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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를 보라] 공부 즉 현행적 역량 (절차탁마S/이현정)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9-12-06 14:01
조회
436

공부 즉 현행적 역량


1. 들어가며


‘똑같다’라는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정서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질 것인데, 어떤 이들은 친숙함이나 편안함, 좋음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이 관념에 지겨움이나 지루함 같은 정서를 느껴왔고 동시에 그래서 달라져야 된다는 당위를 설정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항상 다른 나가 되기를 열망하면서, 내가 아닌 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마음 하나 바꾸는 것이 거의 우주를 바꾸는 것만큼 힘들다는 것을 안다. 마음 하나를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나 혼자 다르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하나가 바뀌기 위해서도 우주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 다른 내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는 많은 것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그동안 그 전제에 대해서 고민은 했으나 깊이 있게 자신을 대면하고 그런 욕망이 전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사유하지 못했다. 내가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실제로 외부의 관계에 의해서 실존하고 변화하는 자연의 필연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상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른’ 나라는 것에서 ‘다른’이라는 형용사가 ‘덜’이나 ‘못하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을 의미하는 것이니 항상 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교항을 도입하고 서열을 매기게 된다. 그 서열화에 따라 현재는 항상 결핍의 상태가 되고, 다르게 되어야 할 미래는 저 너머에 설정하게 되기에 그 목표를 향해 가는 현존은 즐거울 수 없다. 왜 나는 지금보다 더 잘하는 나를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못하고 있고 항상 결여된 채로 존재한다는 말이 아닌가? 다르게 되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관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마트롱에 따르면 “가치가 객관적”이라는 것은 “가상”이며, “이 가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 드러난다.” “이 가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본성상 자신의 개체적 자아와는 다른 무언가를 지향한다고 믿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성상 이 열망을 채워 줄 수 있는 특정 대상들과 특정 존재자들이 정해져 있다고 믿게 한다.”(『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알렉상드르 마트롱, 124쪽) 내가 세운 가치는 나의 신체를 경유해서 생산된 관념에 불과하므로 철저하게 부분적인 상상적 인식일 뿐이다. 그런 상상은 나의 가치라는 환상을 구축하고 그 환상의 체계를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들에 의존하여 고착화시킨다.



세상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는데도 왜 나는 차이보다는 반복만이 크게 느껴질까라는 고민을 오랫동안 품고 살았다. 한 번도 같은 봄은 오지 않는데도 왜 나는 모든 것을 그 무수한 차이들을 다 무시하고 똑같다고 치부하고 지루해하거나 지겨워하며 슬픔으로 이행할까? 분명 나를 잠식하고 있는 주요한 번뇌였으므로 여러 글에서도 문제를 토로한 적은 있었지만 명료하게 질문으로 구체화해내기에는 부족했었다. 결국 이런 고민은 공부를 하면서도 이어졌고 수많은 변용 속에서 변용을 거듭하며 공부를 지속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똑같이 사유하고 질문하고 있다고 느끼는 데에 이르게 했다. 난 정말 전과 똑같이 사유하고 질문하고 공부하고 있는 것인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 나는 매순간 전과 다르게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나는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왜 똑같은 질문과 사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유와 질문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똑같은 질문, 다른 질문 그리고 더 좋은 사유와 덜 좋은 사유가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 왜 똑같이 사유하고 질문하면 안 되는가? 나한테는 똑같다고 느껴지지만 이미 상황은 달라졌고 단 한 번도 동일한 조건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일 수 없다. 이미 새로운 시간과 공간, 다른 관계 속에서 하는 질문이니 똑같을 수가 없는데도 왜 똑같다고 느끼는가? 자연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똑같은 질문, 똑같은 사유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나의 관념과 정서를 문제 삼아야 하고, 그것이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그 발생 조건을 질문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같은 것으로 정의한다. 어떻게 실재하는 것만으로 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완전할 수 있는가?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기존의 통념을 가지고는 이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 의미나 목적 없이는 길을 나서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의 형상대로 사고하는 한 존재가 역량이라는 말을 체화하기 힘들다. 그것은 양태가 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내가 관계 속에서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즉 생에 대한 부정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생생불식(生生不息), 수시변역(隨時變易), 생과 멸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이 무한한 차이의 반복, 이 생성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어떤 변용의 방식만 고집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고착화된 변용에서 따라 나오는 관념과 정서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그런 전제들은 지금 나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부의 장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이번 글쓰기를 통해 공부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전제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공부를 역량의 관점에서 사유해보고, 관계로서 존재하는 나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2. 공부 즉 삶에 대한 통념


공부와 삶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그것이 하나의 태도, 에티튜드가 된다는 것은 나의 욕망, 정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욕망은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E:3:정서들에 대한 정의 1 해명)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공부를 하면서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며 또한 공부에 대한 욕망이 지금 나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이 본질, 역량이 되는 것이다. 드러나는 것이 전부라면 나는 태도를 통해 나의 욕망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일 터이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크면서도 나는 동일해 보이는 태도,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질문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태에 지겨움과 비슷한 정서나 잘 듣지 못하거나 지친 피로한 신체성을 얼마 전까지도 체험했었다. 그렇다면 공부에 대한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는 공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관념과 정서를 형성하고 있는가?


내가 받은 교육에서 공부란 당연히 해야 되는 의무였고 잘 할수록 성취감이 느껴지는 우열과 공과를 따지는 철저히 결과지향적인 행위였다. 나에게 이익이 되고 내 소유가 될 수 있는 앎을 추구하는 것이 공부라고 여겼고, 더 많이 아는 것과 덜 아는 것을 나누고 공부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단정 짓고, 정답이나 그에 근접한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했다. 정답을 아는 것을 앎이라 생각했고, 그 앎을 특권화하여 정답을 기준으로 삼고, 아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자책하며 앎과 삶을 이분화했다. 또한 그 특권화한 앎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결여로 느끼며 앎과 삶의 일치라는 표상을 목적으로 상정한 채로 살아왔다. 지식의 축적과 평가 그에 따른 보상의 체제, 기준과 척도에 따른 반복적인 학습은 정상성과 유용성은 증대시키지만 실질적으로 기쁨을 생산하는 신체 역량의 증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관계 안에서 더욱 수동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계 속에서의 공부가 아니라 혼자만 잘하면 되는 철저히 개인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해왔던 공부에 대한 관념은 감이당과 규문이라는 새로운 공부의 장에 접속한 이후로 변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공부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전제, 상이 많이 깨졌다고 생각했지만 공부를 통해 더 나은 나로 달라져야 된다는 관념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부를 과정이 아니라 수단으로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여전히 목적과 기준을 상정한 공부를 해온 것이니 그 자체로 계속 충만할 수 없었을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지 않는 순간에 설거지나 청소를 하거나 운전을 하면서 문득문득 기존의 알던 것이 새롭게 이해가 되는 순간들의 횟수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런 느낌의 순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찾아온다는, 나를 통해 생각이 구현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기쁨에 집착했고 그것이 좋은 것이며 그런 느낌의 순간들이 공부라고 생각하며 또 하나의 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했기에 계절이 바뀌고 몸도 바뀌고 점점 그런 자각의 순간, 느낌들이 줄어들어가면서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똑같은 질문과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변화란 그렇게 의식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공부의 상을 구축했던 것이다. 공부나 깨달음의 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나는 뭔가 그것이 그래도 실체적으로 있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인식주의자’로서 아는 것 이해하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했던 내가 느낌의 차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조금씩 느낌이 달라지면서 또 그것을 천착하면서 원해왔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지식도 눈에 띄게 느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느낌이라는 것이 어떻게 계속 일어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겠는가? 달리 느껴지지 않는다고 내가 느껴왔던 정념들이며 스스로 구성해온 앎이 다 무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비하이자 자만심인지를 이제야 알겠다. 두 정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혹은 더 못하다고 간주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슬픔”(E:4:정리57 주석)이라는 점에서 부적합한 관념에서 파생한 수동적 정념들이다. 결국 차이보다는 반복만 크게 느껴지는 문제는 ‘달라져야 된다’는 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더 좋은 무엇, 더 나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와 목적으로 환상을 구축한 것이다. 이것은 현존에 대한 부정이며, 이미 매순간 다른 나로 출현하고 있는 변용 개념과 실존이 역량이라는 정의를 체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공부에 대한 나의 욕망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공부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기대를 동반하고 외부에 종속된 채로 상대적이고 예속된 방식으로 욕망하는 것이 아닌가? 공부를 달라지기 위한 수단으로,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활용한 것은 아닌가?


3. 나의 고착화된 변용방식


변용이란 양태와 동일하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양태는 늘 변이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실존한다. 양태는 매순간 변용으로서만 존재하지만 내가 변용의 방식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태가 일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하듯이 양태는 실체의 변용으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본질을 구성하면서 존립한다. 또한 속성의 변용으로서의 양태인 인간은 두 가지 속성인 사유와 연장으로 끊임없이 생산하고 생산되면서 살아간다. 신의 변용으로서 양태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신 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양태와의 무한한 인과연쇄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독특한 본질들과의 마주침에서 끊임없는 변용을 겪는다. “실체로부터 행사되는 무한한 인과성”과 “양태들 안에서 실행되는 유한한 인과성”(『헤겔 또는 스피노자』, 피에르 마슈레. 236쪽) 속에서 우리가 처하는 제약과 규정은 매번의 마주침에서 다르게 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번 다른 변용을 거듭해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지 않을까? 무한한 다른 양태들과의 인과연쇄가 매번 똑같이 펼쳐질 수 없는데도 왜 우리는 자기만의 변용 방식에 고착되는 것일까?


우리의 변용이 신체 변용 즉 자신의 신체를 경유하는 변용이기 때문에 자신을 중심으로 변용을 겪고 그에 따른 관념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의 유한한 실존 조건이다. 우리는 그 신체 변용을 바탕으로 해서 상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의식을 출발시킨다. 문제는 대상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서 생긴 자신의 변용을 인식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몸만을 경유해서 생긴 관념을 전부라고 착각하거나 자신이 마주친 대상을 인식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상상의 메커니즘 때문에 우리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변용이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한 우리의 일차적 인식을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고, 신체는 이미 자연의 연관 질서에 따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념을 절대시하고 정서에 예속된다. 또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관념인 부분적 인식을 세상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으며, 부적합한 관념이 동반하는 정서를 대상에게 환원시키고 외부에 종속된다. 우리는 이런 고착된 변용 방식으로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환원해서 인과를 만들거나 대상화하고, 감정과 기억이나 이미지를 나와 동일시한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이런 인식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편협한 관념일 수밖에 없는지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 이렇듯 상상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유한한 인식 조건을 벗어나서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다른 양태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서 신체 변용을 겪는 그 지점에서 각자 독특한 변용을 겪고 관념과 정서를 발생시킨다. 그런데 매번 겪는 상황과 사건이 다른데도 우리는 동일한 방식의 변용을 겪게 된다. 마주치는 매번의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양태적 조건으로서 자신의 몸만을 경유해서 생기는 상상적 인식을 자기 중심화하는 동일시 메커니즘이나, 전체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인식하는 부적합한 인식의 조건, 또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관념을 바꾸는 것보다는 기존의 관념에 머무르는 게 더 쉽기 때문에 무지에 안주하고자 하는 습성도 이유가 될 것이다. 모두가 독특한 자신만의 변용 방식이 있고 그것이 매번의 마주침마다 자유자재로 변이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관성의 법칙대로 자신이 늘 하던 대로 변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미 사건은 달라졌는데도 기존의 변용만을 고집한다면 그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경우, 올해 공부를 하면서 실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공부가 아니라 느낌의 차원에서도 공부를 다르게 보게 되었고, 무엇보다 더불어 공부하는 기쁨을 실질적으로 많이 느꼈다. 그것은 기존의 나의 공부에 대한 관념을 변이시킬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변용의 체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부를 마주하는 나의 변용 방식이 예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어떤 방식의 변용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지를 검토해 볼 좋은 계기이기도 하다.



변용 방식은 내가 관계 맺는 방식, 자연적 실재들 즉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나의 경우는 어떤 특별한 상태를 관념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더 나은, 더 훌륭한 어떤 상을 만들어서 고정화하고 실체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특정한 상태는 위계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기준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치 있고 좋은 것으로, 열등한 것은 치부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이분화한다. 특정한 상태를 절대시하면서 그 하나의 기준을 중심으로 관계 맺는 이러한 변용 방식은 공부를 할 때도 적용되는데, 읽기나 글쓰기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도 일종의 완결된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텍스트가 완결되고 고정된 체계를 가진 무엇이라고 전제하고 어떤 한계나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텍스트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개되는 텍스트에 반감을 갖게 되는 식으로 작동했다. 이렇게 텍스트를 완결성을 전제로 환원하는 방식은 글쓰기에서도 드러났다. 글을 쓸 때마다 완성된 형태의 잘 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텍스트를 다 이해하고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듯이 글쓰기도 완벽한 체계를 갖춰 잘 쓰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텍스트나 글쓰기를 과정과 활동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하나의 완결되고 정형화된 상태를 상정했기에, 도달할 결론에 미치지 못하는 읽기나 쓰기는 그 자체로 즐거울 수 없었다. 읽기나 쓰기를 과정으로서 사유하기보다는 완벽한 상에 도달해야 되는 수단으로 설정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우연들을 피하고자 뭔가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는 자유의지를 발동시키게 된다. 그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안전하고 익숙한 방식을 고수하는 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다양한 읽기와 쓰기의 시도는 제한적으로만 행해지게 된다. 따라서 목적과 당위를 고집하는 읽기와 쓰기의 방식에서는 기쁨이 생산될 수 없고 일면적으로 능력은 증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역량의 증대, 기쁨으로 전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상태를 관념화하고 상을 만들어 실체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변용은 매번의 마주침에서 수동적으로 협소하게 관계 맺는 형식으로 작동한다. 또한 내가 부딪치는 사건이나 대상을 어떤 특정한 상태라는 전도된 이미지로 만듦으로써 실재의 두 상태를 대립시킨다. 나에게 인과 질서는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선형적 규정이 되고, 어떤 상태라는 표상을 수단으로 삼아 목적론적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어떤 상태에 대한 관념화는 비교의 척도와 당위를 끌어올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다. 이분법·초월론·목적론은 이렇게 세트로 작동하고, 내가 원하는 상태라는 환상과 기대는 매번 충족되지 못하고 실망과 후회라는 수동적 정념으로 이어진다. 환상에 기댄 관념, 부적합한 인식과 그에 잇따르는 수동적 정념은 삶의 예속화를 더 가중시키며 현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게 한다.


나에게 드러나는 고착화된 변용 방식을 살펴보면서 내가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변용 방식은 존재를 변이로서 관계 속에서 사유하지 못하는 것이며,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재성이 곧 완전성’이고, ‘존재 즉 실존함이 역량’이라는 말이 쉽게 체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완전성을 외부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규정짓고 역량을 가능태로서만 생각하는 전제가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실재성 곧 역량은 실현되기 위해서 다른 외부 원인을 필요로 하는 가능태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현실적인 힘의 실행 자체이며 결과들을 생산해내는 원인의 활동 자체, 즉 활동하는 역량이자 현행적 역량이다. 내가 사람들이나 텍스트와 글쓰기와 관계 맺는 방식이 내 변용 역량이자 실재성인 것이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 지금 읽고 있는 책, 지금 쓰고 있는 이 에세이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이며, 어떻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것을 사유하고 행위하고 있는 이 순간 나는 그 노력만큼 나의 실재성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떤 특별한 상태를 꿈꾸는 것은 자아에 대한 상을 공고히 하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어떤 상태를 관념화하는 것은 단지 그 상태만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태 속에 들어가 있는 나를 특권화한다. 즉 내가 있음이라는, 그것도 지금의 나가 아니라 더 훌륭한 무엇으로서의 나가 있다는 전제는 자신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공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지금 생산하고 있는 것들을 부정하고 자신을 환상과 허구의 공간인 자아,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에 가두며 나를 비롯한 세상을 부정하게 된다. 나와 세상,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이것들 사이에 끊임없는 간극을 발생시키고 결국 정신과 신체, 인식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4. 공부, 사유 역량, 관계 역량


어떤 특정한 상태를 실체화하는 관념과 ‘다른 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내가 미처 사유하지 못한 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계로서의 나의 실존을 여전히 체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상태나 다른 나에서 빠져 있었던 것은 관계였다. 다른 나가 되는 것이 순수한 개인으로서의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존재를 관계와 분리한 채로 사고하고 있었다. 지금껏 나는 관계로서만 실존하는 나를 이해한 듯 이야기해 왔지만 여전히 관계를 배제한 상태에서 다른 나를 상정해 왔거나, 관계에 대한 상을 만들어서 실체화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계는 주체인 내가 주체인 너와 맺는 것이라는 생각과 내가 상정하는 관계란 매끈하고 좋은 관계라는 상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존재는 관계이며 개체는 무수한 복합체의 과정이자 결과가 되는 것일까?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인식되는 나를 이해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어떤 다른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공부는 역량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실체의 변용’들 곧 ‘양태’이다. 또한 양태인 우리는 “신의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E:1:정리15 증명)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것과 신의 본성에 의해서 존재하고 인식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제약되고 규정된 조건에서 혼자서 존립할 수 없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관계들만이 실존할 뿐이다.”(『헤겔 또는 스피노자』, 피에르 마슈레. 288쪽) 관계들만이 실존한다면 나는 관계로서만 실존하는 것이다. 관계가 아니라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다. 다른 독특한 실재들과의 무한한 인과연쇄 안에서 무한히 합성되고 규정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다. 또한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면 인식 활동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부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아도 공부란 혼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책이라는 물질성과 접속해야 하고 인터넷 강의를 듣더라도 컴퓨터와도 접속해야 한다. 관념을 연쇄해가는 과정에서조차 나는 주체일 수 없다. 정신적 자동장치는 주체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다른 관념과의 마주침 속에서 변용하고 변용되면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나는 고정되고 불변한 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내가 주어가 아니라 관계가 주어가 된다면 관계라는 활동과 결과가 있을 뿐이고 나는 활동과 결과로서 매번 구성되고 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와 관계를 구분 짓고 나와 활동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는 내 습관화된 인식패턴이다. 내가 실재성이 곧 완전성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도 실재성 즉 완전성을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큰 실재성, 완전성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나의 활동 속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위와 목적으로만 상정했고 그것을 나 자신과 분리한 채로, 나 자신과 역량을 분리한 채로 사유했기 때문에 내가 펼치는 활동만큼이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실재성은 실행하는 활동과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설정하는 목적이나 당위조차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 활동과 함께 구현된다. “결과란 활동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알렉상드르 마트롱, 24쪽) 활동 자체가 목적을 만들어내면서 결과를 산출한다. 즉 활동 자체가 목적이자 결과이며, 내가 지금 펼치는 역량만큼 결과가 산출된다. 나의 활동이자 결과가 곧 나의 실재성이다. 그러나 나의 활동과 결과도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인식된다. 내가 맺는 활동의 관계가 서로 결합되는 관계라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고 서로가 해체되는 관계라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내가 공부의 장에서 적합한 관념을 계속 연결시켜갈 수 있다면 그 연결이 확장되어 가는 만큼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해가는 것이고 역량이 증대되는 것이다.


공부란 끊임없이 변용하고 변용되는 관계 속에서 자연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관념을 연쇄지어 가는 시도의 과정이다. 적합한 관념 안에는 모든 결합과 해체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고 유한한 신체로 경험할 수 없는 결합관계들도 사유 속성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시도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하여 관념의 결합을 어떻게 더 많이 형성해갈 수 있느냐 없느냐 만큼이 변용 역량이자 사유 역량이다. 내가 동일한 관념의 연쇄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이미 사건과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하나의 변용 방식만 고집하는 것이고 다른 관념과의 연관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관념과 다른 실재들 간의 관념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해나가는 것, 그렇게 접속을 늘려나가고 합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관계 맺기의 역량이다. 관계로서의 마주침에서 우린 서로에게 합치하는 것이 많을수록 기쁨을 느끼며 “기쁨에 의해 더 많이 변용될수록 더 커다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된다.”(E:4:정리45 주석) 우리는 본성상 우리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을 추구하고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공부를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본성상 합치한다고 말해지는 것은 역량에서도 합치한다. 즉 합치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역량도 증대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합치되는 것들과 만났을 때 기쁨을 느끼며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고 나와 불일치되는 것을 만나면 슬픔을 느끼며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기쁨을 느끼는 합치되는 관계와는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체 또는 주체는 유일하고 영원하고 환원 불가능한 존재의 단순성 속에서 자기 자신에 의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 안에서 자신들의 실존과 관련하여 상황에 따라 서로 화합하는 독특한 존재들의 마주침에 의해 합성된다.”(『헤겔 또는 스피노자』, 피에르 마슈레. 285쪽) 양태로서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발현해 나간다. 그 과정 속에서 나의 본질과 다른 실재의 본질은 합성되고 나의 본질이 이질적인 타자들과 접속하는 그 역량만큼 타자의 본질이 나의 현행적 본질을 구성한다. 이렇게 다른 타자들과 합치를 형성해가는 역량만이 나의 본질을 구성해가는 방식이다. 다른 독특한 존재들 간의 접속을 실험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과 어디까지 접속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즉 인간의 본질은 현행적이며 구성적이다. 매번 같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공부를 해도 똑같은 관계일 수 없는 것은 매순간 차이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란 이질적인 것과의 조우이다. 다른 관념들과의 부딪침, 낯선 책과 글과의 조우, 기존의 사유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 순간들, 새로운 사유와의 갈등 등, 다른 생각과 만나고 다른 말을 접하고 그런 것들과 때로는 불일치하고 때로는 합치를 이루면서 기쁨과 슬픔을 오고가는 체험 속에서 매순간 어떤 것을 만들어가는 그 지금만이 존재한다. 모든 것은 마주침과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생산해낼 때만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공부의 장에 나를 계속 위치시키려고 하는 것은 공부가 나에게 유용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부의 장에서 느끼는 유용함이란 무엇일까? 지식이 늘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공부의 역량을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부의 과목 수를 늘리면 공부의 과목을 바꾸면 많은 관계를 맺으면 되는 것인가? 매번 다른 책을 읽고 매번 다른 사람을 만나고 동시에 여러 과목을 공부하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면 역량이 커지는 것인가? 글을 잘 쓰게 되고 더 많은 책을 읽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종종 느끼는 지겨움이란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때 느껴진다. 그렇다면 매일 다른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세미나를 한다고 해도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다르게 느껴질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의 양이 늘어나거나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공부의 기쁨은 아니다. 공부란 사유가 얼마나 더 적합해질 수 있느냐, 적합한 관념의 연쇄를 얼마나 더 풍부하게 형성해 나갈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그럴 때 공부의 기쁨은 어떤 관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유용함을 느낀다.


공부에 국한시켜 좀 더 생각을 해보자면 공부란 사유 활동이다. 스피노자의 적합한 관념을 대입시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계속 생산해낼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적합한 관념이란 마주침에 의해 변용되는 나와 세상을 자연의 필연성에 따라 이해하는 방식의 확장이자 전환이다. 적합한 관념의 연쇄를 계속 이어가는 작업과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적합한 관념은 고정된 하나의 관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관념의 연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는 활동이기에 사유조차도 고정된 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생멸의 과정을 거듭한다. 모든 것을 관계의 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나의 관념의 형성은 오직 나만의 관념의 형성일 수 없다. 공부의 장에서 어떤 관념이 어떤 관념을 만났을 때 그 관념간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공부의 장이라는 관계의 장에 있으면서 늘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더불어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관념간의 우발적 마주침에서 이 관념이 어떤 조건 속에서 생겨난 관념이고 어떻게 연관지어 사유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고 그로부터 다른 관념을 연결시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적합한 관념의 연쇄를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 기쁨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단지 공부의 장 안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장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 모든 것에서 배움이 일어남을 알게 되는 기쁨의 체험이 된다.


번다한 일상과 공부의 장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게 된다. 전에는 많은 일상의 일들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것이 방해받는 것 같아 조급해지거나 짜증이 나는 적도 있었지만 이젠 산만한 일상의 일들은 그것대로 처리하고 그 사이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면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는데 하고 걱정을 하거나,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며 공부해야 되는데 하고 조바심내는 일은 이제 많이 없어졌다. 그렇게 현존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현재를 살게 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공부의 장에 계속 위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매번 출발점에 자신을 세우는 초발심이 공부의 항상심이라고 생각한다.


5. 나가며


우리는 흔히 사람과의 관계만 떠올리지만 모든 것과 관계 맺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공기와 관계 맺고 음식과 관계 맺고 때로는 바람과 관계 맺고 이 컴퓨터, 이 책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란 어찌 보면 매순간 이질적인 것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일 수밖에 없다. 우발적 마주침 이전에 나는 없지만 그 마주침을 통해 출현하는 나는 그 마주침을 어떤 방식으로 만날 것인가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 이번 에세이를 쓰는 과정은 혼자만의 글쓰기가 아니라 더불어 쓰는 공동의 활동이었다. 서로의 글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글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은 끊임없이 나의 인식을 교정해 나가는 과정이었고, 기존의 사유를 붙잡고 나를 대면하고 또 대면해 보는 시간이었다. 뿌리 깊이 내재해 있는 주체적 사유를 다른 실재들과의 마주침에 의해 합성되는 관계의 장에서 사유해 보는 시간이었고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한 잘해왔다는 것을 긍정한 시간이기도 했다.


올 한해 스피노자라는 위대한 스승을 따라 공부해왔던 이 과정, 스승님과 동학들과 더불어 에세이를 완성해가는 이 과정이 내게는 공부의 역량을 증대시킨 과정이었고 기쁨의 체험이었다. 나의 공부가 나만의 공부일 수 없음을 이 시공간과 다른 모든 독특한 실재들과 더불어서 매번 생성되는 것임을, 그리하여 나의 공부는 우리 모두의 공부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매순간 생성되는 것으로서 우리의 공부가 있다.



글 : 이현정

전체 3

  • 2019-12-07 11:32
    글을 읽으며 올 한 해 다른 듯 같은 고민을 하며 한 공간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구나, 느꼈습니다. 더 분명해진 현정쌤의 질문과 탄탄한 글이 현정쌤의 현존 역량이겠지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 2019-12-09 19:06
    마지막에 큰 걸음 성큼!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시는 현정 선생님의 글을 사모합니다. 감사합니다. ^^

  • 2019-12-08 16:21
    에세이를 쓰는 과정이 혼자만의 글쓰기가 아니라 더불어 쓰는 공동의 활동이었다는 말이 훅 와 닿네요.
    이질적이고 우발적인 것들에 대해 새로운 관념을 멈춤 없이 잇고 다듬으며 우리 자신이 달라지는 것, 변용의 방식을 거듭 고쳐갈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것이 공부라는 것을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