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 절차탁마 7월 18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7-10 13:15
조회
134
“활동,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p.378)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를 자신의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에게 있어 니체와 스피노자 철학의 공통점은 주체가 아니라 힘을 먼저 사유했다는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일정량의 힘이란 바로 그와 같은 양의 충동, 의지, 작용”입니다. 즉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맹금-주체는 없습니다. 그저 양들을 사냥하는 맹금-힘이 있을 뿐이죠. 또한 우리는 ‘번개가 친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번개라는 존재가 그 순간에 번쩍하고 빛나는 것이 아니라, 번쩍하고 빛나는 것, 그 빛남 외에 번개라는 ‘존재’는 없죠.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역량을 주체의 소유권 아래에 두기를 거부했습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삼각형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은 동시에 그 관념을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정신의 역량을 소유하고서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대로 무언가를 긍정/부정하고 판단하는 주체 같은 건 없다는 것. 니체와 스피노자는 자유의지 비판을 통해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하는 인식에 맞섭니다. 이러한 분리는 역설적이게도 행위와 삶을 기피하는 방식으로 행위와 삶을 구성하게 되죠. 스피노자는 행위역량과 인식역량과 실존역량을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자신을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실존은 신이나 도덕의 심판을 받거나 형이상학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새로운 마주침들 속에서 고양되고 촉진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것.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체는 더 이상 출발점이 아닐 뿐 여전히 주체를 사유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푸코 등의 사유는 주체의 발생의 조건을 질문합니다. 푸코는 자신의 관심은 항상 권력이 아니라 주체에 있었다고 말한 바 있죠. 권력관계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곧 어떤 힘들이 주체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탈주체적으로 제기하는 일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절대적 진실의 권력에, 개별적으로는 여러 다양한 진실들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이 인류에 속하는 나, 아마도 인류의 한 부분에, 인류의 이 시기에, 인류의 이 순간에 속해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일까?”(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일. 채운샘께서는 그런 점에서 들뢰즈와 푸코가, ‘사회적 관계’를 문제 삼았던 맑스의 사유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피노자의 자유의지 비판이 신체와 정신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니체의 비판은 ‘느낌’과 ‘감각’을 통해 제기됩니다. 우리는 흔히 의지를 실체화시키죠. 충동과 감각, 욕망을 조종하고 때로는 그것들에 맞서 싸우며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조타수의 이미지. 이것이 우리가 의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이미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의지’는 자연 속에서,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해도 의지만은 변치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사유할 때 가장 자유로워야 할 의지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신)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의지를 실체화시킬 때 우리는 그것과 더불어 어떤 초월자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의지를 그것에 목적을 부여해 줄 초월자의 목소리에 종속시키게 되죠.

니체는 실체화하지 않고 의지를 사유합니다. 의식이 따라붙어 언어화-동일화-규정하기 이전의 차원으로서의 감각과 의지를 연결시킴으로써. 니체에 따르면 의지는 역량의 증대에 대한 느낌입니다. 자기 역량의 증대에 대한 느낌. 역량의 고양이란 무엇일까요? 스피노자에게 있어 역량의 고양이란 기쁨이며 동시에 관계성의 증대였습니다. 힘이란 늘 다른 힘에 대한 힘이고 우리의 신체는 이미 이질적인 것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량이 고양된다는 것은 곧 관계성이 증대된다는 것. 물론 이때 관계성의 증대를 모든 것과 조화롭게 잘 지내게 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존의 관계를 고정시키는 일이겠죠. 관계성의 증대는 오히려 무엇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인식의 역량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는 계보학이란 참된 비판의 실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주어진 가치를 토대로 삼았습니다. 선/악, 참/거짓이라는 구분 속에서. 그것이 공리라고 불리건, 도덕이라고 불리건,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불리건 가치를 실체화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초월적으로 주어진 가치와 그것을 선택하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두 가지 오류가 결합되어 있죠. 니체는 주어진 가치들 중에서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대신에 가치 자체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가치를 가치평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힘의 지평 속에서 가치를 소유하는지를 분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대로 가치를 소유합니다. 우리의 존재 양식이란 결국 우리를 구성하는 힘의 미분적 요소, 힘들의 관계가 드러난 방식이기 때문이죠. 가령 우리가 난민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평등’이라는 가치를 소유할 때, 가치 자체의 차원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가치평가자의 힘의지가 드러납니다. 니체는 어떤 힘관계(=삶의 양식) 속에서 가치가 출현하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주어진 가치들의 기반을 허물어버립니다. 그리고 가치를 흔드는 순간 새로운 가치의 발명은 시작되죠.

다음시간에는 《선악의 저편》 1,2장을 읽습니다. 그리고 《도덕의 계보》 10~13장을 다시 읽으면서 노예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따라 도덕의 기원을 서술하는 글을 써옵니다. 간식은 정수샘과 윤순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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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1 12:59
    운명을 사랑하는 기쁨! @.@ 자기 역량이 증대되는 것을 구체적 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