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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동사서독 후기

작성자
끄느
작성일
2017-12-12 19:55
조회
131

지난 시간에는 [장자] <外物>편을 읽었습니다.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책에서는 전부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저는 1장, 7장, 9장, 12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1장에서는 “外物 不可必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언뜻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생활 속에서는 잘 실천되는 말은 아닌것 같습니다. 저는 이 말을 ‘나의 의도를 상대에게 관철시키면 안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外物 不可必”에 이어서 사례로 나온 關龍逢과 比干의 죽음, 미치광이 노릇을 한 箕子와 惡來의 죽음 그리고 桀紂가 망한 것을 보고 그렇게 이해했는데 아무런 해석도 없이 비약이 좀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자>의 이 말은 자연의 변화무상함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命을 받아들이라는 말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外物은 예외와 변칙이 늘 존재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또한 이들을 자신의 命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변화하는 자연(天) 안에서 살아야하는 필연 속에서, 우연 혹은 예외와 변수까지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야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장자]에서 無用之用은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外物>7장에선 無用之用을 또 다른 모습으로 변주하고 있습니다. 저는 혜시와 장자의 대화를 통해서 장자의 無用의 道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天地는 넓고 또 크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발로 밟는 크기만큼의 공간일 뿐이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발의 크기를 측량하여 그 공간만 남기고 주위의 나머지 땅을 깊이 파 黃泉까지 도달하게 한다 치면, 그러고서도 〈발 딛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쓸모 있는 땅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장자의 말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밟지 않은 땅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세>에서 나왔던 쓸모없기 때문에 벌목되지 않았던 커다란 나무이야기보다 無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같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익을 통해서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있고, 그래야만 삶을 유지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 無用의 道는 아무런 쓸모없는 가치로 여겨질 있습니다. 하지만 <장자> 無用의 道는 오히려 지금 필요한 같습니다. 나에게 필요 없으면 버리고 잘라내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장자>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이 밟고 있는 이외에 모든 것을 파내고 없애버려서 결국 고립되고 만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한발 한발 걸어가는 중에도 無用과 有用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無用과 有用이 서로 다른 상반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걸어나갈 수 있는 운동의 법칙이고, 매순간 변화하는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필수조건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밟고 있는만큼이지만, 무한하게 밟지 않은 땅이 있는 것”을 믿는 순간 존재의 역량은 무한해지는 것 같습니다. 존재의 역량이 무한해지면 ‘外物’의 변화무상한 예외와 변칙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것 같습니다.


9장에서는 막힘없는徹 감각의 작용을 이야기 하면서 “心有天遊 마음에 자연의 노님이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당개'의 공통과제에서 ‘徹’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는데, 이는 솥을 의미하는 력과 우又가 합쳐진 글자로 그 의미는 ‘식후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치워 없애다’의 뜻이라고 합니다. 즉 사물에 대한 이해를 막는 장애물을 모조리 치우는 작업이 ‘徹’이라는 글자라고 합니다. <장자>는 “마음에 자연의 노님”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9장에 나오는 비유대로 방에 공간이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툰다는 것도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절대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물리적인 공간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기에 공간을 분리하거나 확장을 시도해 볼수 있겠지만, “마음에 자연의 노님”을 갖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잘 안하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에 근심이 생기면 그 원인을 다른데서 찾아 ‘원망’하기 급급하지 마음의 근심을 털어내거나 마음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강의 중에 ‘원망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원망은 관념의 연쇄를 이어 나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는데요. 그 원망은 좀 처럼 지워지지않고, 오히려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저는 나름 ‘정신승리법’으로 이기려고 하는데 순간순간 힘든 순간이 떠오르는 걸 보면 그것 역시 미봉책인 것 같습니다.


12장에서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인지라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어버리며, 올무는 토끼를 잡기 위한 도구인지라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어버린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말이라고 하는 것은 뜻을 알기 위한 도구인지라 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통발과 올무 말의 공통점은 도구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도구라는 것은 그것이 지닌 목적을 정확하게 수행해야지만 잊을 수 있는데, 물고기나 토끼를 놓치거나 말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도구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처음 전달하려던 뜻은 점점 잊게되고 오히려 도구 즉 말자체를 문제삼고 얽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구라는 것에 집착해서도 안되겠지만 말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 쉽지 않음도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 <장자>가 처음에 말했듯이 “外物 不可必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미 나로부터 떠난 말은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마음의 근심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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