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2월 5일 인도철학 후기

작성자
동하
작성일
2016-12-12 14:45
조회
374
 

우파니샤드1

 

‘경전을 읽는’ 때는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집니다. 책장도 고요히 넘기게 되고요.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든, 해탈을 목적으로 하든, 끝없는 생사유전의 흐름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수천 년간의 지혜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 읽은 우파니샤드도 우주적 본질을 찾고자하는 인간의 절박함이 펼쳐져 있는 대하서사시 같은 느낌이었는데요. 이것을 말로 풀어서 논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끼리 중구난방의 오고감도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암튼 종횡으로 헤맸던 시간으로만 기억되네요. 그래서 현옥샘이 뭐라도 써와야 할 것 같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아트만은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

아트만을 아는 사람은 아트만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본다.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아트만을 발견하니 그는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리라.

아트만을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아트만이다. 모두가 같은 아트만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사방 어디든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 아트만은 사방 어디든 이미 가 있도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존재인 그는 창조주들을 위해 각각의 의무를 적절히 나누어 알려주었도다.(이샤 우파니샤드5-7)

 

불교n의 신선함과 대견함을 담당하는(본인은 싫어할지도) ㅌㅇ이 뽑았던 문장입니다. A4용지 여러 장 가득 타이핑 쳐온 준비에 모두들 엄지 척! 이였어요. ㅌㅇ이는 내가 한 하나의 행위가 촘촘한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우주적 행위라 할 수 있으며 이 세계를 이해할 가능성이 내 안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인데 그 점이 한편으로 한없이 기쁘다라는 말을 했어요. 그렇다면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싸울 이유도, 나만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나 그렇지 못해서 생기는 슬픔 따위는 없겠지요.

윤회, 업, 삼고, 열반 등등의 용어가 불교 고유어가 아니라 우파니샤드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채운샘의 강의로 알고 있었지만 문장으로 접하는 것도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자기 자신과 세상과 우주의 원리의 상호관계에 대한 것, 인간의 삶을 탐색하고 진리를 추구해나가는 점에서 다를 바 없기는 합니다.

우파니샤드 역시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존재의 허망함에 대한 번뇌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존재에 대한 애착을 원인으로 보고 현세를 고통으로 자각합니다. 따라서 반복하는 업으로 인한 윤회를 끊어서 깨달음의 세계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실재로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 생주이멸 변화하는 세계의 현존이외에는 바깥세상이라고 할 만한, 영원한 세계는 있지 않다며 이러한 무상한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인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주 세계의 주인은 ‘아트만, 바로 너다’라며 브라흐만이라는 실재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와의 합일을 제시합니다.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하며 현실적 실천에 더 가깝게 다가갔던 것이 인도인의 가슴에 오랫동안 파고들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형이상학적 인식에 있어서도 모두들 우파니샤드의 친근한 점을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업과 인과에 묶여 있지만 개체아가 어떻게 삶을 만들어 가는가(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처럼 들려 뭔가 실제적인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저만 그랬는지..)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것을 포괄하는 신비한 무엇을 자꾸 던져주는 우파니샤드 점점 궁금해집니다. 뭔가 지푸라기도 있으면 잡으려하는 이런 마음..

브라흐만이라는 우주적 상태의 충만함과 궁극적 실재의 경험적 자아인 아트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라는 말씀들이 오갔고, 우리가 헤맨 것처럼 개체적 차원에서 우주차원의 이해가 실제로 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것이기에 바라문들이 그렇게 금욕을 통한 고행과 명상과 요가 등등의 수행방법으로 자아의식이 해체되는 경험이 자기 버리기 형식으로 되었던 것 아닌가 추측해보았습니다.

‘평온을 위한 낭독’이 우파니샤드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다르지만 매번 반복해서 나오는 것도 특이하기도 하고요. 저는 3장 까타 우파니샤드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소년 나찌께타의 유랑과정에 눈이 갔습니다. 제례에 집착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바치라했던 나찌께타가 죽음이후의 세계를 묻자 신이 그 어려운 문제 대신에 다른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합니다. 모든 유혹을 거부하고 아트만을 묻는 나찌께타에게 신은 브라흐만으로 가는 지름길 ‘오움’을 말합니다. ‘오움’ 잘 이해되지 않지만 평온을 향한 주문 ‘오움’이 소리나 글자의 범위를 초월한 우주의 힘이라니 수업시작 때 낭독하고 시작하면 우리도 우주의 기운을 얻지 않을까요.

오움

저것이 완전하고 이것도 또한 완전하도다.

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이 생겨나왔도다.

완전함의 완전함을 빼내었으나 완전함이 남은 것이었도다.

오움- 평온, 평온, 평온

오움
전체 1

  • 2016-12-12 16:31
    ㅌㅇ이가 낭송해준 대목이라고 하시기에 오오~ 그럼 그날 참석자 전원의 낭송분을 읊어주실까 했는데,,, 아니었군요ㅎㅎ 어여 담주가 되어 내재성과 초월성의 철학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ㅜ 우리 각자의 복습과 '스스로 학습'이 시급한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