 일부이고, 그 밑의 거대한 빙하가 자신의 일부를 보이게끔 지지하고 있습니다. 메를로퐁티에게 보이는 세계는 수직적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선 예들처럼 저변에 감춰진 비가시적인 세계의 일렁임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안감을 배후에 두고서 가시적인 세계는 보이게 됩니다.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의 지지로 인해 드러나고, 우린 오직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만 깊이를 가늠할 수 있지요. 그래서 메를로퐁티에게 깊이란 겉감에 안감을 대는 것입니다. 모네의 빛나는 색채는 사물의 표면에서 반짝이지만 세잔의 색채는 깊이로 인해 떠오릅니다. 즉 색채를 가시적인 표면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은 비가시적인 깊이입니다. “나는 세잔이 평생에 걸쳐 깊이를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에서 인용한 조각가 자코메티의 말입니다. 세잔의 그림에서 감각은 색으로 칠해지면서 색은 깊이의 영역으로 전이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근원적인 무엇을 그리고자 했던 세잔은 살을 표현함으로써 깊이를 표현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색칠 될 수 없을지라도, 사물의 살들이 칠해지고 나면 그로부터 보이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서 비가시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살과 함께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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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30 10:15
    감자가 뜨거운 학구열로 '구운감자' 될 듯! 비가시적인 감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보이고 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