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스피노자의동물우화2주후기(민호팀)

작성자
강석
작성일
2018-08-09 11:37
조회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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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두 번째 시간이다. 우리의 자유 토론은 인간의 본성은 뭐야 에서부터 완전성의 등급, 도박하면서 즐겁다면 기쁨인가 아닌가? 기쁨과 슬픔 등으로 두서없이 왔다 갔다 했다. 나 역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 인간 본성이 규정되면 그 규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쉽게 결론을 낼 수 있고, 그에 맞추어 행동방향도 쉽게 정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나는 타고난 본성이란 것이 있다고 믿고 있어서 무규정성의 고통을 감내하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2.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5챕터는 목적론에 대한 비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전체 기획이 목적론 비판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1부 부록’은 목적론적 사유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 푸코 등 모두 목적론을 비판한다. 이는 인생의 목적을 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목적론적 사유란 항상 ‘주어진’ 본질, 가치, 의미를 전제한다. ‘주어진’이란 그런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것이 의미가 있느냐, 삶은 가치가 있느냐, 그래도 삶은 살만한 것이야 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 때 마치 주어진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가 있은 것을 해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나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 거미나 바퀴벌레에게도 그런 것인가.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사실 삶에서 의미를 묻고, 찾으려고 하며, 몸부림치는 것은 삶의 의미가 저 외부에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목적론은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삶이 허무한 것은 삶이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삶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쓴 비판적 크리스쳔 파커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사랑이란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 / 멀리 있는 사물들을 바라보듯이 / 당신은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체스와프 미워시) 이 시를 인용하면서 한동안 의미를 찾으려 했는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의미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을 때 우울(증)을 야기한다. 남편도, 부인도, 아이들도 얘기를 않는다. 그래서 의미가 무엇이냐, 살아야 되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다는 일이다. 의미를 찾는 것은 내가 특별하다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생의 목적이다. 의미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다. 삶에 주어진 의미 따위란 없다. 여기서는 허무주의를 느끼지 않는다.

니체가 허무주의는 언제나 이상주의와 짝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상을 추구하고, 그 이상에 비추어 볼 때 현존이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미를 찾는 행위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결코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우울할 때마다 되뇌어야 하는 것은 “나는 만물중의 하나일 뿐이다”이다. 나는 저 새와 저 수많은 잎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수많은 나뭇잎 들이 있는데 그 나뭇잎 하나가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돌아간다고 여긴다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도 먼지처럼 그냥 만물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목적론적 사유는 생의 의미를 생 바깥에서 부여된 것으로서 찾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 의미가 있는 곳을 향해 찾아간다. 종교가 다 목적론적이다. 신이 이런 인간적 가치를 의미 있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현존을 부정하게 된다. 현존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의 삶을 결여로 보게 된다. 내가 이랬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나는 맘에 안 든다. 이럴 때 우리는 자기의식을 전도해서 저 맘에 드는 존재가 될 수 있었는데 충분히 노력하지 안해서라거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자학을 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 최선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이 상태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현존이란 늘 그 현존이란 결과가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의 현존에는 어떤 결여도 없다. 현존을 결여로 파악하는 것이 문제이다. 존재할 수 있대로 만 존재하는데 더 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존을 결여라고 여기고, 더 나은 모습, 너 나은 세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주의다. 모든 이상주의는 현존에 대한 부정이다. 니체의 생각이다.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다.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동양에서의 유토피아는 무릉도원이다. 복숭아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유토피아인 것이다. 배를 타고 가다 길을 잘못 들어서 이른 곳이 무릉도원이었다. 그곳은 아이들이 놀고 어른들이 농사짓고 있고, 손님이 오면 대접하고 그런 막상 특별한 곳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 목적론이다. 지금 자기 존재를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인 욕망을 가질 수 없다. 자본주의는 현존의 결여를 전제한다. 나는 없다. 그러니 가져야 한다. 그것을 가지면 또 다른 것이 없다. 끊임없는 결여는 자본주의가 욕망을 구조하는 방식이다.

 

3.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 즉, 코나투스로 보았다. 모는 것들은 욕망한다. 코나투스는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고 계속해서 가져가려고 하는 힘이다. 생명에는 그런 힘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본질이란 a에서 그것을 빼버리면 a가 성립하지 않은 것을 a의 본질이라고 한다. 생명의 본질은 코나투스- 욕망이다. 자신을 계속해서 보전하고 가져가려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다 주고 나는 사라져야지 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을 때 까지 어쨌든 피는 돈다. 끊임없이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 생명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이 어떤 상태를 그냥 계속 가져간다는 것은 아니다. 세포, 피 . .. 몸을 구성하는 것이 몸을 계속 구성하기 위해서 가만히 있다면 죽는다. 가만히 있다는 것은 유지, 보전, 안주하려는 힘이나 결국 이는 유지, 보전, 안주 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생명이 유지 보전하려면 끊임없이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피가 한 순간이라도 멈추면 유지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신체와 관계성을 만든다. 신체변이이다. 이는 다른 말로 계속해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현존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관계성에서 다른 방식의 힘을, 역량을, 다른 관계를 파생시키고 삶에 대한 이해를 완전하게 펼치도록 해야 한다. 정신의 역량은 등수로 환원하거나 수량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변이역량이다. 단순히 더 똑똑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사진의 습관적 사고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의 역량은 각자 비교불가능하고, 각자 고착된 방식도 다르다. 돈에, 관계에 대해 고착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는데 아이 같다는 것은, 유아적이란 것은 생각이 아이 처렴 편협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만나 사유와 관계성이 확장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와의 동일성을 통해서 자기에게 좋은 것이라는 판단 기준을 갖고 이 세상을 평가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나에게 무섭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안 보이는 곳에 있지 않아야 성숙해진다. ‘못 해, 못 해’ 이런 것은 유아적이다. 차이를 통해 관계와 관념을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없음을 유아적이라고 말한다. 회사도 그렇다. 공부도 그렇다.

현존을 부정하는 것은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고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실험을 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마주침을 통한 변화를 거부한다. 역량의 변화 속에서 나를 크게 만드는 경우 기쁨의 변화냐 슬픔의 변화냐 이것을 아는 것이 윤리의 문제이다. 그러려고 하면 변이가 있어야, 마주침이 있어야 한다. 가만히 혼자 고립되어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것이 목적론적 사유가 만들어낸 태도다. 목적론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자기 것에 안주하고, 이상만 생각하고 있다면 목적론이다.

 

4. 사람은 신을 상상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관념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한 관념을 연상한다. 이것이 상상이다. 상상은 관념인데, 이미지에 따라 붙는 하나의 관념이다. 스피노자에게 상상이란 저기 멀리 꾸불꾸불한 것을 보고 ‘아, 뱀이다’라고 한다. 꾸불꾸불한 것은 시각적으로 받아들인 이미지이다. 예전에 꾸물꾸물한 것을 보았더니 뱀이었다. 그 경험이 꾸불꾸불한 것을 뱀이라고 이미지 한 것이다. 이미지에 따른 붙는 관념을 상상이라 한다. 이미지는 뇌에 남겨진 흔적이다. 꾸불꾸불한 것을 보고 뱀이라고 떠올리는 것은 그 이전의 경험이 흔적으로 뇌에 남겨져 있어서 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식이다. 이미지에는 항상 관념이 따라 온다. 이미지를 가지고 관념을 생각한다. 이것을 상상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을 본적이 없다. 본적이 없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가지고 상상해낸다. 이미지들을 가지고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한다. 자기중심주의이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인간은 자신도 전지전능다고 여긴다. 우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사건들에 대한 관념을 생산해낸다. 개미, 사자 등 온갖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임에도. 저것은 나쁜 것이다. 좋은 것이다. 라고 우리 중심으로 생각한다. 신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목적론이다. 미신은 자기중심주의의 편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신이 우리를 선택했다. 신이 나에게 응답했다. 신이 나를 지켜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신이 나만 보나, 그런 신이 어떻게 신일 수 있나. 신이 응답했다는 것이거나 신이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은 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태도이다. 나만 바라보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숭배하고 기도한다. 이것이 미신이다. <신학정치론>에 나오는 얘기다.

삶이 의미가 있어서 살아간다 하면 살수 없다. 아니면, 우리는 미신에 사로 잡혀 살아간다. 우리는 만물 가운데 하나인데 어떻게 삶의 본질을 애기할 수 있나? 그럴 수 없으니 외부에서 그것을 주었다고 한다. 이것 자체가 목적론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내가 행위 하는 곳에서 세계를 해석하라. 이것이 니체의 관점주의이다. 이 관점주의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다르다는 것과 무관하다. 행위하는 자만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을 갖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존재는 변이다. 존재는 변이에 따라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해석이 달라진다. 이것이 관점주의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쓰여진’ 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부제는 한마디로 스피노자가 신을 자기중심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모든 만물은 만물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모든 만물을 다 포함하는 전체로 보고 있다. 만물이 그 바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 그래서 자연이 신인 것이다. 그런 자연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나. 우리가 상상하는 자연은 식물, 동물이다. 식물, 동물은 자연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도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도이다. 도라는 것도 모든 만물을 생산하는 원인이다. 만물 바깥에 있는 인격신이 아니다. 도는 상상 불가능하다. 도는 ‘지도리’(도추)이다고 말한다.. 도는 인간의 특정한 이미지로부터 생겨난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공, 연기는 상상이 안 된다. 상상을 벗어난다. 그런 관념이 참된 관념이다. 참된 관념이라고는 것은 절대적이거나 불변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관념이 모든 작동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그런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신과 인간이 애초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도 신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일생이 80인데, 80의 현생에는 전생과 내생이 있다. 유한한 실존이 무한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 생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 전체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생사가 하나라는 관점에서 본다. 참된 관념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연기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도의 작용이다. 내가 경험하는 사건을 전체 관념에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깨달음! 이렇게 공부하면 안 된다. “깨달겠다”고 해야 그 언저리에라도 갈 수 있다. 조금 알고자 한다고 하더라도 그 조금을 알 수 없다. 인생의 통찰력, 내가 겪는 이 사건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알고 싶다. 슬픔, 기쁨, 미움 등 일희일비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것을 공부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스피노자를 알고 싶다고 해서 안 된다.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모든 것을 자연 안에 있는 것으로 통찰하겠다고 해야 한다. 기하학이라 한 것은 자연의 법칙, 규칙은 동일하며, 따라서 자연 안에 있는 것들은 자연의 법칙과 규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자연 안에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신체가 자연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미움을 실체화하고 그러는데,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 미움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이해하면, 미움이란 상태에 고착이 안 된다.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 이해하면, 그 이해가 역량이다. 이해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고, 느낀다는 것이다. 왜 내가 아프냐고 짜증을 안내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식의 역량과 행위역량은 같이 간다. 아는데 느껴지지 않거나 행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늙음이 자연 속에서 자연스런 것으로 이해되었을 때 슬픔이 되지 않는다. 공자도 육십이 되어 귀가 순해졌다고 하고 칠십에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늙는데 돈이 있어야 한다고 고착되어 있다. 삶을 긍정하지 않는 태도다. 삶을 이해하면 삶이 긍정된다. 원을 긍정한다는 것은 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원이란 이런 식으로 만들어 지고 이렇게 중심을 만들어 내는구나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에서 관계들이 어떻게 맺어지는 것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영위되고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 안에 있고,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동일한 법칙과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진 우리도 자연 안에 있는 한 그것도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을 물질로 생각하고, 정신은 물질과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기하학을 이해하듯이 우리의 정서, 신체성을 이해하면, 그때 우리는 삶이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삶 자체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복이다. 어떤 것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삶 자체가 나의 기쁨이고, 삶 자체를 이해하고 사는 것이 지복이다. 아들이 죽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죽고, 15년을 유랑하고 말년 복이 없는 공자가 지복을 누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자기 삶을 어떤 것 때문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듯이, 직장에서 돈을 벌듯이 공부하면, 지식도 습득하는 방식이 되고 만다. 우리에게 권리란 존재방식에서 나온다. 권리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서 권리가 나온다. 권리란 역량이다. 우리는 자꾸 이런 권리 저런 권리를 달라고 한다. 이것은 권리를 밖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역량이 없는데 자유라는 권리를 누릴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고, 누구의 권위에 찌드러지지 않고, 나 자신이 떳떳할 때 나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발언권을 주세요.’ 이것은 매우 수동적이다.

 

5. 스피노자에게서 본성과 역량은 같은 것이다. 본성을 얘기할 때 자연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신 안에 있다. 자연 안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피가 계속 생성되기 위해서는 양분을 가지고 다른 것들과 싸워서 뭐를 하듯이, 우리는 또 다른 신체와 관계를 맺는다. 신체 내외적인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이한다. 관계 맺기를 중단할 때 생명은 죽는다. 계속 변이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관계 양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 양상이 바뀌는 관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이다. 숙명이 아니다. 모든 것은 미리 결정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 필연이다. 가족, 정치적 관계 속에서 나의 신체성과 정신 역량을 형성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필연이다. 필연성 속에서 우리는 계속 변한다. 자연이란 변이와 필연성이다. 필연성 속에서의 변이, 바꾸어 말하면 관계 속에서 변이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본성이 이렇다는 것은 윤리가 아니다. 그래 변이하면서 살아야지 한다면 윤리의 문제가 나오지 않는다. 윤리는 문제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이렇게 합성하고 저렇게 분해한다. 이렇게 계속 변이하면서 살아간다. 윤리는 변이할 때 어떤 것과 관계를 맺어 나의 신체 정신의 역량이 커지냐 작아지느냐의 문제이다. 좋은 것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돈을 혐오한다고 하더라도 돈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다. 문제는 돈과 관계를 맺는데, 돈과 관계 속에서 내 역량을 크게 할 것인가. 지배할 것인가, 역량이 작아 질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에 윤리의 문제가 있다.

 

6. 거미는 거미의 역량에 따라 실존한다. 인간은 인간의 역량에 따라 실존한다. 존재하는 것은 다 완전하다. 공자의 실존이나 나의 실존은 어떤 결여를 갖고 있지 않다. 본성의 입장에서 보면 같다. 그런데 공자는 그 본성을 이해하고 있어 변이 역량이 크다. 일이관지 하는 존재 공자는 나 보다 더 완전하다. 더 완전하고 더 불완전이 아니고, 더 완전하고 덜 완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본성을 이해하는 한에서 공자는 일이관지하였으니 그 자신의 역량을 완전히 펼쳤다. 이것이 공자와 우리의 차이이다. 더 완전 한다는 것은 목적(론)이 아니다. 공자가 육십에 이순할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더 완전한 것은 목적이 아니다. 이를 목적론과 혼동하면 안 된다. 과정이다. 우리는 경험한 사건 자체도 잘 모른다. 전체 속에서 통찰하지 못한다.

우리는 가난은 싫고 부자가 좋다. 우리는 공자보다 존재론적으로 결여되지 않으나, 우리는 경험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사가 뭔지, 생사에 대한 통찰도 없다. 그래서 덜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것은 목적이 아니고 과정이다. 완전성에 등급이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통찰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 곧 완전성의 등급이 있게 된 것이다. 부처님은 더 완전하다. 우리는 덜 완전하다. 그러나 열등하다는 말은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덜 완전한 것에서 더 완전한 것으로 나아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이다. 어떻게 선하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겪는 것을 통찰 속에서 어떻게 겪어 갈 것인가. 정서에 예속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더 완전한 것으로 이행한다는 것이 기쁨을 증대하는 것이고 이것이 선이다. 역량이 커져서 기뻐지는 것이 선이다. 역량이 작아져서 슬프게 되는 것이 악이다. 행위 자체가 선악이 아니고 존재 자체가 선악이 아니다. 악마를 만나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풀이 나에게 맞지 않아 독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구에게는 약이 될 수도 있다. 풀 자체는 선, 독이 아닌 것이다. 누구의 신체에는 약이 된다. 그 마주침의 결과가 역량의 증대이며 선이고 역량의 감소를 가져오면 악이고 슬픔이다.

덜 완전하다는 것은 단편적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이다. 더 완전화다는 것은 전체 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식이 먼저이다. 인식을 먼저 하라. 우리가 지복을 누리고,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것을 얼마나 더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전체 속에서 내가 겪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정서에 예속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게 때문에 정서에 예속되는 것이다. 부분적인 이해를 불교에서 어리석음이라 한다.

자기가 겪는 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맞이하고 있는 이 시간을 그 이전과 이후 전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딱 주어진 것과 그 주어진 지평에서 인과관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것만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정서에 예속된 상태로 계속 있게 된다.

스피노자에게서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마주침 속에서 겪는 것들이 어떤 연관 속에서 겪게 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의 역량이 커지는 것이다. 본성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는 스피노자에게는 없다. 본성은 자연 안에 있어서 그 관계 속에서 변이한다. 이것이 모든 생명의 본성이다. 본성을 역량의 문제와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윤리의 문제이다.

개미도 관계 속에서 변이한다. 개미가 자기의 역량 속에서 어떻게 만들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본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 개미는 어떤지 알 수 없다. 개미와 본성이 다른 것이 아니고, 본성을 이해하고 펼쳐내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과 관계하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는 개미만의 방식일 것이다. 개미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의하여 다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두 가지 속성인 신체와 정신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 이 두 가지를 갖고 파악할 수밖에 없다. 다른 종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 말고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신안에는 무수히 많은 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이 다르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본성은 변이와 필연성이다. 이것은 자연적 차원이다. 윤리의 차원은 그것에 대한 가치 평가가 있는 것이고, 그 가치평가 방식이 스피노자는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역량의 증대냐 감소냐의 문제였다.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고, 본성이 자연 안에서 그 역량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냐가 윤리의 문제이다. 실천적 지점에서의 문제를 던져야 한다. 본성에 따라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개미의 본성이 인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너와 나의 본성이 다르다. 이렇게 된다. 관계 속에서 변이한다는 것 이외에는 없다. 인간과 개미 그 차원에서 문제될 것은 없다. 윤리적, 실천적으로 질문할 것은 그 안에서 역량의 문제이다.

기쁨과 슬픔은 감정이 아니다. 정서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정서를 기쁨, 슬픔, 욕망으로 나누었다. 기쁨은 더 큰 완전성,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해한다. 아이들은 완전해 그러나, 딱 그 눈앞에 있는 것만 이해한다. 이런 상태가 스피노자의 슬픔인 것이다. 무지이고, 불교의 무명이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크게 만드는 방식이 스피노자의 기쁨인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는 애초에 작은 완전성을 갖고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 먹은 과정 속에서 어떻게 점점 더 삶에 대해 통찰할 수 있고, 슬픔에서 기쁨으로 이행할 것인가이다. 어떻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으로 이행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사람들이 똑똑하고 안 똑똑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질문은 수량화 때문이다. 가치를 놓고 척도를 갖고 일렬로 늘어 놓으려한다. 역량도 비교하려한다.

역량은 자기가 자기의 기쁨을 증대시킬 것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의 문제이다. 각자의 슬픔, 기쁨이 같은 것인가. 같지 않다. 어떤 아이의 경우 2단 3단을 외우면 역량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나이더라도, 9단을 외운 아이의 경우 2자리 수 곱하는 것이 기쁜 것이다. 역량은 비교 불가능하다. 비교하는 순간에 다른 것에 대해 가치 척도에 의해 평가를 하게 된다. 공부도 비교 불가능하다. 스피노자 하나도 모르겠는데 나는 단 하나 역량을 이제 이해한다. 그 기쁨은 스피노자를 갖고 박사학위 논문을 탄 사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 타자를 갖고 오지 말라. 결국 내가 타자에 대해 이렇다는 것은 외부의 가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7. 관념을 이해하려면, 신체성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가 같다. 둘이 아니다. 같이 붙어있다. 이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선. 그래서 우리의 정신은 ‘관념을 생산해내는 활동’이다. 이것이 정신의 역량이다. 정신은 신이 주어준 여기 있다가 아니다. 정신은 관념을 생산해내는 역량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늑대와 살아서 관념을 생산해내지 못할 경우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이 아니다. 늑대 인간은 늑대가 관계하는 방식으로 관계하므로 인간이 아닌 늑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관념을 생산을 할 수 있고, 이것이 정신의 역량이다. 따라서 정신이 주어졌다, 정신이 우월하다하는 이런 관점을 부정한다. 만약 동물이 관념을 생산해낸다. 또 인공지능이 관념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관념을 생산해내지 못한 것들보다 이것들은 인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종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종이다라는 보편적 개념은 구체적인 존재에 대해 어떤 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실존이 어떻게 행위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직립보행이 인간이라면, 앉은뱅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앉은뱅이는 직립보행이 아닌 방식으로 걸어간다. 종과 종 사이에 보편적인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본질이 있다면 욕망만 있다. 존재를 보전하고 유지하려는 것만 있다.

모든 것은 신체성으로 부터 관념을 생산한다. 아이들은 불을 뜨겁다고 생각한다. 경험으로 불만 보면 뜨겁다고 한다. 이것은 부적합한 관념이다. 신체가 불과 다르게 관계를 맺게 되면 따뜻하다는 관념도 새롭게 생산한다. 불에 대해 하나의 관념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경험해 보아야 아는 것은 아니다. 경험한 것을 통해서 불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나가면 불은 혹 뜨겁기만, 혹 따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불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체 속에서 불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관념은 신체의 변용이다. 두 신체의 마주침 속에서 어떤 것을 겪는다. 겪음은 수동과 능동을 동시에 겪는다. 듣는다, 본다는 모두 신체변용이다. 빨강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빨강 자체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내 눈에 빨강으로 드러나는 것을 빼고 빨강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나. 선 자체 이런 관념은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한다. 모든 관념은 또 다른 어떤 관념을 생산하는 인식활동이다. 인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주 단편적인 것을 부적합한 관념이라 한다. 단편적이지 않고 전체성을 갖고 있으면, 불을 갖고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이해를 가질수록 불에 대한 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된다. 관계나 사람에 대해서 마주쳤을 때 상처를 받았을 때 상처를 받은 것만으로 그 행위와 사람을 평가한다. 이것은 부적합한 관념이다.

내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 것은 생각 안 한다. 어떤 것을 더 다양한 전체성에서 보면 그 자체로 선, 악은 없다. 어떤 관계 속에서 악, 선으로 드러날 뿐이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것은 아니다. 받아들인 나의 무엇이 있는 것이다. 나쁘다는 것에는 나 자신의 무엇가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경우 그냥 지나갈 수 있으나 나의 경우는 그냥 지나가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 부처님은 사람을 한 면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성인들은 접속능력이 뛰어났다. 어떤 관계 속에서도 그 관계를 고착적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두루 친하다는 것은 갈등을 겪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무능한 신체다. 두루 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생산해내야 한다. 이것을 들뢰즈는 “-되기”라고 한다. 누구와 만나도 선입견이 없고, 원한도 없다. 감정에 예속되지 않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이란 그것에 길들여지면 몸이 좋아지고 기뻐진다. 그 감각적 쾌락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슬프게 된다. 맛없는 것은 슬퍼지고 안 먹고 못 먹는다. 뭐가 와도 감사하면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역량이다.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는 것은 역량이 아니다. 어떤 것도 감사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주침이 역량의 증대를 가져오는 방식이어야 역량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만 좋아하고 도그마화 한다. 그래서 그것만이 교조적으로 다 옳은 말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을 신봉하고 어떤 사상을 도그마화 한다. 뭘 읽어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쉬운 것만 읽어야지 하는 것은 마주침을 거부하는 것이다. 역량이 커지는 시험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 줄을 이해할 수 있는 시험을 해야 한다. 두 줄을 읽게 되면 기쁘지 않겠는가?

신체가 어떤 것과 관계할 수 있는 역량이 크면 클수록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도 커진다. 스피노자에게서 정신과 신체가 완벽하게 비례한다. 신체를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관계를 더 많이 맺지 않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은 신체 역량이 떨어진다. 관계 맺을 수 있는 역량이 크면 클수록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도 크다. 관계 맺는 것이 능동적 일 수 있으면 있을수록. 능동은 저 힘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것이다. 배워서 자기 것으로 취할 수 있으면 정신도 능동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골방에서 정신의 역량만 커질 수 없다.

책만 보면 잠이 온다. 책을 읽기 싫은데 정신으로만 읽겠다 이것은 안 된다. 신체가 책과 접속이 안 되는데, 정신으로 극복 가능하지 않다. 언제나 신체의 마주침으로 인한 변용 이것이 관념이다.

 

8. 우리는 사과라는 관념이 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진짜 사과와 맞추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관념을 실제의 그림으로 생각하고 관념과 실제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관념을 실제와 맞추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둘이 일치 하느냐 않으냐를 보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과 신에 준하는 뭐가 있어야 한다. 인식의 참 거짓을 판단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진리예요? 그것을 보증해주는 것으로서 신, 사제를 내세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거부한다. 관념은 마주쳐서 영향을 받은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 오류가 아니다. 사과하니 파란 것을 떠올렸다. 어떤 이미지를 갖고 떠올린 것이다. 머릿속 관념은 그가 겪은 신체의 변용방식에 의해 사과를 떠올린 것이므로 오류가 아니다. 오류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스피노자에게는 적합 하냐, 참 되냐 아니냐만 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은 오류가 아니라 단편적인 것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다.

날개달린 말은 내가 아는 말, 내가 아는 날개를 조합, 단편적인 것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사람, 사건에 대해서 그렇지 않은가. 내가 저 사람에 대해 경험한 것, 어디서 있던 것을 갖고서 그 사람을 판단한다. 따라서 날개달린 말이 실존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단편적인 것을 갖다가 우리는 이런 것이야 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적합한 관념, 참된 관념과 관련하여 말하면, 단편적인 것을 아무리 갖다 붙여도, 경험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적합해지거나 참되지 않는다.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경험주의자가 아니다.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왜 감정에 예속되었나, 내가 단편적, 부적합한 인식을 하였구나, 이것을 전체라고 하는 구나, 이렇게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철학이다. 상상,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아이였으니 그렇다. 철학하는 자는 내가 겪는 인생, 생사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수행하거나 공부한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이해한 것이다. 사유란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뭔가 저절로 이해하게 되고 단편적 인식에서 어떤 지평을 확 뚫고 나아가기도 한다.

모든 관념, 정신의 활동은 누군가가 떠먹여주어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의 관념을 작동시켜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이해해 보려고 해야 한다. 사유 활동하는 만큼 그 개념이 내 것으로 이해된다.

인식의 활동을 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만끽하시라. 모든 관념은 인식의 활동의 산물이다. 써보시라. 실존도 행위의 역량이다. 인식도 실존의 역량이다. 실존이 두 가지로 표현된다. 표현되는 방식이 하나는 신체로, 하나는 정신으로 표현된다. 성인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말과 성인의 몸짓, 행위로 표현된다. 말은 행위와 분리되면 안 된다. 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관계 맺는 방식, 즉 신체성은 관계성인데, 말도 누구와 마주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참된 관념과 적합한 관념이란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편적이냐 전체적이냐이다. 통찰할 수 있느냐, 아니면 겪은 일부에 머물러서 관념을 형성하느냐의 문제이다.

 
전체 3

  • 2018-08-09 23:56
    채운샘의 육성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 여^^ 강석샘이야말로 채운샘의 진정한 강의 비서?!!ㅋ
    잘 읽었습니다!!

  • 2018-08-10 10:29
    리플레이 기능이 있는 후기 ^^ 오우 잘 읽었습니다!

  • 2018-08-11 13:37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총정리해주셨군요~
    6월 장자 시간에 스피노자는 정말 어렵다고 하셨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꿰고(?)계시네요!!
    덕분에 저도 정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