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7월 25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7-22 17:40
조회
119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니체는 읽으면서 뭔지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하나도 정리를 못하겠어요. ㅋㅋㅋ 흐아... 그래도 채운쌤이 느낌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꼼꼼하게 정리해야 될 부분들을 짚어주시는데 그것도 정리를 잘 못하니... 아직 니체를 어떻게 읽고 싶은지 별로 생각이 없나 봐요. 더 애정을 가지고 읽어야겠습니다!

다음 주 공지 들어가겠습니다. 숙제는 이번 시간 채운쌤이 설명해주신 ‘관점주의’를 각자 자기 식으로 정리하고, 3, 4장을 읽으면서 종교가 정서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정리하시면 됩니다.

 

진리의 자명성을 의심하기

이번 시간에 가장 중요한 개념은 ‘관점주의’였습니다. 조별토론에서는 관점주의를 상대주의와 비교해서 얘기했었습니다. 얼핏 관점주의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를 묻는 것 같았고, 특정 진리가 옳다고 하지 않았던 니체는 특정 관점이 더 옳고 그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상대주의가 상대방과 나의 진리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머문다면, 관점주의는 자신의 역량의 고양을 위해 기꺼이 가치의 투쟁을 벌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관점주의를 통해 니체가 최종적으로 얘기하려는 것도 강자의 관점을 취득하는 일일 것이라고 추측했었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관점주의와 상대주의는 완전히 다른 층위입니다. 상대주의는 모두에게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대해 서로 참견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특정 진리가 더 옳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진리 자체가 허구적인 것임을 계보학적으로 보여줍니다. ‘천 개의 가면’, ‘천 개의 시선’ 같은 말들도 단지 사물에 대한 관점 여러 개를 가지라는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죠. 니체는 진리의 자명성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철학을 전개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조건과 무관하게 신이란 존재가 부여한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란 없습니다. 모든 진리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이 말은 모든 진리는 각각의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임을 뜻합니다. 니체의 철학적 작업인 계보학을 생각해봐도, 결국 계보학의 핵심도 진리의 자명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죠. 따라서 관점주의를 얘기할 때는 그것이 진리에 대한 자명성을 의심한다는 것, 인식의 발생조건을 묻는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관점주의는 진리를 생산하는 자의 힘의지를 묻습니다. 오랫동안 철학은 ‘진리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런 철학은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데아가 있고, 이데아에 이르는 훈련으로서의 철학을 얘기하죠. 하지만 니체처럼 진리를 해체해버린 철학에서는 진리를 발생시킨 힘의지가 중요합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1장의 1절에서 “여기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 안에서 무엇이 도대체 ‘진리를 향해’ 의욕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진리와 관련된 힘의지를 묻습니다. 여기서 힘의지는 우리의 생리학적인 해석, 즉 느낌의 차원과 관련됩니다.

 

느낌으로서의 철학

니체의 철학이 혁명적인 지점 중 하나는 신체 영역의 느낌과 정신 영역의 사유를 하나로 통합했다는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다’ 혹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좋고, 나쁨의 느낌이 선행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떤 느낌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 역시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발생한 결과입니다. 니체가 질스 마리아에서 “영원회귀가 내게로 왔다”고 말한 게 생각나네요.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의식적으로 결심을 하는 것으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느낌을 다르게 구성하지 않는 이상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해석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전과는 다른 해석의 틀을 가지기 위해선 느낌에 대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감각적sensible’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감각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 이상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정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세계에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되지 않았다는 말은 세계가 끊임없이 변이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진리를 발생시키고 인식하는 것 역시 허구(상상)를 기반으로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세계의 변이에 맞추지 않고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는 걸까요? 니체는 이것 역시 외부의 강압적인 무엇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순일한 주체로부터 발휘되는 권리가 아닙니다. 니체에 따르면, 의지는 감정의 차원, 사고의 차원, 명령의 정서라는 세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즉,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는 수많은 해석 중에서 하나의 해석에 복종한 결과가 우리의 의지로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가 결과적으로 생겨난 자아를 우리의 원인으로 전도한 것처럼, 의지가 주체성을 담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지를 행위의 원인으로 전도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힘의지에 복종할 때 쾌를 느끼는지 질문해야 하고, 이것은 우리의 도덕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채운쌤은 모든 힘이나 욕망에서 탈주선이 선차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느낌, 다르게 말하면,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힘이 없음을 온도로 설명해주셨습니다. 가령, 똑같은 30도라도 40~60도 불가마에서 있었던 사람이 느끼는 30도와 에어컨이 빵빵한 20도 실내에 있었던 사람이 느끼는 30도는 다릅니다. 결국 질문해야 되는 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인식하는가, 인식의 발생 조건과 해석하는 힘의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다양한 것에서 차이(이질성)를 포착할 수 있는 감수성일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관점주의의 핵심은 인식의 발생 조건을 사유하는 것인데, 이때의 발생 조건이란 세계에 어떤 도덕성도 내재돼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세계의 끊임없는 변이입니다. 결국 계보학의 목표도 고정된 방향, 추구해야 할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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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3 01:22
    '관점주의'와 '종교적 정서'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숙제로군요! 종교적인 것을 둘러싼 힘 의지들이 궁금해집니다. @.@ 니체,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