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9월 26일자 카프카 후기입니다.

작성자
윤영
작성일
2019-09-27 22:34
조회
209
 

일 때문에 늦어서 중간에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들어와서 귀를 기울여보니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셨습니다. 이 책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족이 있습니다. 바로 프리다-K 패밀리와 바르나바스-올가-아밀리아 패밀리입니다. 여기서 바르나바스는 전령사로서, 하급 관리인 클람과 ‘성의 말만 전해준다’는 점에서 위상이 같습니다. 이 성의 말은 실체가 없는 명령입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성에 대해 다 딴소리를 합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성과 백작은 그 어디에도 있게 됩니다. K는 이 말들, 명령들, 성과 백작을 감각하기도 하고 고장내기도 합니다. K에게는 다만, “성에 가려고 한다”는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K는 스스로 이 ‘성’이라는 것, 이 ‘실체없는 한계’를 선택합니다. 여기서 마음껏 움직이면서 길을 만들어가고 영역을 넓혀가고 인물들과 관계들을 엮어갑니다. 세계와 스스로를 구분짓지 않고 그 한계에서 노는 K. 이번에 개인적으로 다시 읽은 〈성〉에서도, 노는 것을 넘어 막 나가는(?) K가 읽혔습니다. 시작부터 놀라웠습니다.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문장들이 새로이 보였습니다.

그는 “내가 그렇다고 했잖소” 하고는 “토지 측량사에 관한 게 아무것도 없어.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먹고 사는 떠돌뱅이, 아니 더 못된 놈일 거야” 하고 소리쳤다. K는 순간 슈바르처와 농부, 주막 주인 내외 모두가 자기를 덮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첫 습격만이라도 피해보려고 바짝 이불 밑으로 기어들었는데, (...) “그러니까 착오라고요?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과장이 직접 전화하셨다고요? 별난 일도 다 있네. 그럼 그걸 이제 와서 측량사님께 어떻게 설명하라는 겁니까?”

    K는 귀가 쫑긋했다. 성에서 그를 측량사로 명했던 것이다.(〈성〉, 카프카, 솔 출판사, p.12-13)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작위적일 수도 있으나, 저에게는 작품을 아예 탈바꿈하게 만드는 부분이었습니다. 바로 K가 애초에 성이 불렀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라는 점입니다. K는 잠자리를 찾다가 주막 식당에 짚자리를 깔고 잡니다. 그러다가 슈바르처가 성 백작의 허락을 받아야 잘 수 있다, 하니 “그럼 허가를 얻어야 되겠군” 하고 “하품을 섞어” 말하며, 자신이 백작이 오라고 한 토지 측량 기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에 전화를 건 슈바르처가 그런 사실 없다는 답변을 듣고 K에게 소리 칩니다. 여기서 만약, K가 진짜 성에서 부른 인물이라면, “토지 측량사에 관한 게 아무것도 없어.”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발을 먼저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듣자 바로 습격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에서 방금 전의 답변을 번복하자, K는 귀를 쫑긋합니다. 성에서 그를 측량사로, ‘막’ 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작부터 K는 스스로의 의지로 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본인의 직업까지. 그가 선택한 이 ‘측량사’라는 직업은 실제 토지를 재고 구분짓는 일이 아닙니다. K의 측량은 경계를 따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경계를 허물거나 비틉니다. 혹은 이 경계와 저 경계를 무수한 방식으로 조합합니다. K의 경계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만리장성의 축조〉에서 카프카의 시간과 공간을 맛봤습니다. 이상주의-목적론에 대한 강한 반발과로 카프카는 “인과를 짓지 말아라” 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법 앞에서〉를 읽었습니다. 여기서의 ‘문지기’는 〈성〉의 ‘전령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유를 주기도 뺏기도 하는, 길을 막아서기도 열어주기도 하는 ‘경계’와 같은 인물. 중요한 것은 그 ‘경계’가 ‘말’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힘은 강력해서, 시골 사람은 열린 문을 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문을 통과한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문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이런 이분법을 넘어, 그 경계에서 시골 의사는 ‘지금’,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한, 강의 때 이 점을 아주 재밌게 들었는데, 시골 의사는 결정적으로 문지기가 퇴근을 못 하게 했습니다! 경계에서 알짱(?)거리는 시골 사람 때문에, 문지기는 그를 지켜보고 그의 질문을 받아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불쌍하지만 불쌍하지 않은 문지기였습니다.

또한 근대 시간론과 카프카의 시간을 비교했습니다. 근대에는 ‘성장’을 목표로 하는 직선 시간관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0점으로 시작해서 100점으로 도달하는 직선성. 그런데 카프카에게는 0점과 100점이 결국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0점은 100점의 시간에서 본 0점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0점=100점 시간에 갇혀있게 되는 것입니다. 카프카는 시간을 ‘원 구조의 갇힘’으로 봅니다. 하지만 갇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여기서 다시금 무수한 조합식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갇혀도 갇힌 게 아닌 그런 시간의 조각들에서 끊임없이, ‘지금’ 활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카프카가 생전에 출간했던 《관찰》을 스윽 보았습니다. 카프카는 《관찰》을 낼 때 작품들의 앞 뒤 순서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게다가 활자 크기, 책의 판형, 판면과 여백 등, 출판물의 외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니, 그 이유들이 참 궁금해집니다. 원서의 모습은 더더욱 궁금하구요. 언젠가, 카프카가 실제 거닐던 길과 그 길 위에서 카프카 원서를 보게 될 순간을 기대...하면 카프카 정신에 어긋나는 것일까요? 애시당초 카프카 정신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요?

사실, 꿈을 꿨습니다. 시작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많이들 앉아있었고, 선생님께서는 그 앞에서 수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청각이 점점 선명해지고, 선생님께서 ‘구간동승’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이 들렸습니다. “사람은 결국 어느 구간에만 함께 타고 있는 것 아니겠니.” 그러자 제가 손을 들고 물었습니다. “카프카도 구간동승자인가요?” 그리고 아마 퍼뜩 깬 것 같고, 미칠 듯이 이 꿈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전 끝까지 어둠 속에 누워만 있었고, 이제서야, 후기를 기회로, ‘카프카와 꿈 키워드’를 빌미로 써봅니다.

다음 수업 전까지는 〈만리장성의 축조〉, 〈성〉(적어도 3자리 쪽수까지), 아들 3부작(이라고 많이 불리는)인 〈선고〉, 〈화부〉, 〈변신〉을 읽어옵니다. 카프카 수업이 재밌는 것은 여기저기 파편들과 조각들이 많아서, 함께 얘기하면 갑자기 이 키워드가 튀어나와 그것에 대해 선생님께서 막 설명해주시고, 저 키워드도 튀어나와 그것에 대해 또 막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더불어 이 작품 저 작품, 카프카의 미로 속에서 정말 마음껏 헤매는 지라 즐겁게 정신이 없습니다. 동시에 정신이 번뜩입니다. 다음 수업 때도 정신이 있다 없다 하는 미로에서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
전체 4

  • 2019-09-30 09:22
    갇혀도 갇힌 게 아닌 시간의 조각에서 끊임없이 활보한다니. 흔히 생각하는 한계, 경계가 카프카에게는 새로운 기회이자 길이라는 게 넘 좋아요. 윤영샘 반가워요. 윤영샘의 즐거운 정신없음이 느껴져서 또 좋네요.ㅎㅎ

    • 2019-10-02 00:43
      저도 정말 반가워요, 나영샘! 샘의 하루하루 달라졌던 글들이 생각나고 또 읽고싶네요! 원격으로라도 함께 공부해요! XD

  • 2019-09-30 19:29
    아. 윤영샘은 드디어 '변신'하시려는가! 가장 많이 헤매는 자가, 가장 멀리 간다는 말을 카프카처럼 보여주는 작가도 없지요.
    무한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바로 이 제약 속에서 경험한다는 것. 매시간 놀랍습니다.
    그리고 저도 윤영샘이 꼽은 장면을 아주 좋아합니다. 측량사는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정했던 것이지요. 모든 경계를 측정하는 자로서.

    • 2019-10-02 00:48
      요즈음 수화를 조금씩 배우는데, ‘공부’라는 수화가 얼굴 양 옆에 손으로 벽을 세우는 모양이더라구요.
      이에 카프카가 생각났고, 벽, 출구, 그리고 공부라는 키워드가 요동쳤습니다. 아직 너무 게으르지만 벽을 길삼아 배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