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스피노자 동물우화 2주 후기(지은팀)

작성자
한경석
작성일
2018-08-10 02:08
조회
139
이번 수업에서는 동물우화 5장~10장까지의 내용을 가지고 토론하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스피노자 두 번째 주인데 첫 번째 주에서 논의된 내용이나 개념이 곱씹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두 번째 토론을 진행하자니 개인적으로는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상태가 더욱 심해지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토론 세미나 후 강의만 들으면 ‘아하’ 하면서 다 풀리겠거니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시작한 과정인데, 채운 선생님 말씀대로 스피노자가 제시한 개념을 깊이 생각해보고 자신의 삶에서 풀어보려는 부가적인 사유와 노력이 많이 필요할 듯 합니다. 각설하고 채운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앞뒤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해한 한에서 간단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1. 5장 ‘바닷속의 물고기’는 ‘목적론에 대한 비판’이 핵심 내용인데,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 기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이런 목적론 비판은 ‘윤리학’ 1부 부록에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목적론이라 하는 것은 나의 삶은 내 밖에서 주어진 어떤 본질이나 가치를 담고 있으며 우리는 일생을 통해 그 목적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목적론 하에서는 우리 행동 하나 하나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삶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는 당위가 생겨납니다. 이런 당위적 명령에 밀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목적과 의미를 갈구하다 보면 지금 나의 현존이 결여로 인식되면서 현존 자체가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스피노자는 이를 비판하며, 삶에는 따로 떨어진 의미라는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목적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단순히 만물 중 하나일 뿐이며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이해해야 하고, 지금의 나는 다른 나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1-2.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보고 이를 코나투스라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생명의 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유지, 보존이라는 말은 현재 상태 그대로 멈추고 안주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변이시키면서 자기 존재를 끌고나가는 운동을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 피가 쉬지 않고 순환하고 작용하면서 생명을 유지해나가듯이, 우리의 신체나 정신이 계속되는 관계성 속에서 차이를 인식하고 변이를 만들어가면서 역량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가 존재라고 합니다. 새로운 관계를 통해 차이와 변이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습관적인 사고에 안주하려는 자세이자 현존을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실험과 변이, 확장을 거부하는 것이 유아적 사고이고, 고착과 안주 속에서 머릿속 이상만 생산해내는 것이 목적론적 사고입니다.

 

1-3. 유아적인 목적론에 따라 인간은 신을 상상해냅니다. 꾸불꾸불한 물체를 보고 뱀을 떠올리듯이, 이미지에 관념을 생산하여 붙이는 것이 상상입니다. 인간은 유아적 상상을 통해 신에게 ‘전지전능한 인간’이라는 관념을 가져다 붙입니다. 신을 만물 중 하나일 뿐인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요.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신이니만큼 이런 신은 오직 인간을 위해 세상을 만들어주지요. 자기중심적이자 유아적인 목적론입니다.

 

1-4. 미신 또한 자기중심적인 편견에 따라 생겨납니다. 신이 나를 위해 만물을 만들어주었고 항시 내 기원에 응답하고자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신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자세가 자기중심적인 편견에서 만들어진 미신입니다. 신이 의도하는, 외부에서 주어졌다고 믿는 본질과 의미에 매달리는 목적론은 인간을 더욱 미신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이에 반해, 주어진 본질을 상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려 하는 것이 니체의 관점주의입니다. 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 제각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하는 자만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행위를 통해 세상과 관계하면서 해석을 내리고 존재가 연속적으로 변이되고 세상과의 관계도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1-5.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자기중심적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만물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만물을 포괄하는 전체입니다. 그래서 신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자연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식물을 연상시키지만,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동양의 ‘도’, 불교의 ‘공’처럼 인간적인 관념으로 상상하거나 환언할 수 없는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는 참된 관념, 영원한 관념이라 할 수 있는데, 만물이 작동하는 진리를 이해하게 해주는 경지라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신이 만물을 포괄하고 인간과 분리되지 않은 만큼 인간도 그런 신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적 인식이란 궁극적으로 생을 이해하는 것이자, 특정 사건에 대해서도 몇 개의 선형적인 인과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와의 관계와 연기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미움이라는 감정이 생길 때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체화시키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실제 전체 맥락에서 미움이 일어나는 작용을 이해하면 미움에 고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로병사도 인간의 근본적인 ‘고’라고 하지만 자연 그대로 발생하는 것임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으며, 이런 깊은 이해가 바로 역량입니다. 진실한 이해는 지식으로 들어 납득하는게 아니라 행위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이해이며, 스피노자는 이를 인식역량과 행위역량이 같이 간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1-6. <윤리학>의 부제는 ‘기하학적 질서에 의해 쓰여진’인데,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질서에 대한 이해에서 신적 인식, 전체적인 이해를 예시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자연의 법칙에 위배하지 않는 선, 원 등의 기하학적 도형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명함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도 이런 깊이와 자명함을 가지는 단계에 도달하여 삶의 진리를 깨닫고 삶 자체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를 지복에 이르게 해준다고 합니다.

 

1-7. 권리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자기 존재 자신에서 나옵니다. 존재가 역량을 펼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권리와 인권이 생겨납니다. 자유인으로서의 역량을 펼치면서 살지도 않으면서 자유라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2-1. 6장 ‘천사와 쥐’는 본성과 역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스피노자에게 본성과 역량은 동일합니다. 존재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하고 변이하는데, 이 변이 속에서 역량을 크게 하려는 것이 생명의 본성입니다.

 

2-2. 우리는 필연성 속에서 변이합니다. 스피노자를 필연론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필연은 숙명론적으로 경로가 정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구도 자기의 신체성과 관계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음을, 예를 들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내 가족 안에서 사는 ‘나’라는 존재 조건을 무시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2-3. 스피노자에게 윤리의 문제란, 이러한 무수히 많은 관계, 합성과 분해, 변이를 통해 우리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악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수밖에 없는데 이 관계에서 돈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즉 나의 능동성을 키우고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공부라는 것도 학교에서 주어진 제도교육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원인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공부입니다. 이렇게 역량이 증대되는 것은 내재적으로 기쁨을 가져오게 되고 이것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선이 됩니다.

 

2-4. 스피노자에게 존재의 등급이란 없습니다. 인간이나 거미나 다 완전한 존재이지요. 다만 완전성의 등급은 존재하는데, 이는 변이를 다양하게 하고 역량을 크게 하면서 완전성을 이해하는 정도를 깊게 할수록 높아집니다. 누구도 공자로 태어나지 않고 누구도 도둑으로 태어나지 않았듯이, 숙명론적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닌 우리들은 변이 역량을 높이고 완전성 등급을 발달시켜 나가야 합니다. 만물을 전체 연관질서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높일수록 더 완전해지고 정서에 대한 단편적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 이해를 강조한 스피노자는 인식을 강조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 본성과 관련하여, 인간의 본성은 신체와 정신으로 구성되는데 거미의 본성은 어떤 것으로 구성되었는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신은 무수한 속성을 가진 전체일텐데, 거미가 그중 어느 속성을 가지는지 알 수 없고 그 속성을 가지고 어떻게 본성을 펼쳐내고 어떻게 변이를 이루어나가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실천적인 지점, 스피노자적 윤리의 관점에서 우리 본성을 어떻게 역량으로 드러내고 완전성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2-6. 모든 존재가 완전하듯이, 역량 또한 비교할 수 없습니다. 2단까지 외우는 아이가 3단을 외우게 되면서 느끼는 기쁨과, 9단을 다 외운 아이가 10단 이후까지 나아가는 기쁨은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비판했듯이, 학교라는 제도의 수량화라는 환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존재가 자기 역량을 증대시켜 나가는 기쁨과 선과 능동성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해는 자기긍정으로 연결되고, 이 자기긍정은 타자와의 비교, 타자의 평가에 따른 수동적 긍정이 아닙니다.

 

3-1. 7장 이후는 관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관련하여 신체성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신은 관념을 생산하는 인식 활동을 하는데, 이는 두 신체의 마주침과 변용 등 신체성에서 비롯됩니다. 단편적인 관계와 신체성 속에서는 부적합한 관념의 생산에 그치게 되며, 우리는 종합적인 관계와 전체적인 이해를 통해 적합한 관념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가 불에 손가락을 데어 생겨난 뜨겁고 무섭다는 단편적인 관념에 성인이 되서도 사로잡혀 있다면 불의 따뜻함, 유용성 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부적합한 관념만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3-2. 신체성과 관념과 관련하여, 생물학적으로 얘기하는 인간의 특성은 인간을 규정하는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준 게 아닙니다. 늑대소년처럼 신체성을 통해 인간적 관념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등의 종을 규정하는 정의는 공허합니다.

 

3-3. 신체성에 대한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동떨어진 ‘빨강’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나 작용이 없습니다. 우리 신체성으로 그 ‘빨강’을 눈으로 보고 그 색을 겪음, 그 색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빨강’이라는 의미있는 관념을 만들어냅니다.

 

3-4. 인간 관계에 대해 신체성과 관념을 적용하자면, 우리는 서로 작용하며 상대에 대한 관념을 만듭니다. 상대방에 대해 ‘이상한 사람이네’ 라며 평가하는 관념도 ‘두 신체의 마주침’이라는 의미에서 나 자신의 요소도 포함되어 만들어진 상호적 활동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수 있는데, ‘나’라는 존재가 같이 작용하면서 상대방을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부적합한 관념으로, 두 신체의 마주침이라는 말을 고민하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여 적합한 관념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감정적 예속을 넘어 전체적인 이해가 가능한 경지에 도달하신 부처님 같은 성인들은 어떤 사람이라도 선입견 없이 대하실 수 있었는데, 이를 관계역량, 접속능력이 뛰어나다 할 수 있고, 들뢰즈가 이야기한 ‘되기’, 즉 존재의 변이역량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5. 연장선상에서 책과의 관계를 얘기해보면, 어려운 책이라고 지레 포기하거나 책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체와 책의 관계 맺기도 모르던 한 줄 한 줄을 더 이해하며 역량의 증대를 느끼고 기쁨의 정서를 느껴가며 변이할 수 있는 과정 자체로 충분합니다.

 

3-6. 반복하자면,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역량은 정확히 비례합니다. 신체 역량과 관계성이 뛰어나면서 정신이 지체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신체 역량 없이 골방에서 정신적인 능력만으로 역량을 키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체성과 관계의 역량을 끊임없이 키워나가면서 적합한 관념을 생산하는 정신 활동을 계속하는 능동적 작업을 매순간 해 나가야 합니다.

 

3-7. 스피노자에게 적합한 관념, 참된 관념은 위와 같이 신체성과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현행적, 과정적 결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참된 관념’을 고정된 실재에 대한 유일한 관념으로 여기는 통념을 비판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사과’라는 실재가 존재하고 이 실재에 맞춰보고 확인할 수 있는 참된 관념이라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인식의 참 거짓을 판정해줄 수 있는 신 등 외부의 존재를 요청하게 되지요.

스피노자는 이렇게 실재와 관념을 분리시키는 것을 비판하는데, 스피노자가 보기에 한 아이가 눈 앞의 파란 사과를 접하고 신체성으로 관계하고 변이하면서 ‘사과는 파랗다’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다만, 스피노자는 계속되는 신체성과 관계를 통해 파란 사과도 있고 빨간 사과도 있다고 알아가고 사과란 존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깊게 만들어가면서, 부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으로 끊임없이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8. 따라서 교재에 나온 ‘날개달린 말’이 부적합한 관념임은 당연합니다. 이는 ‘날개달린 말’이라는 실재를 현실에서 끌고 올 수 없으니 맞춰볼 수 없는 그 관념도 오답이라는 것이 아니라, ‘날개달린 말’이라는 관념을 생산하는 과정이 신체성과 관계를 통해 얻어낸 관념이 아니라 단순히 ‘달리는 말’, ‘나는 새의 날개’라는 머릿속 이미지의 단편적 합성을 통해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단편적인 관념은 아무리 쌓아놓고 합성을 해봐야 적합한 관념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경험의 축적만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경험에서 가져온 인상, 저 경험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가지고 전체 사회를 정의내리고 세상은 어떻다고 판단 내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참된 관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매순간 내 관념이 단편적이 아닌지, 단편적 관념을 전체로 환원하여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부적합한 관념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리는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3-9.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체성과 관계의 현행적, 지속적 과정입니다. 별도의 목적이 존재하고 오로지 거기에 도달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과정, 즉 계속된 관계와 변이의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나는 왜 세상을 좁은 단편적 시야로만 인식하고 있을까, 왜 대인관계 등 일상에서 부정적 감정을 발생시키고 예속되는지, 왜 생로병사의 자연적 현상에 집착하여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의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며 변이해가는 과정 속에서 삶을 전체적인 시야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이 깨달음의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스피노자의 이런 개념을 단순히 개념으로만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유하고 신체성으로 발현시키면서 현행적, 과정적 공부와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는 채운 선생님의 당부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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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0 08:55
    역쉬 글정 반장님의 후기는 꼼꼼하고 섬세합니다. 수업 내용이 쏙 들어오는데요

  • 2018-08-10 10:25
    무언가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자세는 자기중심적인 편견에서 만들어진 미신이라는 것..! 요 말이 훅 들어오네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공부하면서 이따금 '이해'가 아닌 '경배'의 태도를 취할 때가 있는거 같아요. "스피노자는 역시 대단해" 하는 식으로 -_-ㅋ 믿음보다는 이해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관건이란 생각을 다시금 해보며. 꼼꼼 후기 감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