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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를 보라] 허영자의 지속가능한 공부 (절차탁마NY/성민호)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9-12-01 19:47
조회
594

허영자의 지속가능한 공부


성민호       


공부의 발목을 잡는 허영심


왜 나는 일 년 전에 했던 고민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걸까? 작년 이맘때쯤 내 머릿속에 꽉 차 있던 고민은 ‘과연 내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을까?’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연구실 공부를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름의 고심 끝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나는 이 결정에 후회가 없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좋다. 그런데 이러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일 년 전의 그 고민,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반복하게 된다. 다만 그때는 대학이나 취직과 같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공부를 하는 나의 상태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나는 공부가 힘에 부친다. 늘 시간이 부족하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약속된 시간까지 써야할 글을 못 쓰고 있을 때면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시간이 늦어 자리에 누워도 심장이 뛰고 얼굴에 열이 뻗쳐서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럴 때면 머릿속은 온갖 걱정으로 들끓고 허탈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절대적 시간이 모자라서 내가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시간이 있을 때에도 나는 매번 이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해왔다. 이번 학기 내내 공통과제를 제 시간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다가 마무리를 제대로 못 지은 채 올리고 나면 머릿속에서는 미련과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었다.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쩔쩔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체 나는 공부를 하면서 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있는 걸까? 공부는 누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 시험처럼 석차가 매겨지는 것도 아니고 글을 잘 못 쓴다고 체벌이나 벌금이 부과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것은 내가 마음먹고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물론 연구실에서 다루는 텍스트가 쉬운 것도 아니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없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 시간 내에 이해한 만큼을 쓰면 되는 일이다. 더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은 질문으로 남겨두고 다음 할 공부를 이어가면 되는 일이다. 기한 내에 할 수 있는 만큼을 충실히 하는 것은 더욱이 나 같은 초심자에게는 꼭 필요한 훈련이다. 그런데 이것을 못한다는 것은 자기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실력 만큼 쓰기’를 못한다는 것은 실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나의 고질적인 심리 패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오랜 습관, 허영심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영심은 글자 그대로 ‘비어 있는데(虛) 빛나 보이고자(榮)하는 마음’이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373절) 한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칭찬과 비난에 대한 극도의 관심. 이 같은 허영심은 나에게 성실함으로 드러났다. 성실함은 나의 오랜 자랑이었다. 주어진 일을 최대한 ‘잘’ 해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나에게 본성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교회나 학교, 군대, 심지어 알바 자리에서도 언제나 원하던 좋은 평가를 얻고 만족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허영심은 내가 무언가를 의욕하고 행동하는 데 주된 동력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허영심은 나의 발목을 잡았다.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 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545절)


공부는 ‘탁월한 느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공부는 오직 자신의 생각 하나를 넘어가는 문제이고, 가지고 있었던 전제나 놓지 못하고 있는 집착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비교 대상도 척도도 없다. 있다면 이전의 자신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공부는 스스로 탁월해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하면서 탁월해지기를 원하기보다는 탁월함의 느낌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번 내가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이렇게 써도 되는지, 더 멋진 말을 써야 하지 않을지 끊임없이 검열하고, 재고, 노심초사하면서 있지도 않은 평가를 스스로 만들어 내며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있는 것보다 더 있어 보이려하는 열망’이 작동하고 있었다. 좋은 평가에 대한 집착과 나쁜 평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분주한 움직임들. 니체는 이를 ‘자기기만과 자기 계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남들의 시선 속에서 추출한 평가들을 모아 ‘나’라는 상(象)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이런 저런 평가에 울고 웃고 있었다. 나의 공부 패턴을 돌아보면 나는 칭찬을 받으면 더욱 들떠서 과도하게 하고, 지적을 받으면 축 쳐져 버리곤 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허영심을 가득 안은 채 마치 꼭두각시처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칭찬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그래서 꼭 이 허영의 메커니즘을 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영심은 무엇이며 어떤 삶의 태도의 반영일까? 있는 것보다 더 있어 보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은 어떤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을까? 나아가 지금 나는 배우는 자로서 어떻게 자기 공부의 리듬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이번 에세이에서는 허영심이라는 나의 장기적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뒷문을 발견해보고 싶다.


허영심의 자기부정 회로


니체는 허영심을 뭐라고 보고 있을까? 허영심이라는 말은 니체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어떤 단어나 마찬가지로 니체에게 허영심도 하나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허영심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허영심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며 상당히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한 단편에서 니체는 허영심을 ‘영혼의 피부’에 비유한다. 피부가 뼈, 살, 내장과 혈관을 덮어 인간의 모습을 참고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듯이, 허영심 또한 영혼의 활동과 정열을 덮어 인간의 영혼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82절). 우리 머릿속의 괴상한 공상이나 부글거리는 감정과 같은 ‘날것의 정신’이 전부 다 드러나 자신이나 남들의 눈에 보이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관습이나 인륜, 의례가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허영심 역시 우리의 정신의 초라함과 난폭함을 가리기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사회생활’이라고 불리는 교양이나 매너, 가식이나 겉치레 같은 허영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허영심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같은 책, 79절)


그런데 니체가 허영심을 경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허영심이 필연적으로 기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속이며 살아간다. 표정, 눈빛, 말투 등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영심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을 속인다는 점이다. 자신이 비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 우리는 상품을 진열해놓은 가게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귀속시키는 외관상의 특징들을 끊임없이 정돈하거나 숨기거나 드러낸다.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 (『아침놀』, 383절)


허영심이 강하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 즉 외부의 시선에 더욱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을 ‘상품들의 진열대’로 만들어 놓고 타인들의 시선에 따라 끊임없이 편집한다. 그가 더 많은 손님을 상대하고 고려할수록 그는 더욱 부지런히 일한다. 그는 상품들과 가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상품(특성)을 자신도 선호하고 싫어하는 상품을 자신도 싫어하게 된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게 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89절) 그는 히트상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작 자신은 어떤 상품을 좋아했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따름이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살고”있다(『아침놀』, 105절). 즉 외부의 평가를 의식하고 갈망하고 그것에 민감하게 될수록 정작 자신의 취향과 개성은 점점 빈곤해진다.



최근 나는 나에게 아무런 취미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조금이라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따로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여름에 잠깐 일주일 정도 연구실을 쉬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집에 앉아 있었다. 당장 뭘 하고 싶은지, 평소 내가 뭘 즐거워했는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와 비슷한 상태를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이나 대학교 방학 기간, 입대 전의 공백 기간 등 바쁘게 치러오던 평가의 굴레가 멈췄을 때, 나는 멍하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몰려오는 것은 무기력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토익시험이나 한국어능력시험과 같은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이같이 평가가 멈추는 동시에 의욕도 멈춰버리는 현상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가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끊임없이 ‘인정받을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일들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렇게 나의 성실함은 평가 바깥에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조금도 작동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평가 외 영역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지극한 불성실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성실은 역설적이게도 표면적 성실함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이를 활동적인 인간의 태만함을 들어 설명한다.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283절)


활동적인 인간은 위에서 나온 ‘상품들의 진열대’의 주인과 닮았다. 둘은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어디까지나 ‘유적 존재’로서만 그러할 뿐이다. 마치 성실하게 시험을 준비하고 알바를 했던 내가 정작 좋아하는 소설책 한 권, 영화 한 편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일무이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활동적이지도 않고 태만하다. 니체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은 노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283절) 가장 분주하고 가장 성실히 일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존재. 설령 그것을 즐거워한다 하더라도 그는 노예다.


허영심은 평가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불성실과 가치절하를 낳는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에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은 시도될 수 없다. 가령, 니체가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이라고 표현했던, “2페이지를 넘지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하기”나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매일 쓰기”와 같은 일은 그에게 불가능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매일같이 하는 것이 그에게 조금도 충만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에 주목할 뿐, “지엽적인 것을 잘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같은 책, 89절). 허영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문득문득 일어나는 미세한 충동이나 찰나의 회의 같은 것은 손쉽게 무시된다. 언제나 더 중요한 할 일, 그 자신을 드러내 줄 수 있는 일이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것은 허영심이 가진 자기 부정의 성격이다. 허영심 많은 사람은 평가되는 자신 외에 다른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는 좋은 평가를 기준으로 자신의 일상 속 행동들의 위계를 설정한다. 그러한 위계 속에서 그는 평가되지 않는 행위나 욕망을 방치하며 심한 경우 그것들을 미워하고 저주한다. 니체는 이 같은 경향을 종교와 금욕 수행자들에게서 발견한다. 그들은 완벽한 존재인 “신과 자신을 비교”(같은 책, 132절)하거나, 자신을 학대하면서 “자신의 일부를 신으로 숭배하고, 나머지 부분은 악마로 여긴다.” 니체는 이 같은 자기 비하와 자기 파괴를 “허영심의 극히 높은 차원”(같은 책, 138절)이라고 말한다.


 행위의 무구함과 칭찬과 비난의 무의미성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546절)


니체에 따르면, 칭찬과 비난과 같은 평가에 민감하다는 것은 신체의 병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느끼는 병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외부의 평가를 자신으로 여겨 현재의 공허함을 메우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의 칭찬과 비난에 대한 민감한 기질 역시 생리적·심리적 병증의 반영일 것이다. 최근 나는 신장(腎臟)이 선천적으로 허약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신장이 허하면 무서움을 잘 타고 가슴속에 뭔가 매달려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평가에 대한 취약함도 신장 때문일까? 물론 관련이 있을 테지만 신장 탓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신체 조건이 나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게 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의 사고를 낳게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꽤 예리하게 발달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혼날 짓과 칭찬받을 짓을 재빨리 캐치해 내는 일이었다. 아마도 교회 공동체에서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습득된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나에게 칭찬이나 비난은 정말 크게 들렸다. 그것은 나에 대한 판결과 같은 것이었고, 엄청난 권위가 있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혼내는 것보다 더 크게 혼났다. 혼나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가책을 더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지런히 내가 했던 행동들에 반응을 살폈고 그것들에 책임감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를 덧붙였다. 평가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행위에 대한 불만. 한 마디로 ‘눈칫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이러한 기질은 언제나 하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했어야 하고, 할 수 있었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것은 곧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다.


자유의지란,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서 어떤 행동을 자의적으로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99절). 이때의 ‘자유’는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원자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무제약적이며 관련 없는 것”(같은 책, 18절)으로서의 독자적인 의지가 자신을 포함한 개개인에게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이같이 의지에 대한 자유가 전제될 때, 일어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하다. 니체는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같은 책, 39절). 다시 말해 무언가를 하거나 안 할 수 있는 의지를 상정하는 것은 곧 그 의지의 주체에 대해 책임을 묻고 도덕적으로 판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연 재해나 동물들에 대해 책임을 지우거나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들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의 필연성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 특히 자기 자신의 행위와 감정에 대해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도덕적 심판을 가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들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되며 서로 맞물려서 운동한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며, 모든 운동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다.”(같은 책, 106절) 특히 어떤 인물의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침착하게 몇 개의 인과와 전후 맥락만을 고려해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악당이나 범죄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볼 때 그들의 폭력적 행동의 이면에 있는 단지 몇 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표면상의 도덕적 판단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뇌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화학적 과정과 원소들의 싸움”(같은 책, 107절) 혹은 몸의 안팎을 통과하는 정밀한 기(氣)의 흐름까지 전부 따져 계산해 볼 수 있다면 세계에 설명 불가능한 행위나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건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니체의 표현대로, “행위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착각하는 것, 즉 자유의지를 가정하는 것도 바로 이 계산되어야 할 메커니즘 속에 포함되어” 있다(같은 책, 106절). 다시 말해 우리가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믿는 것 역시 필연성 속에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어떤 행위를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우리의 모든 판단과 인식의 기초가 되는 감각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은 세계의 모든 운동을 지각할 수 없다. 오히려 아주 일부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는 우리의 감각을 감옥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감각의 “지평에 따라서 세계를 측정하면서, 이것은 가깝고 저것은 멀고,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고, 이것은 딱딱하고 저것은 부드럽다고” 판단하며 살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아침놀』, 117절). 이 같은 감각의 제한성, 즉 인식의 불가피한 오류는 우리가 개체로 존재하는 한 수반하게 되는 존재조건이다.


이러한 인식의 제한성이 인간에게 늘 장애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생명을 보존케 하는 오류”로서 유기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즐거운 학문』, 110절). 지구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최초의 생명체는 수많은 무기물이 뒤섞인 ‘원시수프’ 내에서 필요한 물질을 합성함으로써 탄생했다. 광범위한 물질과 정보의 풀(pool) 속에서 유기체가 체득한 것은 ‘닮은 그림 찾기’ 본능이었다. 그 본능은 실제의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고 유사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처리함으로서 발전되어갔다. 이런 경향은 이전에 해가 되었던 것과 닮은 것이 이번에도 해가 될 것이고 득이 되었던 것과 닮은 것이 득이 될 거라는 “환원적 추론”(같은 책, 111절)을 낳았다. 이처럼 단순한 인과의 설정은 오류 추리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감각은 시간에 따라 점점 발달되고 정밀해져 온 것이 아니다. 세상의 차이를 현 인류보다 더 정확하게 관찰하는 종들이 존재했었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실제 더 많은 것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관찰하고 기억하는 용량 및 성능을 가진 뇌는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네안데르탈레인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정확하지 않은 감각능력 때문에 인류는 위험과 배고픔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감각에서의 이러한 오류의 역사는 일어난 일의 이익 또는 손해의 결과에 따라 그것을 선 또는 악으로 여기는 추리 본능과도 연결된다. 또 사건에 대해 목적과 의도를 부여하는 습성과도 연결된다. 니체는 이러한 본능이 하등 유기체의 시기부터 지금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유전되어왔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세계를 오류와 허위로, 우리의 존경의 소망과 의지에 따라, 즉 필요에 따라 해석해” 온 것이다(같은 책, 346절).


우리는 유한한 개체인 한 근본적으로 세계의 운동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과성에 대한 사상”(『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8절)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인과관계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의 조건 속에서 목적이나 의지를 상상해 세계를 구성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것이다.”(『아침놀』, 119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필연적이지만 우리의 개체적 감각만으로는 그 필연성을 지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행위의 무책임성을 이해할 수 없는 걸까? 결코 행위를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니체는 감각 기관이 만들어내는 인식의 활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그물 안에 갇혀 있다. 우리들 거미는 이 그물 안에서 무엇을 붙잡든 바로 우리의 인식이 그물 안에 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같은 책, 117절) 그런데 최소한 자신이 그물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그물에 걸리는 것만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그물을 통과하는 것들이 있으며, 사실 걸리는 것 빼고 모든 것이 통과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 감각 조건의 한계를 이해함으로부터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인식에 대한 믿음에 갇히지는 않을 수 있게 된다. 과학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도구다. “과학은 우리가 바보처럼 외관만 보고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건에서 [복잡한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 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6절) 어떤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분노나 눈물도 의사의 눈에는 그 메커니즘이 훤히 보일 수 있다. 심리학자나 명리학자에게 보이는 것은 또 다를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해석을 통해 사건에 더 복잡한 원인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많은 수의 관점들을 경험해 더 정확한 사실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종류의 색안경을 써 보더라도 여전히 “실재”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따지고 있다면 한 개의 안경을 가진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관점이 되었건 개체 차원에서 구성한 것이며, 잘 해봐야 인간 차원에서 구성한 세계-해석이 아닌가? “거기에서 환상과 인간적인 첨가물을 제외”해보면 무엇이 남을까?(『즐거운 학문』, 57절) 중요한 것은 세계의 “실재”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의 그물망이 세계를 특정한 색채와 모양으로 출현시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관점에 가만히 머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자기의 관점과 세계가 너무나 협소했음을 발견하는 ‘자기 인식’은 언제나 새로운 사물과 사람, 생각들과 관계 맺기를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사물들과의 기존의 관계를 떠나고 있을 때, 그럼으로써 다른 느낌을 구성하고 있을 때, 우리는 유한한 조건 속에서 인식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엮어낸 그물이 행위를 둘러싼 세계의 단면만을 비출 뿐임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니체가 말하는 인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필연적인 것이 우리 개체의 차원에서는 우연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에 대한 겸허한 이해. 이것은 행위의 인과관계를 모조리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조건 속에서 그 행위를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되는 이행의 과정이다. 즉 “방랑자가 어느 도시의 탑들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나는 것과 같은 방식의 일”(같은 책, 380절)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의 관점은 개체를 향해 닫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향해 열리게 된다. 그로부터 어떤 행위도 단일한 개인에 귀속될 수 없으며,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의지의 산물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인식이 거기까지 이를 때, 어떤 행위도 자연처럼 무구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은 필연이다─라고 새로운 인식은 말한다 : 그리고 이 인식 자체도 필연이다. 모든 것은 죄가 없으며, 인식이란 무죄를 향한 통찰에 이르는 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7절)


“인식하는 자가 삼켜야만 하는 가장 쓴 물약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본질에 대하여 완전히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 그는 더 이상 칭찬해서도 비난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과 필연성을 칭찬하고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7절)


니체는 칭찬이나 비난, 처벌과 보상과 같은 평가 기제가 단지 “격려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수단이다. 칭찬과 비난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많은 동기들 중 하나가 될 뿐이지 일어난 일에 대해 꼬리표처럼 붙어서 행위 자체에 자격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칭찬과 보상, 비난과 처벌은 일어난 행위나 그 행위를 한 사람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행한 것 외에 달리 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105절). 그는 행위에 따라붙는 그러한 평가를 받을 자격도 책임도 갖지 못한다. 이미 그는 행위 자체로 목표점에 있는 사람이지 행위를 이리저리 조절하고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자신의 행위가 독립적 의지가 아니라 자연 모든 것의 운동 속에서, 즉 필연성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의 해온 어떤 일에 대해서,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며 결과가 어떤 것이든 간에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36절)고 말할 것이다.



주인으로서 배운다는 것


모든 나타난 일이 전적으로 무책임하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마구 행동해도 된다는 걸까? 이 질문이 틀렸다는 사실은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에서 간단하게 확인된다. 어떤 행위도 임의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행위의 무책임성’은 결코 막살라는 의미가 아니며, 그 개념 자체가 ‘막’사는 것의 ‘막’이 불가능함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느끼고, 판단하고, 몸을 움직이는 일련의 행위는 수없이 많은 인과관계가 작동한 결과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위의 동기를 생각하는 방식은 이 복잡한 과정을 고려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 뒤에는 그 행위를 하게 한 하나의 동기가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행위에 하나의 동기가 짝지어져 있고, 여러 ‘동기들 간의 투쟁’에서 승리한 동기가 그에 해당하는 행위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믿음은 완전히 오류라고 말한다. ‘동기들 간의 투쟁’은 행위 이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하나의 행위에는 온갖 종류의 동기들,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고,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만 알고 있는 동기들, 그리고 이전에 단 한 번도 서로 비교될 수 없었던 동기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아침놀』, 129절). 우리는 그것들의 무게를 일일이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들을 표현할 언어도 없다. 그저 사후에 의식되는 하나의 동기를 겨우 채택할 뿐이다. 이때의 동기를 다른 말로 하면 충동이자 힘이다.


어떠한 행위도 그것을 둘러싼 힘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외부의 힘이기도 하고 우리 내부의 힘들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기후, 습도, 온도, 식사량, 수면량, 노동량 등의 물리적·생리적 차원의 힘들뿐 아니라 법, 도덕관념, 과거의 경험, 주변 사람의 영향력, 사회적 유행 등의 심리적·관념적 차원의 힘들이 맞물린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는 힘들의 배치. 그것이 우리의 행위를 추동하고 욕망을 발생시키고 있다. 내가 나라는 꼬라지를 하고 존재하게 하는 것은 넓게는 ‘21세기 한국의 20대 남자’라는 시대적이고 계층적인 차원에서부터 특정한 경험 조건과 특정한 행동반경이라는 개체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힘들의 배치다. 그 배치 속에서 우리 내부의 힘들, 즉 복수적인 충동들 중 일부가 특정한 방식으로 커지거나 작아진다. 가령, 내가 대학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로 한 결정 속에도 미묘한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수많은 충동들의 경합이 있었고 어떤 충동을 활성화하는 배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평가를 의식하며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공부하게 하는 충동 역시 특정한 배치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같은 배치를 바꿔봄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추동하는 힘들이 다르게 활성화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같이 배치를 변화시키는 시도가 자신에게 “양식(style)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힘들이 발휘되도록 생활 리듬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을 방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강제력은 “고유한 법칙 하에서 행해”지는 자기 자신의 통제이다. 양식을 부여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의 본성이 지닌 힘과 약점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조망”하고 철저히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즐거운 학문』, 290절). 이 분석은 자신의 약점이 다른 뉘앙스를 갖고 활용될 수 있도록 그것을 다듬고 재해석해 그것의 성격 자체를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마치 정원을 꾸미는 정원사가 수풀 구석구석 어디를 자를지, 어디를 내버려 둘지 결정하며 스타일을 완성해 가듯이(『아침놀』, 560절), 양식을 만드는 자 역시 자신이 어떤 부분을 정복하고 복종시켜야 할지 알고 있으며, 자신의 천성 전체에 지배력을 가한다.


니체가 평생 자기 자신에게 부여해온 양식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고기와 계란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식사”와 “며칠 동안의 조용한 산책, 적은 말수, 드물지만 신중한 독서, 혼자 거주함, 청결하고 질박하며 거의 군인 같은 생활 습관”(『아침놀』, 553절)이었다. 허름한 여인숙에 머물며 때가 되면 산책을 하고 매일매일 글을 쓰는 단조로운 일상. 그것은 누구도 강제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평가되지 않는 자기 철학을 위한 삶의 스타일이다. 이러한 양식을 유지함으로써 그는 그 어떤 명예나 가난, 심지어는 질병에게까지도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평생 니체를 괴롭힌 병은 니체 자신에게 원한의 대상도 약점도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장기적 습관을 깨주는 뒷문이자 철학의 동기이자 감사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스스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니체는 홀로 조용히 독서하고 산책하는 것으로 가능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지금 나의 위치인 배우는 자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활동에 묵묵히 고독하고 결연하게 만족하는 불굴의 인간.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것을 모든 사물에서 찾으려는 내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 (···) 자기 방식의 축제일과 근무일과 애도일을 지니고 있고, 명령하는 일에 익숙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복종할 준비도 되어 있으며, 이런저런 일에 한결같이 긍지를 지니고 자신의 일에 복무하는 인간. 보다 많은 위험에 부딪히고,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행복한 인간!”(『즐거운 학문』, 283절)


‘준비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단편에서 니체는 주인으로 사는 사람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에게는 어떤 사물도 사유의 대상이다. 그가 일상에서 만나는 텍스트, 사람, 사건은 그에게 언제나 스스로를 극복할 기회가 된다. 그는 무엇을 애도하고 기념할지 그리고 무엇에 봉사하고 무엇에 복종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 무엇이 스스로를 강하게 할지 철저하게 계산하고 시도하는 그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극도의 성실함이다. 그는 자신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만 그것을 자기를 더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가 더 커지는 방식으로 행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그가 복종할 무언가, 어떤 스승(그것이 텍스트건 사람이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스승 역시 자기 자신의 수련을 위한 한 과정이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배움과 닮았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지도해줄 스승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지도를 받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자기가 자신을 온전히 지배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철학교사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되기 위한 것”이다(미셀 푸코,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52쪽). 따라서 그들은 배우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수련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521절)


나는 지금까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해 왔을까? 나는 늘 내가 선택해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연구실에서 참여하는 세미나와 읽는 텍스트들, 그리고 쓰는 글들을 ‘내 공부’로 삼고 있었을까? 나는 그 같은 ‘지류’들을 나 자신의 방향성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혹시 방향도 비전도 없이 끌고 가다가 막히거나 물이 넘쳐버린 것은 아닐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배우는 것들에서 재밌는 것들을 발견하고 좋아했지만 그 배움들을 나의 전체 공부 계획 속 어느 파트에 넣어두고 어떻게 살을 붙여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내 노트북의 폴더를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급급히 작성한 공통과제들이 제목도, 주제도, 중심 개념도 없이 그저 날짜순으로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하고 치워버릴 일처리의, 그것도 아주 비효율적인 일처리의 흔적에 가까웠다. 나는 어떤 프로젝트나 과제가 주어지면 늘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물론 일정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과제를 공부거리가 아니라 업무로 받아들이는 부담감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주인이 아니라 직원으로서 공부를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처리할 것들이 밀려오면 허덕허덕 스스로를 소진시켜가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성과를 내야 하니까. 그리고 역시 시선이 중요하니까.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공부와 일, 식사, 만나는 사람, 가는 장소 등에서 멍하니 하라는 일만 수행하는 것, 삶의 의무수행자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쩔쩔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 자기 자신의 성장,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최우선이 되는 생활일 것이다. ‘이런저런 일에 한결같이 긍지를 지니고 자신의 일에 복무하는 인간’은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는다. 그는 그가 겪는 ‘이런저런 일’을 스스로의 수련의 일환인 ‘자신의 일’로 삼고 그것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그의 긍지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누구도 자기 자신보다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는 외부의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수동적이지 않다. 그 모든 일을 그는 자신을 위해 한다. 다시 말해 그는 배우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가면서 배운다. 바로 그렇게 배울 때, 그는 칭찬이나 비난을 관객들의 웅성거림 정도로 여기며 자신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것이다.



나오며


기간으로 따져보면 고작 1년을 채웠다. 그런데 벌써 글이 안 써진다고, 공부가 지친다고 징징대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생각해보면 올해 초까지 내가 쓰던 글은 소소한 대학 일기였다. 그마저 문장도 엉망이고, 내용도 엉성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공부하는 텍스트에 걸맞는 수준의 문장을 써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텍스트는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하고 쌓아온 철학과 사상을 풀어놓은 것인데 말이다. 그 내용을 완벽히 해석해서 유창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글쓰기의 이미지가 이렇게나 뚱뚱하니 나의 글은 계속해서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나의 허영이 놓인 자리가 딱 여기였다.



나의 단기적 습관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래도 넘어진 자리인 글쓰기가 다시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사실 똑같은 문제를 또 마주치게 될 거라는 걱정이 든다. 또 시간을 못 지키고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글쓰기에 등을 돌리고 담을 쌓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써보자. 잘 써지건 잘 안 써지건 그 글을 쓴다는 것이 나를 어떻게 달라지게 하는지를 우선 생각하자. 글쓰기와 함께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에 집중하자. 글을 쓰는 일이 업무가 아니라 수련이 되게 하자. 누가 뭐라 해도 쓸 수 있는 말을, 부끄럽더라도 꾸준히 써보기. 그래서 글쓰기를 칭찬과 비난에 대한 나의 과민증을 치료하는 과정으로 삼아보고 싶다.


“칭찬이나 비난에 무관심해지기 ; 이것이 그 처방이다. 그에 반해 우리의 목적이나 척도가 무엇인지 알며, 우리에게 중요한 칭찬이나 비난을 의미하는 어떤 집단을 스스로 정하기.”(『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11[1])


아마 나에게 칭찬과 비난을 의식하지 않기란 수년, 수십 년이 걸려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에 반응하는 나를 미워하지는 말자. 그러나 니체가 제시하는 한 가지 처방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칭찬이고 비난인지 그 척도를 구성해낼 수 있다. 모든 사회와 개인은 각자의 선의 위계와 가치평가의 척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척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7절) 이제 더 이상 나에게 학벌이 좋다거나 사회적 스펙이 높다는 것이 더 이상 칭찬으로 여겨지지 않듯이 새로운 척도, 새로운 칭찬이나 비난을 의미하는 가치 양식을 정해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는 그것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부인 것 같다.

전체 4

  • 2019-12-03 13:54
    사슴벌레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 한 편이 떠오르네요. 구석구석에서 온갖 모험을 겪고 있는, 저 커다란 세계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하고 위험한 삶.
    작지만 눈부신 존재, 사슴벌레 화이팅!

  • 2019-12-02 11:44
    질문하고, 텍스트를 통해 질문을 전제를 의심하고, 텍스트를 소화하면서 질문을 바꾸게 된 경위를 보여주는 것이 에세이라고 하던데 이 에세이가 그런 말을 대표하는 것 같습니다. 독창적인 해석도 좋지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글도 감동을 전해주네요. 너무 따뜻하게 읽은 건가? 하핫;;

  • 2019-12-02 19:17
    잘 쓴 글은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글임을 새삼 느낍니다. 사슴벌레의 지속가능한 공부를 응원합니다.

  • 2019-12-02 22:26
    코코를 함께 하면서 민호의 성실함과 촘촘함에 감탄했었는데, 밑바탕에 인정욕구가 그리도 들끓고 있었다니. 공부가 늘 힘에 부쳤다는 대목에선 살짝 목이 메기도. ㅎㅎ. 민호야 고기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