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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1-8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7-15 00:10
조회
210
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 정아






1-8. 악기와 함께
(그리고 악기 없이) 부르는 노래

이 글은 말과 음악의 구분에 관한 궁금증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글과 음악의 표기 관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글과 음악의 표기는 모두 선들을 포함한다. 하지만 중세의 필사본에서 현대의 인쇄본으로, 고대의 네우마에서 현대의 음악 표기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변한 것은 선들의 형태만이 아니다. 선이라는 것, 선과 표면의 관계, 선과 신체적 표현, 특히 시각과 소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문제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처럼 말과 노래의 문제에서 출발한 우리는 이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게 될 선의 특성과 역사에 관한 연구 목록을 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진행하기에 앞서, 잠시 사회 인류학자들이 좋아하는 활동에 탐닉하는 것으로 나의 학문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그 활동이란 바로, 비서구 사회에서 발견되는 비교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다. 이 일에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는 잘 알고 있다. 우리 것만큼이나 오래되고 복잡한 지식과 실천의 전통들 가운데서 그럴듯하고 피상적인 유사점을 찾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의 표기 역사를 조사하며 마주한 문제들이 이곳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분명히 공명하고 있었다는 점. 이를 위해 일본과 페루 아마존의 예를 소개하려 한다.

일본의 가면극 ‘노(noh)’에는 전통적으로 ‘쇼가(shōga)’라 불리는 음악이 연주된다. ‘쇼가’는 문자 그대로 노래하기, 혹은 읊조리기를 뜻한다. 하지만 쇼가는 악기의 소리와 그것의 표기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악기마다 다른 형식의 쇼가가 있지만, 모두 노래하거나 읊조리듯 목소리로도 따라갈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내용은 ‘후에(fue, 피리)’라는 한 악기에 관한 것인데, 인류학자인 가오리 이구치(Kawori Iguchi)의 작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구치는 일본 교토의 전통 음악 교육과 연주에 관한 민족지학적 연구를 진행하던 중에 ‘후에’에 관해 조사했다(Iguchi 1999).

현대 서양 음악 표기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후에의 쇼가는 몹시 특이하게 보일 것이다. 일본어 가타카나에서 가져온 글자들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 글자들은 웅얼거리거나 흥얼거리듯이 읽는데, 쇼가의 음절들은 모두 모음과 같아서 연이어 읽어도 소리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발음하는 과정에서 혀와 입술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며 조정되고, 따라서 구강의 모양도 계속 조정된다. 예를 들어 그림 1.8에 보이는 표기는 위에서 아래로 읽고, 오-햐-아-아-아-아-라(o-hya-a-a-a-a-ra)로 소리난다. 이처럼 쇼가에서 음악의 본질은 음성어의 흐름에 있다. 하지만 이 가타카나 음절들은 말할 때와 같은 소리로 발음된다. 따라서 이구치의 지적처럼, 말과 음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쇼가에서는 말하기와 노래하기가 동일한 것이다(Iguchi 1990: 108).

(위) 그림 1.8 /  ‘추-노-마이(chu-no-mai)’에서 ‘가카리(kakari)’ 부분의 구절: (a) 오(o), (b) 햐(hya), (c) 아(a), (d) 라(ra). 이구치(1999: 90)


그렇다면 피리는 어느 부분에서 연주될까? 피리는 선율을 표현하는 악기지만, 쇼가에서 선율은 부수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다. 따라서 연주자가 피리를 연주하건 연주하지 않건 상관없이 음악은 동일하다. 피리를 연주하지 않으면 목소리를 이용한 허밍으로 음악이 표현되고, 피리를 연주하면 아름다운 선율로 표현된다. 경험이 부족한 연주자가 중요한 공연에서 연주하게 되면 스승이 그의 뒤에 앉았다. 그가 실수하거나 계속 이어가지 못할 때 허밍으로 쇼가를 대신 연주하기 위해서다. 노 공연에서는 연주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건 음악이 끊기지 않고 연주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대에서 배우가 연주자에게 부딪혀서 연주자가 악기를 떨어뜨리면 그는 악기를 주워들 때까지 음성으로 쇼가를 연주했다. 관객들은 후에 연주를 들으면서 쇼가를 허밍으로 따라하기도 했다(Iguchi 1999: 88, 107).

일본의 ‘쇼가’와 고대 그리스의 ‘무시케’ 사이에는 묘한 유사점이 존재한다. 쇼가는 모음의 가타카나 글자로 쓰이고, 무시케는 알파벳 글자로 쓰였다는 점이다. 알파벳은 셈어의 문자에서 가져온 글자들로 그리스어 모음을 쓰려는 시도에서 생겨난 것인데, 셈어에서 모음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Olson 1994: 84). 쇼가와 무시케에서 음악의 본질은 읊조리는 소리들의 반향에 있었다. 반면 선율의 측면은 보조적이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다.

두 경우 모두 선율을 표현하는 주요 악기가 피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유사점을 추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스 악기 아울로스(aulos)는 흔히 피리로 묘사되지만 피리와는 다른 악기였다. 리드(reed, 관악기에서 소리를 내는 얇은 진동판-역자)가 두 개인 더블리드 악기로, 중세의 숌(Shawm, 오보에의 전신인 목관악기-역자)이나 현대의 오보에와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Barker 1984: 14-15; West 1992: 81).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두 개의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피리처럼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다양한 음을 표현했다.

해블록과 웨스트는 한 아테네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언급한다. 기원전 480년 경에 제작된 이 술잔(kylix)에는 음악과 시, 암송 수업을 하는 일련의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1.9는 화병의 한쪽 면에 묘사된 장면들이다. 앉아 있는 인물들은 분명히 성인이지만 그보다 작은, 서 있는 인물들은 어린 학생이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자식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학부모이거나(Havelock 1982: 201-2) 소년을 학교에 데리고 온 노예일지도 모른다(West 1992: 37). 중앙에 앉아 있는 인물은 현대의 독자들이 즉시 랩톱 컴퓨터로 볼 만한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 그는 학생이 기다리는 동안 뭔가를 쓰고 있는 듯하다(학생의 작업을 고쳐주고 있는 건 분명히 아니다. 쓴 것을 지울 때 사용하는 납작한 끝쪽이 아니라 뾰족한 앞부분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해블록(1982: 203)은 낭송을 위해 학생이 외워야 하는 텍스트를 스승이 쓰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위) 그림 1.9  / 두리스(Douris)의 작품에 묘사된 암송 수업, 베를린 박물관, 고대 유물 전시관(Antikensamulung).
사진: 요하네스 로렌티우스(Johannes Laurentius)


그렇다면 왼쪽의 두 인물 사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음악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아울로스를 연주하는 사람이 스승임을 주목하자. 서 있는 제자는 악기조차 들고 있지 않다! 그는 스승에게 무시케를 읊어보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악기만 바꾸면 이 장면은 일본의 전통 음악 수업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거기서도 피리를 처음 배울 때는 쇼가를 암송하는 것부터 배운 뒤에 악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구치가 언급하듯이, “선율을 입으로 노래처럼 부르거나 암송할 수 있다는 점”은 선율을 표현하는 일본 전통 악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Iguchi 1999:87).

선율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확정적인 음들의 연속적인 흐름이다. 하지만 쇼가는 음의 높이에 대한 정보를 전혀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리 연주자는 어떻게 연주할 음을 알 수 있을까? 답은 운지법에 있다. 특정 조합으로 피리의 구멍을 막는 각각의 운지법은 특정 음을 명시한다. 그림 1.10은 이구치의 후에 선생님인 수기 이치카주(Sugi Ichikazu)가 소개 강의에서 사용한 쇼가의 한 페이지다. 쇼가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쇼가 자체는 검은 펜으로, 운지법은 붉은 펜으로 쓰였다. 여기에 이치카주 선생님은 동그랗게 피리 구멍을 그리고 막아야 할 구멍을 칠한 그림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이런 그림을 덧붙이지 않았다.

(위) 그림 1.10  / 가오리 이구치의 피리 선생님이 쓴 첫 번째 쇼가. 이구치(1999: 94)


운지법은 보통 한자로 쓰이고, 각 글자는 손가락의 특정 배열, 피리의 특정 구멍, 그 결과로 연주되는 특정 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후에는 솔로 악기이므로 조율을 표준화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따라서 같은 음이라도 다른 악기로 연주되면 음의 높이가 상당히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율뿐 아니라 운지법을 표준화하려는 시도도 없었다(Iguchi 1999: 106). 숙련된 피리 연주가는 정교하고 화려한 운지법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기교를 뽐낼 수 있었다. 선율적 효과는 상당히 뚜렷했다. 사실 너무 뚜렷해서 노 가무극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운지법으로 연주되던 그 곡과 같은 곡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어떤 기법으로 연주하든 기본적인 쇼가는 동일하다.

정리하면,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쇼가에서도 선율의 변화는 원래의 음악을 바꾸는 일 없이 장식하기만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피리 구멍과 음에 관한 운지법은 가타카나 음절로 표기되는 쇼가에 보조적인 것이다. 중세의 노래책에서 단어와 글자들에 네우마가 보조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것들은 단지 주석일 뿐이고, 우리가 아는 ‘그런’ 음악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선 악보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지법이 표시된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서양의 악기 연주가들은 일본의 후에 연주가들처럼 동일한 부분을 연주하는 독특한 운지 기법을 개발할 수 있다(그림 1.11참조).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일본의 전통 음악에서는 운지법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선율이 모두 연주의 잠정적인 측면이다. 음악의 본질은 음성 요소에 있다. 반면 오선 악보에는 모든 음이 운지법에 대한 언급 없이 명시된다. 따라서 운지법은 잠정적인 요소지만 선율은 그렇지 않다. 선율은 ‘무엇’이 연주되느냐의 측면이지, ‘어떻게’ 연주되느냐의 측면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음악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는 서양의 현대 음악과 중세 음악을 가르는 차이와도 매우 유사하다. 노래의 음악성이 음성의 측면에서 선율의 측면으로 옮겨졌듯이, 선율은 그것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신체적 표현(손재주이건 음성이건)과 분리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율의 표기는 신체적 표현을 표기하지 않게 되었다.


(위) 그림 1.11  /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의 악보 일부. 연필로 써넣은 운지 번호와 활쓰기 기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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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0 20:57
    잉골드씨는 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듯 하다가 요번에도 기대감만 키워놓으시곤,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펼쳐놓으시네요. ㅎㅎ 이런 글쓰기의 스타일은 감질맛이 나요... ^^

    그나저나 쇼가와 무시케라는 고대 음악에서 음악의 본질은 선율이 아니라 "읇조리는 소리들의 반향"에 있었다는것이 독특합니다. 음악의 본질이 음성요소에 있었다는 것은 음악이 '무엇'을 연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연주하느냐의 문제였다는 것이고, '신체성'이 음악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것이었겠어요. 선율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 '무엇'이 연주되느냐의 측면이라는 관점이 새롭습니다. 음악, 노래, 악보,표기, 연주,신체성...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의 관계성을 역사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매우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주시는 게 무척 신선합니다~

    다음 편도 기대할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