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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를 보라] 부단한 배움으로 권태에 직면하기(절차탁마 NY/정건화)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9-12-01 19:38
조회
527

부단한 배움으로 권태에 직면하기


나의 무던함 뒤에 감춰진 의존성


나는 스스로를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열정과 활력이 넘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내 나름의 미지근한 온도와 적당한 강도와 느긋한 속도로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나는 어떤 새로운 것에 경탄하는 일이 별로 없다. 어떤 일에 삶을 걸고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어떤 목표에 빨리 도달하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해 본 기억도 없다. 아니, 사실 뚜렷한 목표를 가져본 적도 없다. 대신에 나는 나 자신이, 다른 이들을 의식하거나 내게 닥친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천천히 나만의 영역과 리듬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나 자신을 ‘긍정’했다. 동시에 '열정'과 '노력'과 '성실'을 강요하는 사람들(세상?)을 혐오했다. 그런 이들과 마주칠 때면, '당신들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으니 날 좀 내버려둬, 게으르면 좀 어때, 난 내 속도로 갈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로 그들이 내게 행사하는 힘을 무화시켰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그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해온 이미지와 정반대의 모습들을 거듭 발견하게 된다. 알고 보니 나는 새로운 것이 주는 자극, 나의 컨디션, 외부의 시선 등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밖에는 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의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리고 내가 가장 직시하기 싫었던 사실은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이다.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의 시선이 (혹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만들어내는 강제력이 작동하는 연구실을 벗어나 집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곧바로 모든 일을 놓아버린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거나 멍하니 기타를 치면서 몇 시간이고 안락한 마취상태에 빠진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도저히 몸과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을 수가 없다. 어이없게도 외부의 강제를 그토록 혐오하는 나는 내게 가해지는 외부의 시선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이 없는 무인도에서 주인공 로빈슨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자기 똥과 진흙이 섞인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장 좀 보태서 그게 딱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를 준비하고 쓰는 과정을 통해서도 나는 나의 이러한 취약하고 찌질한 모습을 목도했다. 올해 내내 나는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해서 공부를 해왔던 것 같다. 주변의 환경과 나의 컨디션에 따라서 반짝 집중력을 보이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게 다 귀찮고 버거운 의무로 느껴져 최소한의 약속마저도 방기해 버리곤 했다. 이런 나의 기복이 이번 10주 간에 걸친 에세이 준비 기간에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한 주는 열심히 준비하는 듯 하더니 다음 주에는 긴장을 놓아버리고 또 그 다음 주에는 원점으로 돌아가 서론을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주워들은 말이나 얄팍한 논리, 순간의 기지 같은 것으로 적당히 감추고 무마해 온 나의 의존성과 취약함이 긴 기간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에세이 쓰기에서 그대로 뽀록난 것이다. 들쑥날쑥했던 준비 과정은 내 역량으로 전환되지 않았고, 그 결과 나는 본문을 제대로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 인해 모든 것들과 소모적인 방식으로밖에 관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올해 내내 나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책도, 강의도, 일상도, 세상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도 어쩐지 다 알 것 같다는 오만과 권태로 물든 감정 상태가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진단을 해보았다. 너무 니체만 공부해서 그런가, 작년에 책을 쓰고 흔히들 말하는 '번 아웃'이 온 건가, 아니면 이제 공부가 싫어진 것인가. 그런데 이는 모두 나의 권태를 외부적 요인의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해석 방식일 뿐이다. 이렇게 진단함으로써 내가 외면해 온 것은 스스로 동력과 리듬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결과로 모든 것들과 소모적인 방식으로만 관계하고 있는 나의 찌질한 모습이다. 나는 스스로 온기를 품어내지 못하고 빠르게 식어버리는 나의 몸과 마음을 무던한 삶의 태도라고 우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약속을 지키는 것을 자기 존재의 전부로 여기고 성실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또 그것으로 남들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물론, 될 수도 없다). '주어진 일'을 규격에 맞게 충실히 해내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암담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은, 스스로 항상된 리듬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 모든 것들과 소모적인 방식으로밖에 관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분명 의지박약이나 열정부족 같은 말은 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될 수 없다. 다만 문제는 내가 그런 말들을 들먹이는 ‘활동적인’ 인간들 못지않게 외부에 의존적이었으며, 내가 의무를 혐오하면서 모든 것을 의무로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항상성을 갖는다는 것, 자기 리듬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려 한다.

우선 어째서 나는 나의 리듬과 항상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권태에 지배당하고 모든 것들과 소모적으로 관계 맺는 것으로 드러나는 나의 삶의 태도는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떠한 인식의 전제와 더불어 구성되고 있었던 것일까?



권태는 자연스런 삶의 조건이다


자, 우선 권태에 대해서 질문해보자. 권태에 사로잡히는 동안 내가 떨쳐낼 수 없었던 생각은 바로 권태가 새로운 자극의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음식만 먹는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곧 질려버리고 말 것이다. 같은 책만 읽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책이더라도 곧 지겨워지고 말 것이다. 이런 견고한 전제 속에서 나는 매너리즘에 빠진 나의 상태를 나를 둘러싼 조건의 탓으로 돌렸다. 휴일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연구실 생활, 2~3년 동안 연속으로 읽고 있는 니체의 책들, 밥도 같이 먹고 세미나도 같이 하고 여행까지 같이 다니는 연구실 사람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다른 곳으로 가거나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다. 마치 컴퓨터를 리셋하듯 나를 둘러싼 조건을 확 바꾸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로 새로운 자극이 권태를 극복하도록 해줄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자본의 논리이기도 하다. 자본은 새로운 옷들로 옷장을 채워 넣으면, 새로운 가구들로 집을 꾸미면, 새로운 취미나 라이프스타일을 개발하면,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떠나면 당신의 권태를 날려버릴 수 있을 거라고 광고한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운 자극들을 무한히 제공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새로운 자극들로 가득한데 그러한 자극들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권태에 취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자극과 함께 권태도 새롭게 재생산되고 있는 것만 같다. 왜 우리는 ‘새로운 것’의 범람 속에서 권태와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가?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너무 니체만 읽은 게 문제다’라고 판단하여 새로운 세미나를 기획해보았지만, 그 ‘새로움’의 시효가 끝나는 순간 나는 다시 익숙한 권태에 빠져들었다. 권태의 발생과 해소를 대상과 그것이 주는 자극으로부터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으로 새로운 권태를 무마하는 소모적이고 의존적인 과정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외부로부터 권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권태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




“도대체 우리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 속에 있는 것보다 우리가 그것에 투입하는 것이 훨씬 많다! 아니면 우리의 체험 자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고까지 말해야 할까? 체험하는 것은 창작하는 것일까?”(니체, 《아침놀》, 책세상, 140쪽)


니체에 따르면 우리의 해석 이전에 사건(체험) 그 자체란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시 말해 우리 안에서 어떤 충동들이 강하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사건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다. 니체의 예를 빌리자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산 사건을 앞에 두고 “어떤 사람은 다투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조롱당할 만한 꼬투리를 주지는 않았나 하면서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본다. 어떤 사람은 ‘과연 우스운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세계의 유쾌함과 밝음을 증대시켰다는 것에 대해 기뻐한다.” 우리의 해석과 더불어서만 사건은 사건으로서 출현한다. 권태 또한 마찬가지다. 권태는 대상이나 사건 자체에 내재해 있지 않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은 나의 해석 속에서 지루한 것으로 출현한다. 그러니까 내가 외부적 조건을 탓할 때 간과하고 있던 것은 체험에 권태로움이라는 색채를 부여하는 중에 있는 나 자신의 해석이었다. “우리는 사물에 새로운 색을 부여하고, 또 그 위에 거듭 새로운 색을 칠하고 있다.”(《아침놀》, 139쪽)


그렇다면 이때 ‘해석’이란 어떠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모든 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해석일 따름이라는 소린가? 아니다. 사건과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출현시키는 우리의 해석의 배후에는 주관이나 의식이 아니라 쾌감을 얻고자 하는 충동, 스스로를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힘의 작용이 있다. 진드기의 예를 들어보자. 포유류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진드기는 교미가 끝나면 나뭇가지 위에 잠복해 포유류가 그 아래를 지나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마침내 먹잇감이 다가오면 그 위로 다이빙을 한다. 시각이 없는 진드기는 어떻게 자신의 먹잇감을 포착할까? 진드기는 예민한 후각으로 포유류의 피부에서 발산되는 뷰티르산이라는 물질의 냄새를 포착해 나뭇가지에서 몸을 던지고, 포유류의 체온인 37도를 정확히 감지하는 온도 감각을 통해 다이빙의 성공 여부를 감지한다. 그 다음에는 예민한 촉각을 사용해 가능한 털이 적은 장소를 찾아 주둥이를 꽂고 만찬을 즐긴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진드기의 충동 및 힘과 더불어 뷰티르산의 냄새와 섭씨 37도의 온도, 체모가 적은 피부 조직이라는 세 가지 신호로 구성된 세계가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232~236쪽 참조).


우리의 해석을 추동하는 것은 힘, 충동, 욕망이다. 그리고 쾌감을 생산해내는 특정한 충동과 힘, 욕망의 메커니즘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양식, 다시 말해 우리의 생존 조건이자 존재 방식이다. 진드기와 더불어 출현하는 세 가지 신호로 이루어진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외부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진드기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물론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 안의 어떤 개체도 ‘세계 자체’를 살아가지는 않는다. 각각의 독특한 존재 방식과 더불어 출현한 ‘해석된 세계’를 살아갈 뿐이다. 아니, ‘세계 자체’ 같은 것은 없다고 해도 좋다. 진드기와 인간 각각의 존재 방식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해석 이전에 ‘포유류’라는 대상 자체는 없다. 니체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폭로”(《즐거운 학문》, 157쪽)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물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그 사물의 본질이나 속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사물과 관계하는 방식, 다시 말해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을 증언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생존의-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에”(《즐거운 학문》, 305쪽) 그것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에게 해석이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지성의 해석”(《즐거운 학문》, 203쪽)이다.


권태의 문제로 다시 돌아 가보자. 사실, 자연 안에 ‘동일한 것’이란 없고 이 세계에 동일한 순간이란 없으며, 우리 자신 또한 “단 한 번,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에 존재”(《반시대적 고찰 Ⅱ》, 391쪽)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각각의 유일무이한 속성이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이하는 중에 있는 부단한 ‘흐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고, 같은 순간을 두 번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뻔하다고 느끼고 매번의 유일무이한 순간을 지루한 반복으로 감각하게 되는 것일까? 권태로움이라는 감각 또한 해석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어떤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유사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지배적인 경향은 인간의 생존 조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나 적대적인 동물과 관련하여 ‘동일한 것’을 충분히 제대로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 다시 말해 환원적 추론을 하는 데 너무 더디거나 너무 조심스러운 사람은 모든 유사한 것에서 즉시 동일성을 찾아내는 사람보다 생존의 가능성이 훨씬 적을 것이다.”(《즐거운 학문》, 188쪽)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 권태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모든 차이 나는 것들로부터 동일성과 반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이기도 하다. ‘권태로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모든 것은 카오스로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권태는 우리 삶의 필연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정리해보자. 권태란 무엇인가? 권태는 새로운 자극의 결여가 아니다. 권태는 우리의 존재 방식과 삶의 조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어떤 동일성과 반복, 질서를 구성해내는 것은 필수적이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권태와 지루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차이만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떠한 중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해체되어버릴 것이다. 새로운 자극만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상태는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리듬도 형태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외부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존재 방식을 조직해내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권태의 완전한 제거나 극복을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적 망상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권태로운가?’에서 ‘어떠한 조건 속에서 권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출현하는가?’, ‘어떻게 권태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과 공존할 것인가?’로.



소비자, ‘즐거움’을 결여한 인간


그렇다면 권태는 언제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출현하는가? 우리가 특정한 존재 방식만을 고수하려고 할 때 권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출현한다.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존재 방식,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사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만 관계할 때,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때, 늘 같은 충동들에만 먹이를 줄 때, 모든 낯선 마주침들을 이미 익숙해진 인식과 감각의 틀로 모두 환원할 때 세계는 뻔하디 뻔한 것으로 출현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질식시키는 권태감에 지배당하게 된다. 모든 것이 뻔하다는 느낌, 그러한 해석은 세계와 사물들의 무의미함이나 무상함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만 지키며 한 발도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익숙한 방식으로만 모든 것들과 관계하는 그 해석자의 존재 방식을 증언한다. 우리가 동일한 높이와 동일한 거리, 동일한 각도로 사물들을 조망할 때 아무리 다양한 사물들을 관찰하더라도 우리는 습관화된 인식과 감각의 패턴만을 되풀이하게 될 뿐인 것이다.


니체에게는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즐거운 학문》, 366쪽)이 인식하는 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걸을 줄 모르는 자, 좁은 서재의 구석 자리에 머물며 고정된 영토에 갇히고 동일한 신체 상태에 지배당하는 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을 재발견할 뿐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23쪽) 속에서 잡다한 앎들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속물교양인들도 경멸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대상들의 표상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할 뿐 그것과 더불어 스스로를 극복하고 변이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토를 절대화하여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자신의 무의식과 감수성을 안전하게 고수하면서 외부 대상들에 부여된 이미지를 취하거나. 두 태도는 모두 권태에 지배당한 상태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고수할 때 동일성과 반복은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우리는 수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탐닉하게 된다. 이것이 ‘소비자’의 역설이 아닐까?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는 “필요의 만족과도, 현실 원칙과도 관계없는 완전히 관념론적인 행위”(장 보드리야르, 《사물의 체계》, 282쪽)다. 소비는 대상을 낭비하고 향유함으로써 만족을 얻고 욕구의 해소에 이르는 식의 명료한 회로를 따르지 않는다. 소비란 이미지(기호)로서의 대상을 소비하는 것이며, 때문에 소비에는 충족과 해소가 있을 수 없다. 즉 소비란 어떠한 능동적인 역량의 발휘도 어떠한 힘의 변환과 존재의 변이도 수반하지 않는, 외부 대상로부터 비롯되는 관념적 자극만을 구하는 수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소비’에는 언제나 참을 수 없는 권태가 동반된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관점에서 권태란 욕구의 충족과 역량의 변이에 따라오게 마련인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자극을 결여하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비’를 개념화해 보자.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행위가 곧 소비인 것은 아니다. 소비는 사물들과 관계하는 특정한 메커니즘을 함축한다.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고수하면서 외부 대상이 제공하는 자극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수동적인 쾌감과 흥분을 구하는 모든 행위들을 우리는 소비라고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멍하니 새로운 자극을 찾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소비이며, 권태에 지배당해 무력하게 새로운 조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자신을 꿈꾸는 자는 소비자다. 이런 식의 소비에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즐거움이다. 소비자가 추구하는 것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흥분, 도취, 안락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끝도 없이 수동적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즐거움이며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능력인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정의하는 “소비인간은 그 어떠한 향유이든, 무언가를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116쪽) 있다. 그는 니체가 비판하는 노동의 인간, 즉 “언제나 무언가를 ‘놓치는 것’은 아닌가”(《즐거운 학문》, 298쪽)하는 불안에 시달리며 휴식을 부끄러워하고 한가함과 명상적 삶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들과 닮았다.


“사상가와 창조적인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권태는 순조로운 항해와 즐거운 바람에 선행하는 유쾌하지 못한 영혼의 ‘무풍 상태’이다. 그는 이것을 견뎌내면서 그 결과를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범속한 천성을 지닌 사람들이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수단을 다해 권태를 몰아내려 하는 것은 기쁨 없이 일하는 것만큼이나 천박한 짓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112쪽)


권태를 몰아내기 위해 아무런 자극에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니체는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는 자들,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소화시키는 자들을 경멸해마지 않는다(!)(《아침놀》, 189쪽). 니체에 따르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들, “즐거움 없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몰락하기를 바라는”(《즐거운 학문》, 112쪽) 극소수의 예술가와 사색가들은 권태를 기꺼이 감내한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이들이 자신의 즐거움을 권태에 대립되는 특정한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외부의 자극에 의존해 안락함이나 도취 상태를 재생산하는 것은 오히려 불행이며 즐거움의 결여일 것이다. 이들에게 즐거움이란 자신들의 기쁨과 슬픔, 쾌락과 권태, 행복과 불행, 순조로운 항해와 무풍 상태를 온전히 겪어내면서 그와 더불어 자신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해내는 일이다. 이들은 노동을 혐오하는데, 그것은 노동에 권태가 수반되기 때문이 아니라 강요된 노동 속에서 자신의 고유함과 능동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어진 동일성과 익숙함에 지배당하지 않고 낯선 사물들, 사건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자신들의 삶과 사유를 실험하는 가운데 자신의 고유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자신의 고유한 즐거움을 만들어낼 줄 아는 자, “보다 많은 위험에 부딪히고,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행복한 인간”(《즐거운 학문》, 261쪽)만이 권태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과 공존할 수 있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변이시키는 과정과 더불어 어떠한 ‘상태’에 갇히지 않는 고유한 즐거움을 만들어내기. 이것은 무한한 쾌락을 약속하는 소비의 논리로부터 도주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더 많이 취함으로써가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의존하는 소비적인 관계 맺음을 끊어냄으로써만 권태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권태가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출현하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에 의존함으로써 삶에 속하는 한 순간이자 상태로서의 권태를 회피하려 할 때이다.


이제 권태란 곧 새로운 자극의 결여에 다름 아니라는 나의 견고한 전제를 낯설게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반복을 혐오하며 다른 조건을 꿈꿀 때 내가 욕망한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권태를 회피기 위한 자극과 흥분, 마취, 안락함이었다. 권태에 지배당한 상태는 스스로를 고수하면서 외부적 자극에 나를 내맡긴 결과였다. 새로운 자극과 조건과 관계를 무력하게 꿈꾸던 나는 또 한 명의 소비자였던 것이다.



‘중단 없는 삶’을 실험하기


자, 이제 내 문제로 다시 돌아와 보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권태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어떤 전제가 나로 하여금 모든 것들과 소모적인 방식으로밖에는 관계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일까? 나는 이번 에세이를 쓰면서 쉬고 싶다는 나의 욕망에 깃든 이상주의를 대면하게 되었다.


얼마 전 나의 동거인 한역이 형이 공부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처음에 한역이 형은 ‘알바를 해보고 싶다’, ‘내 공부가 너무 관념적인 것 같다’라고 핑계를 대며 연구실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고 이를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한역이 형을 추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내가 또 추궁을 하자 한역이 형이 드디어 숨겨뒀던(사실은 모두가 눈치 채고 있었던?) 본심을 털어놓았다. ‘건화야, 나 이제 좀 쉬고 싶어!’ 나는 기다렸다는 듯 한역이 형에게 설교조의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작 6개월 공부해놓고 쉬고 싶다는 게 말이 되냐, 제 발로 찾아온 연구실인데 적어도 당장 해볼 수 있는 실험들은 좀 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 여기 있으면서 형이 주도적으로 한 일이라곤 커피 몇 잔 타고 영화 몇 편 튼 게 전부다…….


그런데, 한역이 형에겐 참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그때 내가 퍼부었던 설교는 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 사실 올해 들어서부터 나 또한 한역이 형 못지않게 쉬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품어 왔기 때문이다. 비겁하게, 나는 ‘6~7개월 만에’ 지쳐버린 한역이 형을 비난하는 것으로 ‘3~4년 만에’ 지쳐버린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나의 쉬고 싶은 마음이 꽤나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주 7일씩 3년 넘게 같은 공간에 나와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고 연달아 두세 번째 니체를 읽고 있으니, 내가 공부와 연구실 생활에 지쳐서 좀 쉬고 싶어졌다고 한들 누가 나를 욕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실 ‘쉬고 싶다’라는 현재의 욕망이 있을 뿐이며 그 앞의 기간의 길고 짧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그런 논리라면 공부를 더 많이 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 자신에게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다). 아니, 굳이 내 정당화의 논리를 반박하지 않더라도, 내가 정당화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점 자체에 미심쩍은 데가 있다.


‘쉰다’는 건 뭘까? 나는 그것을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 꽤 오랫동안 실제로 그렇게 주저앉아 버리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대하기도 했다.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꾸역꾸역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후기와 과제를 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역시 다시 안락한 마취상태에 빠졌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지쳐서 힘이 빠진 것이다, 정신 차리면 다시 잘 할 수 있다, 단지 조금 쉬고 싶을 뿐이다, 잠깐 멈췄다가 나중에 멈춘 만큼을 다시 만회하면 된다. 그리고 멋진 산을 오르려다 엄두가 나질 않아서 등산로 초입에서 주저앉아 쉬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했다. 언제든 정신만 차리면 멈춘 곳에서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정당화와, 나는 절대 그 산을 오르지 못할 인간이라는 자기비하는 여기에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이러한 의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멈춰버리는 것으로서의 휴식이란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이다. 만약 산 정상에 오른다는 목적이 없다면, 등산로 초입에서 쉬고 있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정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자는 그 순간에도 무언가를 관찰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드러누워 낮잠을 자거나, 계속해서 무언가를 할 것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도달해야 할 것으로서의 목적과의 관계 속에서만 휴식과 정지는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상태로서 규정될 수 있다. 나는 목적론자였던 것인가?


사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 내가 지쳤다고 느낀 순간에도 마찬가지이고, 주저앉아 있다고 느낀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때도 나는 매일 연구실에 나왔고(매일은 아닐 수도 있다), 씻고, 요리하고, 먹고, 싸고, 청소하고, 읽고, 듣고, 말하고, 쓰고 있었다. 쉴 때조차도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없는 셈 쳤던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나로부터 분리시키고 하찮은 것으로 평가 절하함으로써 의무의 수행이나 똑같은 일들의 무의미한 반복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을 특별한 어떤 것으로 표상화하는 사고방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렇게 ‘행함’을 특권화하는 순간에 나는 지금 나 자신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놓쳤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들은 숭고하고 황홀한 순간을 맛보는 대가로, 그리고 그들의 신경을 소모적으로 낭비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비참하고 무력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아침놀》, 63쪽) 도취된 상태에 비추어보았을 때 나머지 일상적인 순간들은 너무나 권태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쉽게 지쳐버리는 나 자신의 취약함과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는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심판하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나는 어떤 온전히 열중한 상태나 완전한 몰입의 상태, ‘의지’를 남김없이 실현하는 상태를 전제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어떤 상태나 순간을 특권화하여 다른 모든 순간들을 평가절하하는. 그리고 이러한 이상주의에는 ‘열정’에 대한 은밀한 동경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내겐 열정 같은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둘수록 주어진 가치와 강요된 삶의 방식에 복종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열정을 다 바쳐 미디어에 자신을 파는 아이돌들이나 열정을 끌어 모아 스펙을 쌓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데 사실 나는 열정에 부여된 의미와 가치들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체념했을 뿐이었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지칠 수도 있고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지쳐서 속도를 늦추는 와중에 조금씩 이러저러한 시도를 하면서 그 자연스러운 국면을 온전히 겪고 다른 국면으로 이행해 가려 하기보다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그저 방치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는 나의 역량과 의지를 막힘없이 발휘하는 쾌적한 상태에 대한 환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쾌적한 상태에 나를 동일시하고 그렇지 못한 다른 상태들을 나의 외부에 위치시킴으로써 부정하고 회피하려 했다. 그리고 비참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내가 믿고 있던 외부적 조건들과 나의 기질을 유죄판결했다. 동시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락한 마취상태에 나를 내맡겼다. 그러니까 사실 ‘지쳤다’라는 것은 내 상태에 대한 정당화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마련인 삶의 여러 국면 속에서도 스스로를 놓아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속해나갈 수 있는 기술과 지혜가 내게 없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과 지혜의 부재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삶의 모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어내지 않으려는, 쾌적하고 안락한 상태만을 지속하려는 탐욕에 다름 아니다.


모든 것들과 소모적인 방식으로만 관계하는, 권태에 지배당한 나의 상태에는 특정한 상태를 특권화하고 그에 비추어 그에 반(反)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다른 모든 상태와 순간들을 평가절하하는 인식의 전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새로운 국면, 내게 낯설고 이질적인 순간을 맞이하여 그것을 내 존재 방식을 실험하고 나의 고유한 스타일을 펼쳐낼 기회로 삼지 않고 내게 가장 익숙한 영토로, 권태와 냉소와 자기비하를 수반한 안락한 마비상태로 도피했던 것이다. 나 자신을 놓아버리는 방식으로.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삶이니 도피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모든 것들이 내 뜻대로 되는 쾌적한 상태를 이상화하거나 수동적 쾌락이 주는 안락함에 의존함으로써 내가 권태롭다거나 무의미하다고 해석한 것들을 직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더욱 강하게 권태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고수함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하려 했으나 사실 그것은 나를 해치는 일이었다.


그동안 니체를 읽고 글을 쓰면서 ‘실험’이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그 단어에 모호한 환상들을 덧입히기도 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실험은 쾌적한 상태를 꿈꾸는 나의 탐욕과 싸우는 것, 삶의 모든 국면에서 스스로를 놓아버리지 않고 중단함 없이 힘을 발휘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단기적 습관―모든 순간을 배움의 과정으로 삼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나는 어떻게 나의 이상주의적 탐욕과 싸우며 중단 없는 삶을 실험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의 항상적인 리듬을 만들 수 있을까? 권태를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기적 습관’에 대한 니체의 사유로부터 이 질문들에 대한 힌트를 찾는 것으로 에세이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는 단기적 습관들을 사랑하며, 이것들이 수많은 사물과 상태를 그 달콤함과 쓰라림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알게 만들어주는 더없이 귀중한 수단이라고 여기고 있다. 육체적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물론이고, 내가 볼 수 있는 한 하찮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의 타고난 본성은 전적으로 단기적 습관에 맞춰져 있다. 나는 이것이 내게 지속적으로 만족을 줄 것이라고 항상 믿고 있다.―단기적 습관도 저 정열적인 믿음, 즉 영원성에의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272쪽)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습관―익숙해진 사고와 감각의 패턴, 사물을 바라보는 고착화된 시선 등―에 규정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 니체의 답은, 매순간 습관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있으라는 것이다. 습관은 우리의 삶의 조건이다. 습관 없이는 어떤 능동성도 발휘할 수 없다. 습관이 없다면 모든 것은 그저 무의미한 순간의 파편들로 흩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습관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즉흥적인 삶을 무력하게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동화시키면서 계속해서 단기적 습관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지속적 습관과 단기적 습관을 가르는 것은 시간의 길고 짧음이 아니다. 지속적 습관이란 특정한 상태만을 고수하는 것으로서의 습관이며, 이와 반대로 단기적 습관은 낯선 마주침들과 더불어 구성되는 중에 있는 것으로서의 습관이다. 그래서 지속적 습관이 사물들과 상태들의 한 측면과만 관계하도록 하고, 즉흥적인 삶의 태도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만을 쫓도록 한다면, 단기적 습관은 수많은 사물과 상태를 그 달콤함과 쓰라림의 밑바닥까지 알게 해준다.


단기적 습관을 구성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매순간을 배움과 훈련의 과정으로 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순간들이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내가 만들어낸 나 자신의 이미지에 비추어 그 순간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안락함만을 고집하려 하지 않는 한 어떤 순간도 그 자체로 하찮거나 사소하지 않다(그 자체로 특별하거나 중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순간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그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변형시켜 나의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관점의 변이를 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매일 ‘다르게 반복되는’ 연구실 생활, 글이 안 써지는 것, 또 다시 게으름에 빠진 나의 상태 …… 이 모든 순간들은 모두 나의 익숙한 관점을 변이시킬 수 있는 사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배움을 구한다는 것은 주어진 것을 무엇 하나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으로써 배움을 지속하기. 이것이 어디에도 의존함 없이 자신의 리듬과 항상성을 만들어내는 길이다.



나는 주어진 규칙과 규범과 의무와 당위에 규정당하는 삶, 동일한 것만을 반복하는 권태로운 삶을 혐오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런 삶을 살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즉흥적인 삶, 자유로운 삶, 어떤 강제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쾌적한 삶을 이상화하는 것으로 나의 영토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상을 만들어냄으로써 내가 권태롭다고 생각한 모든 순간들을 외면하려고 할 때 나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권태에 붙들리게 될 뿐이었다. 이제는 나의 권태에 직면하려 한다. 회피함 없이 내가 무의미하고 권태롭다고 생각한 일상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겪어내는 것, 삶의 모든 순간들을 부단히 다지고 쪼고 거기에 양식(樣式)을 부여하기를 거듭 시도하는 것, 이것이 내가 실험해야 할 ‘위험한 삶’이다.

전체 6

  • 2019-12-02 09:20
    권태기에 있는 이 나이에 권태가 또 하나의 생존의 조건이라는 해석이 왜케 힘이돼죠^^ 오랜만에 건화샘의 니체, 불교수업 가는 길에 읽으니 더 좋네요! 아 니체 새록새록 합니다~

  • 2019-12-02 11:16
    처음에 제기된 '약속'을 해석할 수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강압적 명령이 아니라 단기적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신호로 약속을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사견 ㅎㅎ.
    권태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면 존재의 지속도 불가능해지는 것이군요.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완전 색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건 니체의 독특한 맛인 것 같습니다. 그걸 발견하는 것도 니체를 잘 읽었기 때문이겠죠?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19-12-02 19:28
    권태로움에 한 방 먹인 청년의 역습, 니체와 또 이렇게 만날 수 있군요! 배짱이가 부릅니다. '규문의 아이돌은 나야나!'

  • 2019-12-02 22:21
    긴데, 재밌네. 드뎌 건화쪼에서 빠져나왔네. 츄카츄가. 즐거움 없는 인간으로 소비자를 가져온 부분이 좋았슈.

  • 2019-12-04 12:43
    '삶이 뭐 그렇지' 와 '다 안다'라는 오만함 속에서 '쉬기'를 택한 자가 고민했던 내용들을 풀어주셔서 잘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

  • 2019-12-17 12:46
    건화샘의 권태 시즌2 역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