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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1-6 "어떻게 인쇄된 글은 목소리를 잃었는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7-01 10:17
조회
253
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 정아



1-6.
어떻게 인쇄된 글은 목소리를 잃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내가 앞에서 소개한 방랑하기와 항해하기의 구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세의 독자에게는 텍스트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와도 같았음을 다시 떠올려보자. 페이지의 표면은 땅과도 같았다.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자처럼,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개척자처럼, 독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간다. 반대로 현대의 독자에게 텍스트는 미리 만들어져 빈 종이에 찍혀 있는 것이다. 완전한 모습으로 지도 위에 인쇄되어 있는 세계와 비슷하다. 플롯을 따라가는 일은 지도를 보며 항해하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지도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여행자들이 여정에서 얻어온 지식이 없었으면 만들어질 수 없었음에도 지도 자체는 이런 여정에 대해 어떤 증언도 하지 않는다. 그 여정들은 이제 다른 것으로 대체된 과거로 분류된다. 세르토가 말했듯이, 지도는 그것을 만든 모든 과정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지도 위에 구현된 모습이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Certeau 1984: 120-1; Ingold 2000: 234). 하지만 지도에 재현된 세계는 거주자가 없는 세계다.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다. 마찬가지로, 인쇄된 텍스트에서는 과거의 목소리가 제거된다. 지도에서 거주자의 여정이 제거된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이다. 텍스트는 만들어지기까지의 노고와 활동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오로지 완성된 가공물로, 작품으로 여겨질 뿐이다. 언어는 조용해졌다.

여기서 내가 했던 주장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언어가 소리를 잃고 음악에서 분리된 것이 글의 탄생이 아닌 글의 종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글의 종말을 예고한 것은 표면에 대한 인식의 급격한 변화였다. 거닐 수 있는 풍경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던 표면을 스크린과 같은 것으로, 또 다른 세계에서 이미지들을 투사해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글은 손으로 쓴 작품, 즉 필경의 예술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의미의 글은 그러하다. 페이지에 새겨진 선들은, 그것이 글자건 네우마건 구두점이건 기호건, 손의 능숙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흔적들이었다.

페이지를 훑는 독자의 시선은 동물의 흔적을 살피는 사냥꾼처럼 그것을 만든 손의 궤적을 따라가듯 그 흔적들을 따라간다. 예를 들어, 가장 오래된 필사본 다수에서 발견된 ‘수상(手相)’ 네우마(‘chironomic’ neumes)는 성가대 지휘자의 손동작과 비슷한 모양이라 그렇게 불린 것이다(Parrish 1957: 8). 합창할 때와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여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나갈 때도 핵심은 눈으로 따라가고 목소리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근대 이후와는 달리 시각적 추정과 청각적 참여로 분리되지 않았다.

손동작과 쓰인 글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깬 것은 인쇄 기술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인식의 변화를 ‘야기’한 것이 인쇄술이었다고 주장하기는 좀 망설여진다. 공학과 건축 등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서 결과는 똑같았다. 숙련된 수작업은 ‘창의적인’ 디자인 또는 작품과 ‘한낱’ 기술적인 작업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수작업―인쇄업자든 건축업자든 정비사든 그들의 수작업―은 정해진 작업 순서를 이행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이는 기계로도 가능한 일이었다(Ingold 2000: 349-50). 이 주제에 대해서는 5장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문학 분야에서 창작물이 작가의 것으로 여겨지는 점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작가가 작업한 결과물을 원고라고 지칭하고, 그가 글을 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그가 하지 않은 일 중에 하나다. 물론 작가는 숙고하는 과정에서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쓴다. 그러나 이는 작업에 수반되는 많은 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서재 안을 서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완성된 작품을 종이에 인쇄하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작가가 쓰지 않는다면 인쇄업자도 쓰지 않는다. 글쓰기는 뭔가를 새기는 과정인 반면 인쇄는 하나의 ‘자국’이다. 그것을 찍기 위해 준비되어 있던 빈 표면에 미리 작성된 텍스트의 자국이 찍힌다. 이 과정에서 어떤 행위가 있었든, 그것이 손동작이든 기계적 작동이든 간에 그 행위가 만들어낸 기호들의 모양과는 어떤 연관성도 지니지 않는다.

1-7. 인쇄로 고정된 말

여기서 옹의 이론으로 되돌아가보자. 그의 주장인즉, 말이라는 것을 시각으로 포착하는 고요한 물체로 만들어 조용히 잠재운 게 글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옹이라 해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중세의 독자에게 단어들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단어들은 소리와 움직임으로 술렁이는 것이었다. 옹에 따르면, 이런 인식은 필사본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문화 주변부에 끈질기게 남아 있던 “듣기의 우위” 현상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인쇄가 도래하고 나서야 비로소 완전히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손으로 쓰인 선들이 자신들을 사물로 만들려는 시각의 압박에 굴복하길 거부하며 계속 꿈틀거렸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말은 인쇄가 도래한 후에야 마침내 고정된 듯하다. 옹은 이렇게 적고 있다. “활자는 글 못지 않게 말도 사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말을 실질적으로 사물화한 것은 글이 아니라 활자였다”(1982: 119-21).

옹이 양다리를 걸치려 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글은 어떤 면에서 말을 사물처럼 표현하”며, 그런 점에서 활자는 수천 년 전 글이 도래하며 시작된 사물화(reification) 과정의 연장일 뿐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같은 책: 82, 91). 하지만 그의 주장이 옳다면, 말을 ‘실질적으로’ 사물로 바꾼 것은 글이 아니라 활자였다. 그렇다면 말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되면서 사물이 되었다는 처음의 논지는 어떻게 되는가? 손으로 쓰인 말은 인쇄된 말만큼이나 뚜렷이 보이지 않는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글과 말의 구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둘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구술성(orality)과 문자성(literacy)의 대비적 측면에서 자주 논의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개의 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청각적, 시각적 감각 양식 사이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적 표현(bodily gesture)(음성이나 손짓, 또는 둘 다)과 물질적인 표면 위에 새겨지는 흔적 사이의 축이다. 이런 구분을 종합하면 두 개가 아닌 네 개의 선택지가 생긴다. (1) 청각-표현, (2) 시각-흔적, (3) 청각-흔적, 그리고 (4) 시각-표현 (그림 1.7).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말과 글을 이해하는 현대의 방식에 상응한다. 우리는 귀로 들리는 음성 표현들로 구성된 것을 말이라고 생각하고, 눈으로 보이는 쓰인 흔적들로 구성된 것을 글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의 발명품인 녹음 장비를 쓰지 않는 한 목소리는 오래가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므로, 세 번째 선택지는 근래에 들어 가능해진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레미아 예언자의 필경사 바루크를 잊지 말자. 그는 스승이 입으로 선포한 말을 잉크로 옮겨 적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구술(dictation)’의 경우로, 오래가는 흔적이 남을 것을 예상하며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이다. 그 흔적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긴 해도 말이다.


그림 1.7  / 말, 글, 구술, 손동작

 

필경사는 물론 손으로 작업한다. 손의 움직임이 없으면 글로 쓰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옹이 남긴 선례를 따르면서, 말과 글에 대한 논의들은 대부분 손과 그 움직임을 간과하게 되었다. 청각적, 시각적 양상의 대비와 각각의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제스처와 그것으로 새겨지는 흔적들 사이의 관계는 놓치고 만 것이다. 글은 능숙한 손놀림이 만들어낸 오래가는 흔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말의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림 1.7에 보이는 네 번째 선택지, 손동작의 시각적 인식을 떠올리게 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적 인식은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의사소통을 할 때 드러나는 특징이다. 우리는 말을 하며 손짓도 함께 하는데,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는 한 이런 동작은 쓸모가 없다. 또한 청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수화 같은 언어의 형식들도 있다. 이런 언어는 완전히 고요하며 손동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을 보는 것은 듣는 것만큼이나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참여적인 활동이다. 조너선 레(Jonathan Rée)는 이렇게 주장한다. “눈에 보이는 동작과 귀로 들리는 말에 의한 의사소통 사이에 형이상학적인 심연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환상이며, 이론이라기보다는 망상이다.”(Rée 1993: 323-4).

그의 말이 맞다. 수화는 구어만큼 유동적이고 활동적이며, 구어보다 더 사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더구나 손의 움직임이 페이지 위에 남기는 것이 즉각적인 흔적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수화를 보는 것이나 글로 쓰인 말을 보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고찰은 시각이 본질적으로 뭔가를 사물화한다는 만연한 착각을 완전히 날려버릴 것이다. 말이 사물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보는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술적으로 시행되는 동작과 그것에 의한 결과물 ̄손으로 쓰이는 대신 인쇄로 생산된 결과물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필사본 원고를 읽는 것은 텍스트의 말들을 ‘선포하는’ 목소리와 함께 손이 만든 흔적들을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인쇄된 페이지에는 따라갈 흔적들이 없다. 3장에서 이야기하듯이, 독자의 눈은 종이를 훑지만 독자는 그곳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페이지 위의 말들이 사물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확신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더욱 활기차고 참여적인 청각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심한 관찰의 기능으로 축소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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