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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현대정치학 8주차(11.13) 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17-11-17 00:59
조회
140
스피노자와 현대정치학 8주차(11.13) 후기

 

지난 시간에는 스피노자의 정서의 메커니즘과 정서 모방을 중심으로 진태원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정서는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관계의 토대, 국가의 토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깨알(?) 같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들을 때는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 듯했는데 많은 내용을 요약, 정리하려니 쉽지 않습니다.

 

(국가의 정서적 토대)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자연권은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회상태 속에서도 갈등과 분열, 반목이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는 의미지요. 그는 『정치론』을 통해서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하며,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테제를 제시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이미 사회성의 경향이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회성의 경향’이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정서들은 이미 사회적 관계망 속에 들어와 있다는 뜻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대중들이 “자연적으로 합치”하는 것은 이성이나 개인들 각자가 느끼는 개별적인 정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공통의 정서 때문입니다. 정서가 반목과 분열, 갈등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공동의 행동과 생활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정서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사회관계의 토대, 국가의 토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상호수동성과 정서모방)

우리는 대개 욕망이나 정서를 개인의 고유하고 내밀한 주관적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슬퍼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정서모방’이라는 개념을 통해 욕망이나 정서가 스스로의 의지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슬라보예 지젝도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슬픔이나 웃음 같은 정서 작용이 사실은 직접적이거나 자발적이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상호작용(interactivity)이라는 개념이 A와 B라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를 전제하고 그들이 서로 자유롭게 작용을 주고받는 것을 뜻하는데 반해, 지젝의 상호수동성 개념에서는 A와 B가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행위자가 아니고 그 사이에 ‘타자’가 있다고 합니다. 즉 A와 B는 타자에 의해서, 타자에 종속됨으로써 비로소 관계를 맺게 되고 타자가 없으면 서로 행위자로 성립하지도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서의 연역)

스피노자는 인간의 욕망과 정서들도 다른 독특한 실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 결과가 원인 자신에 의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적합한 원인이 되며, 그 결과가 원인 자신만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결과의 적합한 또는 전체적인 원인일 때 우리는 ‘능동적’이 되며 우리가 어떤 결과의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 원인일 때 우리는 ‘수동적’이 됩니다. 내가 타자로부터 어떤 작용을 받거나 변용될 때 이를 수동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보통 능동과 수동을 ‘결과 개념’으로 쓰지만, 스피노자에 있어 능동과 수동은 둘 다 ‘원인개념’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푸코의 ‘규율’ 개념은 신체의 유용성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화시키는 기술을 뜻하는데, 규율권력 아래서 수행하는 행위가 바로 스피노자의 ‘수동’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규율권력 아래서 노동자, 군인, 학생은 스스로 행위를 수행하는 원인이기는 하지만 감독, 교관, 교사의 규범에 복종하여 행위하므로 부분적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수동은 단지 힘이 약하거나 무력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왕성하게 활동한다 해도 다른 누군가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거나 다른 누군가의 이익에 따라 행위한다면 그것은 수동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정서모방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다만 외부로부터 우리가 변용될 때에도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은 아니며 우리의 변용됨 자체에는 우리 자신의 원인으로서 반작용, 굴절 등이 전제된다고 합니다.

정서란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데, 우리가 이 변용들 중 하나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정서는 능동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정서는 수동입니다. 스피노자는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활동, 역량을 코나투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실재의 본질이며 인간에게는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욕망이란 코나투스의 인간적인 표현인 것이지요. 스피노자의 정서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정서가 역량의 증대, 감소와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서는 행위자의 신체적인 행위역량의 증대나 감소와 관련됩니다.

우리의 정신은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있고 때로는 더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적 정념이며,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적 정념입니다. 어떤 행위자가 기쁨을 느낀다면 자기보존역량이 증대하고, 슬픔을 느낀다면 그 역량이 감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윤리란 슬픔을 피하고 기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욕망,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의 일차 정서로부터 다른 모든 정서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사랑이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외부 원인, 대상에 대해 느끼는 정서이며 미움이란 자신에게 슬픔을 주는 외부 원인, 대상에 대해 느끼는 정서입니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며 코나투스 즉 욕망은 때로는 정신을 통해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됩니다. 정신적 기쁨은 신체의 행위역량 증대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우연에 의해 즉, 아무런 이유 없이 오로지 공감이나 반감에 의해 어떤 것들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대상과 유사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대상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하면 우리는 그 실재에 대해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상반된 두 개의 정서에서 생겨나는 정신 상태를 마음의 동요라고 하는데 이는 정서의 모방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정서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의 시간성과 관련해서 분화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불확실하게 여기는 미래나 과거의 것에 대한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기쁨은 희망의 정서가 되며, 불안정한 슬픔은 두려움의 정서가 됩니다. 여기서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희망으로부터 안도가, 두려움으로부터 낙담이 나옵니다. 또한 우리는 정서 주체인 자신에게서 직접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대상에서 일어나는 일로부터도 정서의 변화를 느낍니다. 즉 자신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파괴되거나 보존되는 것은 자신의 역량과 무관하게 외부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일임에도 이 타자에 대한 의존을 통해 정서를 느끼게 됩니다. 수동성이 외부 원인 곧 타자에 대한 의존을 함축하는 만큼 이러한 정서는 정의상 수동적인 정서가 됩니다.

 

(정서 모방)

부모는 자식이 기뻐하면 그로 인해 기뻐하고 자식이 슬퍼하면 그로 인해 슬퍼합니다. 이 관계에서 사랑의 대상인 자식은 별도의 정서적 주체로서 사랑하는 주체인 부모의 코나투스, 욕망의 일부가 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연인 사이나 연예인과 팬, 정치인과 지지자 등으로 무한정하게 확장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주체의 욕망과 사랑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은 그것이 더욱 더 외부 원인 곧 타자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로 외부 원인에 의해 정서를 느끼기 때문에 본래 수동적인 우리는 이제 우리의 정서를 규정하는 외부 원인의 증가로 인해 더욱 수동적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정서적 벡터의 전환이 일어나서 주체의 정서 작용이 대상의 정서 작용에 의존하게 됩니다. 정서 모방은 우리가 직접적인 정서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해 단지 그 대상이 우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대상이 겪는 것과 비슷한 정서를 우리가 갖게 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정서 모방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 이제 정서적 주체로서의 우리의 자율성 내지 주체성은 상실되며, 우리가 겪는 정서는 우리와 독립해 있는 외부 대상에 의해 규정되면서 우리의 정서적 수동성은 더욱 강화됩니다.

정서 모방은 우리와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제3자 즉, 또 다른 정서 주체가 맺는 정서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이제 우리가 아무런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고 다만 유사하다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정서적 원인이 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양자 관계가 아니라 3자 관계로 확장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정서 관계의 벡터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정서의 주체였던 우리는 주체성을 부분적으로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제3자라는 정서 주체가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대상에 의해 어떤 정서를 겪느냐에 따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정한 정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과 제3자 사이에 일어나는 정서적 관계에 따라 일정한 정서가 발생하는 장소가 되며, 그러한 정서적 관계에 대한 수동적 경험자 내지 행위자가 됩니다. 만일 제3자도 우리와 같이 수동적인 위치가 된다면 지젝이 말한 상호수동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연민은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중요시했으며 우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서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연민을 타인의 불행에서 생겨나는 슬픔이라고 정의하며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연민은 그 자체로 나쁘며 무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연민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본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정서 모방에 의해서도 연민을 느끼는데, 우리와 아무런 정서도 갖지 못하던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우리와 유사하다고 판단하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암비치오의 전도)

암비치오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인데 과도하면 지배욕이 되는 그러한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은 사람 좋음 또는 예의바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해 암비치오는 자부심에 대한 과도한 욕망입니다. 우리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무릅쓰고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쓸 때 암비치오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싫어하거나 또는 그 역의 경우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어 필연적으로 이러한 동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서 모방이 결부될 경우 이러한 노력은 예기치 않은 전환, 심지어 전도를 낳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암비치오는 거꾸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과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지배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화합 또는 일치의 동력으로 나타났던 정서 모방이 보편적인 갈등과 증오의 동력으로 전환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배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라고 합니다. 내가 타인들을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하는 그만큼 타인들 역시 나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의 노력은 타인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타인들의 저항에 좌절하게 되면 내가 타인의 기질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내가 타인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그들이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타인들이 공유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을 다투는 나의 경쟁자가 되기 때문에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욕망은 정서 모방에 오게 되면 이미 나의 욕망이 아니게 되며 나의 욕망에는 이미 타자의 욕망이 들어와 있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이 욕망인 한 인간들은 욕망하지 않고서는, 정서적 활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인간들이 항상 이미 정서 모방의 연관망 속에 들어 있는 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 정서들을 모방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본질을 이루는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정서적 관계는 개인들의 정체성에 내재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관개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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